
슬픔의 뼈대를 지나 사랑의 길로
곽효환
나와 너는 무엇이 혹은 어디가 먼저 성립되어야 하는 개념인지 모른다. 너는 나와 다름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나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시공간을 포함한 인식과 감성의 차원에 서 먼 곳에 있는 순간 너는 언제든 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인칭을 이인칭으로 끌어들이는 인력 또는 장력은 분명 나에게 있다. ‘나’와 ‘너’가 하나의 장場 속에 있어야만 이인칭은 가능하다. 그 다가감과 물러섬, 수렴과 확산의 거리가 ‘우리’라는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힌다. 나는 너를 만나 나라는 존재의 결여를 존재론적 유일성으로 만들고 너 또한 나라는 존재에 의해 개별화된다. 개별적 두 존재가 되어야만 소통과 회통이 가능해진다. 동일성의 포섭과 배제의 장 안에서는 너도, 우리도 존재할 수 없다. 주체의 시선은 대상을 향할 때도 언제나 자기의 빈자리를 내보이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는데, 주체의 판단을 유보하는 자리에 타자가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시선 속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의 이질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체를 고정된 자리가 아니라 유동적인 흐름 속에 내맡기는 태도에서만 가능하다. 곽효환의 시는 우리 안의 타자를, 내 안의 타자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폭설을 동반한 첫눈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걱정을 했는데 전주는 상대적으로 포근하고 화창했다. 전주역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역사 개축 공사로 주위가 복잡했다. 힘겹게 역 앞 도로에서 곽효환 시인을 만나 사진작가와 나는 바로 송천동으로 향했다. 오늘 둘러볼 곳이 많아서 마음이 조급했다. 송천동은 시인이 유년 시절을 처음 보낸 곳이다.
시인은 1967년 음력 8월 8일 전주시 전동에서 아버지 곽상훈과 어머니 이정원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잠업검사소 소장으로 재직하던 조부의 관사였다. 지금의 위치로는 성심여자고등학교 근처라고 한다. 외아들로 누이동생만 셋을 둔 아버지가 결혼해 첫딸을 낳은 다음 본 장손이 었기에 조부모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조부가 은퇴한 후 전주시 외곽인 송천동에 커다란 텃밭이 딸린 널따란 대지 위에 큰 개량 한옥을 짓고 살았다. 그 당시 도심이 전주역 주변과 경 기전 근처였으니 전주의 북서쪽 외곽이었으며 만경강 너머 익산이 가까웠던 송천동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전주천을 따라 아파트가 즐비한 주거단지가 되었다.
개량 한옥은 파란 대문이 있는 마당 넓은 집이었다. 은퇴한 조부는 마작판과 작은댁으로, 아버지는 다른 지방 도시로 떠돌아 집은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과년한 고모들이 지키는 ‘여인들의 집’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송천동 시절을 유년의 가장 풍요로웠던 때로 기억한다. 그 당시만 해도 비포장도로였던 신작로에서 접어드는 골목 어귀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었고 가게들이 띄엄띄엄 있었다. 술도가도 있었는데 종종 손님이 오시면 술 심부름을 다녀오기도 했다. 손님들은 이 파란 대문 집으로 오기 전에 푸줏간에 들러 고기를 한두 근 끊어서 손에 들고 왔다. 열 명 남짓 되는 대식구여서 살림을 여유롭게 꾸리기는 힘든 시절이라 어린 시인은 밥상에 고깃국이 오른 날 우연히 자기 국그릇에 담겨온 고기가 붙은 뼛조각 한 점을 너무나 맛있게 정신없이 빨아 먹었다. 국물이 다 빠진 뼛조각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손자를 안타깝게 본 할아버지는 며느리를 탓하셨다. 집 뒤편 과수원을 지나 조금 걸어가면 언덕 정도 되는 조그만 산이 있었는데, 고모는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어린 조카와 함께 짧은 소풍을 다녀오기도 했다.
시인에 따르면, 전주 사람의 표준이나 모범으로 인식될 만한 문단 어른으로 최일남 소설가와 송하춘 소설가를 꼽는다. 생전에 뵌 최일남 소설가는 속이 깊고 얌전하며, 소박하시면서 점잖은 자세를 잃지 않았다. 밖으로 대놓고 자신의 의사 표시를 하지는 않으 면서도 우회적으로 심지를 굽히지 않는다. 언뜻 충청도 기질과 맞닿는 면이 있다. 전주에서는 ‘보배움이 있다’라는 말을 쓰는데, 여기서 ‘보배움’은 보고 배움의 준말로 어른들의 태도와 행실을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면서 예의범절을 몸에 익힌 것을 말한다.
우리는 먼저 송천초등학교에 들러 학교 주변을 둘러본 뒤, 옛 파란 대문 집을 찾으러 갔다. 송천동을 찾아온 지는 전주를 떠나고서 거의 처음이라 시인에게도 생소했다. 기억 속에 있는 신작로와 등굣길 그리고 집 뒤편에 있던 산을 더듬어 찾아간 곳은 지금의 도립여성중고등학교 주변이었다. 집터는 흔적도 없고 집이 있던 자리에는 창고로 쓰이는 건물이 서 있었다. 골목을 조금 들어가 전주책마루어린이작은도서관 앞의 삼거리에 이르자 유년 때 뛰어놀던 곳과 이웃집들을 기억해냈다.

송천동 집터에서.
송천동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덕진공원이 있는데 그 당시 전주의 관청이나 민간 행사는 대부분 여기서 열렸다. 원불교가 발원한 익산이 가까워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송천동 사람들 중에는 원불교 신자가 더러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도 불교와 원불교를 오가면서 종교 생활을 하셨는데, 하루는 덕진공원에서 원불교 집회가 크게 있어 어린 시인을 데리고 다녀오기도 했다.
송천동에 살기 전 잠깐 바닷가가 보이는 포항에서 살기도 했다. 포항 아이들이 가장 큰 물고기가 고래라고 했는데, 시인이 본 가장 큰 물고기는 메기였다. 시인이 직접 실물로 본 메기가 그 실제 크기를 짐작하기도 힘들고 보기도 어려운 고래보다 더 크다는 논리를 펴서 아이들과의 말싸움에서 이기기도 했다. 내륙에서 자란 그는 고래를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구 남매의 장손이었다. 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은 경찰이었는데 한국전쟁 때 돌아가셨고 셋째 동생은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셨다. 그분은 전쟁 후 신분을 숨기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셨으며 전쟁 후 고향인 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웃의 눈을 피해 부안에서 지내다가 조용히 삶을 마감하셨다. 제삿날이면 집안 사람들이 파란 대문 집에 모여 크게 제사를 지냈는데, 부안 작은할아버지가 손수 해산물을 들고 오셨다.
할아버지는 전라북도 잠업검사소 소장이었는데 전라북도의 잠업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외가는 오수와 인접한 장수군 산서면 대창마을에 있었다. 외가는 농사를 크게 지었는데 도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전주 말로 ‘도 부자’라고 한다)이었다. 어머니는 그 집안의 딸이었다. 재력 있는 집안과 직책이 높은 공무원의 결합이었다. 그 당시 잠업이 크게 번성할 때여서 오가는 돈이 워낙 컸기 때문에 산더미 같은 지폐를 지게로 지고 다녔다고도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퇴직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1917년생, 아버지는 1938년생. 시인의 누나가 1965년생, 시인이 1967년생. 시인이 태어날 무렵에 할아버지는 쉰을 넘기셨던 것이다. 그 당시 공무원의 퇴직 나이가 쉰 살인 것은 크게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주 시내 쪽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고 동서학동으로 이동했다. 전주를 떠나기 전까지 살던 곳이 동서학동이었다. 송천 초등학교 2학년 때 조부의 개량 한옥이 빚으로 넘어간다. 할아버지가 노름빚을 크게 진 것이 원인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임실로 들어가시고 어머니는 삼 남매를 데리고 동서학동의 전북 대학교 소 교수 집에 딸린 별채를 얻어 분가를 한다. 그곳에서 막냇동생 효성이 태어난다. 단층의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마을이었는데 오른쪽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전주교대가 있었고 남쪽에는 전학 온 전주남초등학교가 있었으며 그 반대편 전주천을 건너서 조금만 걸으면 경기전과 전동성당, 풍남문이 있었다. 이 모든 곳이 어린 시인이 친구들과 놀던 놀이터였다. 일 년여를 그 곳에서 살다가 인근 세탁소가 있는 집으로 이사하였다. 시인은 전주천에서 놀던 기억을 시로 풀어내기도 했다.
“내 유년은 전주천 공수내 다리 아래로 흘러갔다/ 작은 아이들이 다람쥐처럼 넘나들던 녹음 속에 똬리를 튼 교육대학 붉은 벽돌 건물과 담 구멍, 세탁소 골목길 그 막다른 집, 이차선 좁은 도로 건너 전파사, 한 집 건너 작은 슈퍼 그리고 과일가게 옆 오래된 기름가게”
(「고무신 배를 띄우다」, 『지도에 없는 집』).

소 교수 집 대문과 골목의 모습.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던, 세탁소를 하던 친구 집에 가서 만화영화 <서부소년 차돌이>를 보았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미국 서부를 개척하는 정의로운 소년에 매료되었고 밤 아홉 시경이면 잠자리에 누워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며 상상력의 나래를 폈다. 학급 반장을 맡았는데 전주의 학교별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운영하는 ‘고전읽기반’에 뽑혀 초등학생이 소화하기 어려운 여러 고전을 읽고 감상문을 쓰고 토론하는 훈련을 했다. 그때만 해도 전기가 자주 나가 어두운 방에서 촛불을 켜고 책을 읽었는데 그 때문인지 시력이 많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촛불을 켜고 공부하는 어린 시인을 대견해하셨다.

전주천에서
또 하나 강렬한 기억은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막냇동생 해산을 앞뒀을 무렵 보름 남짓을 누나와 함께 다시 송천동에서 통학해야 했던 것이다. 버스를 내려서 전주남초등학교로 가는 골목을 학생들의 무리에 섞여 걸어가고 있으면 어머니가 골목에 나와 앉아 계셨다. 남산만 한 배를 하고 쪼그려 앉아서 등교하며 지나가는 누나와 시인을 보고 돌아가시고는 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나와 있지 않아 의아했었는데 어른들로부터 동생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서학동의 소 교수 주택은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주신 「국민교육헌장」 암기 과제를 학급에서 제일 빨리 통과해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서둘러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조바심과 안타까운 기다림 속에 해는 기울어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기다리던 어린 시인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잠들었다
시인과 전주교대를 나와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예전에 살던 골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전주남초등학교로 가는 등굣길은 이제 서학동예술마을로 조성되어 카페와 공방이 가득한 운치 있는 골목이 되었다. 옛 양옥집이 약간의 손질을 더해져 아담하고 운치 있는 상점들로 바뀐 것을 시인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몇몇 골목들을 들락날락하다가 소 교수 집으로 특정할 수 있는 집을 찾았을 때 시인은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예전에는 안채와 별채가 있는 마당 넓은 집이었는데 지금은 담으로 그 당시 안채와 별채를 가른 독립된 집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 무렵 서울로 이사하여 서울 남성초등학교로 전학한다. 이사는 갑작스러웠다. 아버지는 먼저 서울에 올라가 계셨고 어머니와 자식들은 뒤따라 올라간다. 전주역에서 어머니가 사주신 요구르트가 너무 맛있어서 찔끔찔끔 아껴 마시다가 그만 쏟고 말았는데, 어머니는 크게 혼을 내고는 다시 사주지 않으셨다. 시인이 느끼기엔 처음 먹어본 천상의 맛이어서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입맛을 다셨다. 부산 등지를 떠돌다 돌아온 아버지를 따라 정착한 곳은 서울의 봉천동이었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실패한 지식인이었다. 전주 지역의 엘리트 코스인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를 거쳐 전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셨다. 그 당시에 아버지가 읽으셨던 백철의 『신문학사조사』 같은 문학 교과서들이 아직 남아 있다. 아버지는 키는 작지만 다부진 몸과 각진 얼굴을 가진 강단 있는 분이셨다. 젊었을 때는 운동과 친구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성품을 가진 청년으로 군인이 되거나 농촌 개간운동에 투신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군인이 되지 못한 것은 밑으로 여동생만 있는 장남이기도 했고 현대사의 아픈 질곡으로 비명횡사하거나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던 동생들을 둔 할아버지의 뜻이 완강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신혼 시절 임실군 청웅면 중산리에 3만 평의 땅을 사서 개간 사업을 하면서 일종의 농촌 부흥 운동에 힘쓰셨는데 워낙 오지이기도 했고 사업도 뜻대로 되지 않아 몇 해 버티지 못하고 다시 전주로 돌아온다. 아버지가 그 이후에도 여러 사업을 전전하셨던 것은 군 경력이 없어 취업에 제약이 많았던 군부 독재 시절의 탓도 컸다. 어머니는 키가 크고 힘도 세고 생활력이 강하셨다. 그 당시에 여성의 몸으로 쌀가마를 져 나르실 정도였다고 한다.
부산에서 도난 방지기 제조 기술을 익힌 아버지는 서울 봉천동에서 도난 방지 회사를 차렸으나 얼마 못 가 망했다. 문과 문 사이에 설치한 센서를 통해 외부 침입자가 발생하면 요란한 경보음을 내는, 당시로서는 첨단 보안 사업이었지만 먹고살기도 급급한 1970년대 서울 변두리의 경제 사정에 비추어볼 때 시기상조였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사당동으로 이사하였고 아버지는 실패를 거듭하였다. 그 당시 사당동은 서울의 변두리 중 하나였다. 남성초등학교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판잣집들이 끝없이 늘어 서 있었다. 남성초등학교 앞 가게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서 어머니는 작은 식당을 하셨다. 아버지는 다시 사업을 도모하였다 실패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사업이었으며 그 이후 재기를 못 하고 실의에 빠져 폭음으로 삶을 탕진하신다. 가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6학년 때, 시인은 아버지와 남동생과 함께 사당동 달동네로, 어머니와 누나는 친척 집으로, 막냇동생은 전주의 조부모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새벽에 막노동을 나가느라 일찍 집을 비우셨는데 나가기 전 어린 자식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놓으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두 형제만 덩그러니 집에 있었다. 시인은 그 어린 나이에 연탄불에 냄비를 올려놓고 수제비를 떠서 동생과 먹었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틴 뒤 누나가 와서 살림을 도맡았다. 그 집은 전기는 들어왔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시인의 방과 후 첫 일과는 물지게를 지고 삼십여 분을 걸어내려가 물을 길어오는 일이었고 매일 거칠고 고달픈 변두리 산동네의 밑바닥 삶을 체험하였다. 그 당시 동네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않고 낮에는 동네를 서성거렸다. 어린 마음에 친구들과 놀고 싶었지만 성실하게 등교를 한다. 그렇게 육 개월쯤 지났을 무렵, 어머니가 구해온 돈으로 그곳을 벗어나 달동네 아래쪽 주택가에 두 칸짜리 전셋집을 얻어 들어간다. 하지만 잦은 이사로 살림은 간소해졌다. 이후 어머니는 낮에는 건강식품 외판원, 밤에는 재봉공장 미싱사 등을 하며 놀라울 정도로 집안을 일으켰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매 달 선정하는 판매왕을 놓쳐본 적이 없을 정도로 꽤 많은 수익을 거두셨다. 반면 아버지는 경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채 친구와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냈으며 집에서는 점점 폭군이 되었다. 어머니가 억척같이 모은 돈으로 집안 살림이 펴질 만하면 아버지는 돈을 엉뚱한 데 갖다 써서 살림은 공회전을 거듭했다. 동네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그 무렵부터 대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닌다. 처음 교회를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대단한 신도여서가 아니라 불교를 믿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토론을 한 적이 더러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식견이나 논리 면에서 매번 질 수밖에 없었던 터라 아버지가 알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던 성경 말씀의 논리로 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흑석동과 노량진의 경계인 산꼭대기에 있던 동양중학교에 입학한다. 이 무렵 아버지의 권유로 웅변을 배우면서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는 법을 배웠고 교내외 웅변대회에서 여러 번 입상하였다.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거듭된 실패 이후 한량으로 살며 술에 취하면 폭군이 되어버리는 그를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았다. 다행히 어머니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사당역 근처에 집을 마련하면서 살림은 안정되기 시작한다.
1982년, 서울 영동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경기고등학교를 가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청담동 이모 집으로 주소를 이전하였으나 신설 학교인 영동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같이 주소를 옮긴 동생은 이 년 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사당동의 동양중학교에서 영동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시인을 포함해서 단둘뿐이었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4월 5일 식목일 밤에 아버지가 타계하셨다. 무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였으나 아버지의 죽음은 사춘기에 큰 충격이 었다. 성격도 내성적으로 변하고 학교생활에 의욕을 잃고 많은 시간을 집에 머물렀다. 영동고등학교는 신설 학교였지만 재벌 그룹의 총수, 현직 부총리와 서울시장, 강남의 신흥 부자 등 이름만 대면 아는 고위층과 부유층의 자제들이 많았는데 아버지를 잃은 시인은 중학교나 동네의 친구 하나 없는 강남의 학교로 통학하면서 주눅이 들어 지냈다. 대단한 일탈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서 눈에 띄게 두각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성적도 고만고만했다.
그런 어둡고 외로운 고등학생 시절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사람은 국어 교사인 강성천 선생님이셨다. 강성천 선생님은 동국대학교를 나오고 『현대문학』에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온 문학 평론가이셨다. 수업 시간이면 문학 정전에 대한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독해를 해서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분을 흠모하고 존경하면서 문학을 공부하며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품었고 결국 국문학과에 지원하게 된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셔서는 대뜸 학생들에게 무작위로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물었고 짝이 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있다는 대답을 한 순간 선생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수업이 끝나가도록 선생님과 짝이 『광장』에 대한 담론을 주고받는 것을 본 시인의 질투심이 폭발한다. 하굣길에 당장 그 책을 사서 읽었다. 『광장』을 읽으면서 혼돈과 충격에 휩싸였다. 혼돈은 유신 교육 시절이어서 정치・사회사적 맥락에 대한 정보가 적은 탓에 밀실과 광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고, 충격은 주인공 이명준이 마지막에 제 3국으로의 송환을 택하고 나서 인도양 한가운데서 바다에 뛰어 들어 자살한 그 결단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이다. 단선적이고 표면적인 현상 너머의 세계와 인간의 불가해함에 대해 어렴풋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또한 예술가이면서 지식인이라는 문학인의 독특한 위상에 흥미를 느꼈다. 눈에 띄는 대로 시집과 소설책을 읽었고 김영랑과 윤동주 시집을 끼고 다녔다. 교회에서 문학의 밤, 성극 등의 연출을 도맡으면서 어렴풋이나마 글쓰기를 일생의 업으로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3학년 초, 지망하는 학과를 적어내라는 담임선생님의 지시에 1지망 문학, 2지망 사학, 3지망 철학을 적어냈다. 일명 문사철文史哲. 선생님이 불러서는 너 같은 애는 처음 봤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도 강남에 위치한 학교의 학생들은 대개 법학과나 경영학과, 행정학과를 1지망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전남 여수에서 아파트 건설 사업에 뛰어들어 살림을 일구셨다. 대형 건설사가 대단지 아파트를 짓는 것과 달리 작은 아파트 단지 한 동 정도를 맡아서 하는 시공사를 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대단한 돈이 되었던 것은 아니어서 살림은 팍팍했다. 어머니는 저녁을 해놓은 뒤 밤 기차를 타고 여수로 내려가서 다음 날 일을 보고 또 밤 기차로 서울에 돌아오는 생활을 오래 하셨다. 시인은 어머니를 억척스러운 생활력에 대한 존경심과 여성의 몸으로 험한 노동 현장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 하지만 자애롭지 못하고 거칠고 우악스러운 면에 대한 거부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바라봤다고 한다. 그 생활은 시인의 대학 시절까지 이어졌는데, 끊임없이 소송에 시달려야 하는 일이었기에 시인은 그 소장들에 대한 반론문을 쓰는 일이 잦았다.
1985년, 서울 영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에 입학한다. 소망하던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건대신문사의 학생 기자로 일하면서 학창 생활의 대부분을 신문사에 쏟았다. 학교 수업은 안 들어가도 학교신문은 매주 빠짐없이 나와야 했다. 열댓 명의 기자가 종이 신문 8면을 꼬박 채워야 했기 때문에 바빠서 수업에 못 들어간 것도 있다. 유일하게 신문이 안 나오는 시기가 시험 기간이었다. 그때가 되어야만 한숨 돌리고 놀 수 있었다. 신문 만드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중요한 수업은 열심히 들었고 시험에 빠진 적은 없었다.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다. 입학한 해에 총학생회가 부활했고 삼민투를 비롯한 학생운동이 본격화되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 규명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따라서 대학신문 기자 생활 역시 군부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신념과 의지를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렵 계급 모순을 극단적으로 그려내는 최서해의 소설을 읽으며 밤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집단적인 저항이 불가능한 착취의 상황에서 한 개인이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면 죽음을 불사하는 항거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지금 보면 다소 투박하고 천편일률적인 인물과 이야기 전개를 보이는 전형적인 프로 소설이기는 하지만 198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서 현실의 모순에 대한 대결 의지만으로도 그 소설들은 큰 울림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신문사 주간 교수가 조남현 선생님이다. 선생님을 주로 뵙는 것은 신문사에서였다. 선생님의 균형 있고 깊이 있는 글과 시선,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에 많은 것을 배우고 평생의 스승으로 삼을 것을 결심하였다. 한창 골몰했던 민중시에 객관적 거리를 두게 된 것도 조남현 선생님 덕분이었다. 민중문학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고 문학의 본령에 대한 균형 잡힌 시선을 갖게 해주신 것이다. 한번은 신문에 쓴 글을 보시고 조남현 선생님이 불러서 찾아갔더니 ‘이거 뭘 보고 쓴 것이냐’라고 물으셨다. ‘중앙지 신문을 보고 썼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대뜸 ‘너는 신문을 믿냐’고 반문하셨다. 지금의 신문은 객관적인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있고 외부의 강압적인 힘에 의해 왜곡이 일어난 것이며, 그것은 사실 관계뿐만 아니라 입장과 논조에도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수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탐독했던 영랑과 동주는 순정한 언어로 섬세한 감정의 파동을 시적으로 구현하는데 머물렀다면, 김수영은 투박하고 거친 언어로 현실의 첨단에 서는 시적 긴장을 내장하고 있었다. 김수영의 시를 읽으며 자유와 정의를 향한 ‘퓨리턴의 초상’과 부정한 시대를 비켜서서 응전하는 불온성과 소시민성에 매료되었다. 특히, 1학년 때 창간된 언론 민주화 운동을 위한 잡지 『말』의 창간호 표지에 실린 김정환 시인의 창간 축시를 읽고 민중 시에 적극 호응하였고 그처럼 살고 그처럼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시대에 지식인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호소를 담은 시였는데 그런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시로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온 시집 『황색예수전』을 열심히 읽었다. 같은 과 예비역 선배와 함께 문학동인 ‘시랑詩廊’ 활동을 하며 동인지 『시랑』 2, 3집에 참여하여 습작 민중시를 발표하였으나 다른 동인들과 문학관이 맞지 않는 데다 신문 만드는 일에 집중하느라 중단하였다.
군대에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시력이 너무 나빠 제2 국민역 판정을 받았다. 대학 시절 간간이 시를 써 대학신문 문학상에 응모했으나 번번이 떨어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4학년 때 평론 「김수영 연구: 참여문학 정신을 중심으로」를 건대신문 문화상에 응모하여 평론 부문에 입상한다. 수상 후 인사를 간 자리에서 심사를 맡았던 조남현 교수는 이런저런 격려를 하며 시 대신 평론 공부를 더 해보라는 덕담을 건넸고 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졸업을 앞두고 짧게 『크리스천 저널』이라는 잡지사에 몸을 담기도 했지만 1989년 대학 졸업 후 8월부터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편집국 교열부에서 근무하였다. 매일매일 국내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뉴스를 접하며 세상을 보는 눈을 떴고 비판적이면 서도 균형과 객관성을 갖춘 세계관을 형성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정확하고 바른 문장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였다. 삼 년 정도 연합 통신을 다닌 뒤, 1992년 9월 그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산 문화재단에 입사한다. 설립준비위원회부터 합류하게 되는데, 그 당시 재단의 설립 준비 책임을 맡은 류태영 교수가 대학신문 시절 주간 교수로 계셨던 분이어서 맺어진 인연이었다. 새마을운동 창시의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농과대학 교수였던 그가, 제자 가운데 문학을 전공했고 도전적이면서도 예의 바른 동향(전북 임실)의 시인을 눈여겨봤고 함께 일할 것을 권했다. 류 교수님의 한마디가 입사를 망설이던 그를 단번에 움직이게 했다. “자네, 원래 문청 아니었나?” 문학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문청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권유에 응하였다.
대산청소년문학상, 대산문학상, 서울국제문학포럼, 동아시아 문학포럼 등 지금까지 펼쳐진 대산문화재단 사업 대부분이 창단 초창기에 계획하고 실행한 일들이다. 재단을 출범하면서 그의 목표는 한국문학의 발전과 세계화였다. 이는 교보생명의 창립자이자 대산문화재단의 초대 이사장인 대산大山 신용호 선생과 2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대산 선생의 장남이자 서울대학교 의과대 교수였던 신창재 박사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 덕분에 가능한 것 이었다. 특히 대산 선생께서는 한국에서도 노벨상을 받는 작가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치시면서 한국문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집중할 것을 원하셨다. 그 당시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에서 점하고 있던 위치와 소수 언어 및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대산 선생께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더 해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 시인의 가슴에 깊이 박힌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문학의 장場 자체를 풍요롭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결국 사업의 초점은 한국문학의 기초 체력을 기르면서 미래 세대를 육성하는 일로 맞춰졌다. 본격적인 작가 양성을 위한 예비 작업의 성격을 띤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을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부터 기성 문인의 문학적 역량을 평가하고 알리는 대산문학상까지 생애주기를 바탕으로 한 단계적인 문학 육성 사업이 종적인 사업 축이라면,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횡단하는 국제문학포럼은 횡적인 사업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문학 속의 한국문학’이라는 세계문학의 종속적 위치에 있는 한국문학이 아니라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이라는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하고 국가와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횡단하는 작업은, 근래에 있었던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가 가능해진 중요한 기초 토대가 되었다. 1997년 IMF를 맞고 그것을 겨우 회복해나가던 시기에 세계적인 작가들을 대거 한자리에 불러 모은 서울국제문학포럼이 가능했던 것은 신창재 회장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는 젊었고 의욕이 있었고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 그는 그때를 청년기의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축복 같은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그 이후 2021년 5월까지 재단의 여러 사업에 실무와 총괄을 맡아서 일한다. 이는 2021년 한국문학번역원의 제8대 원장에 취임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는다. 장고 끝에 한국문학번역원장을 맡기로 함으로써 삼십 년간 몸담으며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운 대산문화재단을 사직한다.

대산문화재단에서 문학 기초 역량 육성 사업과 해외 문학 교류 사업에 매진하는 동시에 한국 문단의 주요 작가들과 협업하였다. 그러면서 제쳐두었던 습작을 시작해 신춘문예에 꾸준히 투고했지만 번번이 본심 진출 정도에 그친다. 한번은 친한 선배가 심사에 올라온 시인의 작품을 아쉽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올리기에는 작품의 힘이 약하니 여러 편을 묶어 잡지에 투고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더 좋은 작품을 써서 등단하겠다는 결심을 품고 계속 도전하지만 낙방한다. 그 와중에 1996년 《세계일보》 문학 담당 조용호 기자의 권유로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 3」을 발표한다. 단발적인 작품 발표에 그쳤던 것이 『시평』에 「수락산」 외 5편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집에 놀러 온 장대송 시인이 습작해놓은 시 원고 뭉치를 읽어 보겠다고 가져가서 『시평』의 주간 고형렬 시인에게 건넸고 이를 김정환 시인과 함께 심사하여 『시평』 2002년 1월에 발간한 봄호에 추천함으로써 본격적인 시 창작의 길을 시작한다. 2006년 첫 시집 『인디오 여인』을 민음사에서 출간한다. 시집을 낼 정도 분량의 원고가 쌓여 정리하던 중에 우연히 만난 최승호 시인이 평소 시를 눈여겨봤다며 시집 낼 원고가 있다면 살펴보겠다고 편집자 역할을 자처하였다. 최승호 시인은 첫 시집의 윤문, 목차, 제목 선정에 이르기까지 전반을 살핀 산파였다. 원고 뭉치에 적어놓은 애초의 시집 제목은 ‘서사시를 읽는 겨울’이었다. 이국적인 제목이 독자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이응(ㅇ)’이 네 개나 있어 활자의 시각적인 면과 발음 차원에서도 재미를 준다는 최승호 시인의 제안에 따라 ‘인디오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수정한다. 민음사 편집주간인 박상순 시인의 후의에 힘입어 민음사에서 출간하기로 결정되고 여기에 가장 존경하는 평론가 중 한 분인 유종호 선생의 해설을 수록하였다. 뒤늦은 출발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있기는 했지만 늦은 만큼 자신만의 진중하고 깊이 있는 시들을 써나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출간된 이 시집이 시인의 진정한 시적 출발로 자리매김한다.
그사이 대학원에 입학하여 시적 전회의 중요한 촉발점이 된 백석과 이용악을 본격적으로 깊이 연구한다. 특히, 그들의 북방 시 편은 암흑기의 우리 민족의 현실과 수난을 핍진하게 담아내는데 그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을 아로새긴다. 두 번째 시집 『지도에 없는 집』에서 백석과 이용악이 인유되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밟아 간 민족 유랑의 길을 몸소 체험하면서 획득되어 나온 것들이다. 북방 공간은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땅이자 망각된 땅이며 이제는 다른 국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민족의 혈맥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유랑과 수난이 겹치는 낯설고 험한 환경에서 역사와 전통을 지켜낸 살아냄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의 시들에 시원 회귀의 상상력과 현실 의식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시편들이 쌓이기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백석이 고향 마을의 풍속을 재현하면서 섬세한 이미지로 포착한 모더니즘과 이용악이 현 실 속으로 깊이 들어가 수난의 현실을 객관적 상관물로 상징적으로 포착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동시에 받아 안으려 한 것이다. 최원식 선생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을 자신의 시로 구현하려고 했다. 세 번째 시집 『슬픔의 뼈대』까지 이어지는 공간적이고 횡적인 펼침의 과정은 시간적이고 종적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과 동시에 진행된다. “원천적으로 곽효환의 시는, 이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비속하고 남루하며, 불모의 세상을 넘어선 어딘가에는 비속함과 남루함을 벗어난 신성하고 근원적인 세계가 있을 것이라 상상하는 데 자신만의 발생론을 두고 있다. 그만큼 곽효환의 시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의 부재, 실재로서 엄연히 존재했던 것들의 사라짐, 재현할 수 없는 신성하고도 아름다웠던 것들의 결여 형식에 대한 순간적 탈환에 매진해왔다.”*
*유성호, 「시원의 탐사와 사랑의 추구(김달진문학상 심사평)」, 『서정시학』 2019년 여름호, 16쪽.
이러한 횡적인 펼침과 종적인 거슬러 오름, 서정적 응축과 서사적 풀림이라는 두 축이 정확한 균형을 이루는 시집이 바로 네 번째 시집 『너는』이다. 민족의 뿌리와 시원을 찾아가면서 그 속에 깃든 신화와 역사를 추적하는 작업과 함께 가족사와 유년의 풍경이라는 ‘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정신의 편력이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시 세계와 시적 지향성을 이렇게 정리한다.
내가 시단에 들어온 2000년대 초중반은 시의 전성기가 지나고 시와 독자의 거리 또는 불화가 깊어지기 시작한 때였어요. 이 낡은 신인이 어떻게 쓸 것인가가 큰 고민이었죠. 시가 읽히지 않게 된 것은 백석이나 이용악의 시처럼 서정과 서사를 겸비한 시들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나의 시에 서사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은 그러한 진단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이용악의 「북쪽」이라는 단 여섯 행의 시에는 어마어마한 북방의 서사가 응축되어 있으며, 「낡은 집」은 식민지의 핍박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죠. 또 한편으로는 꾸준히 신문을 따라 읽었습니다. 사실을 기반으로 쓰이는 신문 기사에는 자신만의 입장과 논조가 반영될 수밖에 없기에 모든 기사가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시대적 동향을 따라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시사적 문제들을 시 속에 들여올 수 있었죠. 내 시의 지향성을 네 개로 정리하면 이럴 거예요. 북방 시편들, 보편적 가치와 진실에 대한 질문, 동시대적 현실, 그리고 서정. 북방 시편들은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고, 동시대의 문제와 현안 들을 시적으로 포착하는 작업들이 최근 시집인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에 포함되어 있어요. 이 시들은 메시지를 강하게 표출하는데 그 반대편에 연시戀詩의 성격을 띠는 서정시를 배치해놓았죠.
그는 다시 길 위에 서서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큰 물길의 지류가 퍼져나가는 것은, 큰 둥치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불규칙하게 퍼져나가는 것은 멀리서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그 먼 풍경들을 가까운 풍경으로 끌고 오는 것이 이후의 시적 작업이 될 것이다. 물길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가지들이 새로 허공을 더듬 듯이 매 순간 자신이 서 있는 현실과 만나는 일일 것이다. 그 변화와 굴곡을 기다리며 그는 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기초 예술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 정책과 제도 정비를 통한 문학 생태계의 복원과 순환을 위한 사업을 맡을 기회가 있다면 기꺼이 또 그 현장의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임실군 오수면 주천리에 있는 귀로재로 향했다. 전주역에서 한 시간 정도 순천완주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오수IC에서 빠져나와 둔남천을 건너면 주천리가 나온다. 꽤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한가운데로 흐르는 개천 양옆으로 평탄하게 집들이 자리하고 있어 안온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었다. 조부님이 들어와서 살던 본가는 이미 폐가가 된 지 오래였다. 그 본가와 개천을 두고 마주한 곳에 귀로재가 있다.
주천리는 현풍 곽씨 집성촌인데 시인은 곡성공파이다. 본래는 띠집이어서 매해 지붕을 새로 이어야 했고 비좁은 데다가 세월의 풍상으로 물이 새기도 해 종친들이 뜻을 모아 옛 틀을 증축 하였다. 귀로재는 증조할아버지와 그분의 형님께서 가산을 일정 정도 보태어 중건한 것이다. 귀로재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세조가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봉위하였는데, 단종 때 도승지를 역임한 곽도(노재공)가 선조이다. 주천리의 뒷산 이름이 노산魯山이었는데 폐위된 왕 노산군魯山君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열다섯 가문의 선비들이 무작정 내려와 산기슭 한편을 거처로 삼았다. 곡성공은 노재공(득형)의 4남으로 곡성 현감을 지냈으며 연산군의 폐정 때문에 조정이 혼란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선친의 유지가 깃든 주천리에 정착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곡성공 역시 은거의 삶을 살다 노산에 안장되었는데 그를 기려 무덤 아래의 묘재를 귀로재歸魯齋로 이름하였다. 이와 같은 귀로재의 내력은 최근 보수와 복원 작업을 마무리한 뒤 재각 대청에 걸어놓 은 「귀로재 중수기重修記」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 중수기를 시인이 썼다.

본가를 뒤로하고.

귀로재에서.
시인은 갈수록 퇴락해가는 본가를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집 안 마당에는 잡초와 넝쿨이 우거져 있고 흙벽은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개천을 건너 종친이신 마을 이장 댁을 통해 귀로재에 들었다. 양쪽으로 뻗은 기와는 날아가는 새처럼 경쾌하고 웅장한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편액은 효산 이광열이 썼으며, 건물 안에는 세 개의 현판과 여섯 개의 주련이 있다. 귀로재를 나와 시인은 선영을 둘러보기 위해 노산으로 걸어올라갔다. 그를 기다리며 충심과 절의를 지켜 소신을 다한 혈맥에 대한 살뜰한 애정이 담겨 있는 그의 시를 떠올렸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거친 밥상을 들인 누추한 집에서
시대와 불화하며 끝끝내 은둔의 삶을 택한
그래서 심상하고 초라한 산을 닮은
둔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
내 몸 어디에도 그 노둔한 피가 흘러
나 역시 보잘것없고 무던하지만
어느 대목과 마주 서면 앙버티며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 「노둔한 사람들」 부분
곽효환
1996년 《세계일보》, 2002년 『시평』으로 데뷔.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너는』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외 다수가 있고, 저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외 다수가 있다. 그 밖에 편저 『이용악 시선』 『구보 박태원의 시와 시론』 『아버지, 그리운 당신』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백석 시 그림집』 『이용악 전집』(공편), 『청록집— 청록집 발간 70주년 기념 시 그림집』 『별 헤는 밤—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 그림집』 등을 냈다. 고대신예작가상, 애지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김달진 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 수상.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심장보다 높이』를 냈다. 신동엽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유심상 등 수상. 명지전문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슬픔의 뼈대를 지나 사랑의 길로
곽효환
나와 너는 무엇이 혹은 어디가 먼저 성립되어야 하는 개념인지 모른다. 너는 나와 다름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나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시공간을 포함한 인식과 감성의 차원에 서 먼 곳에 있는 순간 너는 언제든 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인칭을 이인칭으로 끌어들이는 인력 또는 장력은 분명 나에게 있다. ‘나’와 ‘너’가 하나의 장場 속에 있어야만 이인칭은 가능하다. 그 다가감과 물러섬, 수렴과 확산의 거리가 ‘우리’라는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힌다. 나는 너를 만나 나라는 존재의 결여를 존재론적 유일성으로 만들고 너 또한 나라는 존재에 의해 개별화된다. 개별적 두 존재가 되어야만 소통과 회통이 가능해진다. 동일성의 포섭과 배제의 장 안에서는 너도, 우리도 존재할 수 없다. 주체의 시선은 대상을 향할 때도 언제나 자기의 빈자리를 내보이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는데, 주체의 판단을 유보하는 자리에 타자가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시선 속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의 이질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체를 고정된 자리가 아니라 유동적인 흐름 속에 내맡기는 태도에서만 가능하다. 곽효환의 시는 우리 안의 타자를, 내 안의 타자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폭설을 동반한 첫눈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걱정을 했는데 전주는 상대적으로 포근하고 화창했다. 전주역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역사 개축 공사로 주위가 복잡했다. 힘겹게 역 앞 도로에서 곽효환 시인을 만나 사진작가와 나는 바로 송천동으로 향했다. 오늘 둘러볼 곳이 많아서 마음이 조급했다. 송천동은 시인이 유년 시절을 처음 보낸 곳이다.
시인은 1967년 음력 8월 8일 전주시 전동에서 아버지 곽상훈과 어머니 이정원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잠업검사소 소장으로 재직하던 조부의 관사였다. 지금의 위치로는 성심여자고등학교 근처라고 한다. 외아들로 누이동생만 셋을 둔 아버지가 결혼해 첫딸을 낳은 다음 본 장손이 었기에 조부모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조부가 은퇴한 후 전주시 외곽인 송천동에 커다란 텃밭이 딸린 널따란 대지 위에 큰 개량 한옥을 짓고 살았다. 그 당시 도심이 전주역 주변과 경 기전 근처였으니 전주의 북서쪽 외곽이었으며 만경강 너머 익산이 가까웠던 송천동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전주천을 따라 아파트가 즐비한 주거단지가 되었다.
개량 한옥은 파란 대문이 있는 마당 넓은 집이었다. 은퇴한 조부는 마작판과 작은댁으로, 아버지는 다른 지방 도시로 떠돌아 집은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과년한 고모들이 지키는 ‘여인들의 집’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송천동 시절을 유년의 가장 풍요로웠던 때로 기억한다. 그 당시만 해도 비포장도로였던 신작로에서 접어드는 골목 어귀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었고 가게들이 띄엄띄엄 있었다. 술도가도 있었는데 종종 손님이 오시면 술 심부름을 다녀오기도 했다. 손님들은 이 파란 대문 집으로 오기 전에 푸줏간에 들러 고기를 한두 근 끊어서 손에 들고 왔다. 열 명 남짓 되는 대식구여서 살림을 여유롭게 꾸리기는 힘든 시절이라 어린 시인은 밥상에 고깃국이 오른 날 우연히 자기 국그릇에 담겨온 고기가 붙은 뼛조각 한 점을 너무나 맛있게 정신없이 빨아 먹었다. 국물이 다 빠진 뼛조각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손자를 안타깝게 본 할아버지는 며느리를 탓하셨다. 집 뒤편 과수원을 지나 조금 걸어가면 언덕 정도 되는 조그만 산이 있었는데, 고모는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어린 조카와 함께 짧은 소풍을 다녀오기도 했다.
시인에 따르면, 전주 사람의 표준이나 모범으로 인식될 만한 문단 어른으로 최일남 소설가와 송하춘 소설가를 꼽는다. 생전에 뵌 최일남 소설가는 속이 깊고 얌전하며, 소박하시면서 점잖은 자세를 잃지 않았다. 밖으로 대놓고 자신의 의사 표시를 하지는 않으 면서도 우회적으로 심지를 굽히지 않는다. 언뜻 충청도 기질과 맞닿는 면이 있다. 전주에서는 ‘보배움이 있다’라는 말을 쓰는데, 여기서 ‘보배움’은 보고 배움의 준말로 어른들의 태도와 행실을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면서 예의범절을 몸에 익힌 것을 말한다.
우리는 먼저 송천초등학교에 들러 학교 주변을 둘러본 뒤, 옛 파란 대문 집을 찾으러 갔다. 송천동을 찾아온 지는 전주를 떠나고서 거의 처음이라 시인에게도 생소했다. 기억 속에 있는 신작로와 등굣길 그리고 집 뒤편에 있던 산을 더듬어 찾아간 곳은 지금의 도립여성중고등학교 주변이었다. 집터는 흔적도 없고 집이 있던 자리에는 창고로 쓰이는 건물이 서 있었다. 골목을 조금 들어가 전주책마루어린이작은도서관 앞의 삼거리에 이르자 유년 때 뛰어놀던 곳과 이웃집들을 기억해냈다.
송천동 집터에서.
송천동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덕진공원이 있는데 그 당시 전주의 관청이나 민간 행사는 대부분 여기서 열렸다. 원불교가 발원한 익산이 가까워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송천동 사람들 중에는 원불교 신자가 더러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도 불교와 원불교를 오가면서 종교 생활을 하셨는데, 하루는 덕진공원에서 원불교 집회가 크게 있어 어린 시인을 데리고 다녀오기도 했다.
송천동에 살기 전 잠깐 바닷가가 보이는 포항에서 살기도 했다. 포항 아이들이 가장 큰 물고기가 고래라고 했는데, 시인이 본 가장 큰 물고기는 메기였다. 시인이 직접 실물로 본 메기가 그 실제 크기를 짐작하기도 힘들고 보기도 어려운 고래보다 더 크다는 논리를 펴서 아이들과의 말싸움에서 이기기도 했다. 내륙에서 자란 그는 고래를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구 남매의 장손이었다. 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은 경찰이었는데 한국전쟁 때 돌아가셨고 셋째 동생은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셨다. 그분은 전쟁 후 신분을 숨기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셨으며 전쟁 후 고향인 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웃의 눈을 피해 부안에서 지내다가 조용히 삶을 마감하셨다. 제삿날이면 집안 사람들이 파란 대문 집에 모여 크게 제사를 지냈는데, 부안 작은할아버지가 손수 해산물을 들고 오셨다.
할아버지는 전라북도 잠업검사소 소장이었는데 전라북도의 잠업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외가는 오수와 인접한 장수군 산서면 대창마을에 있었다. 외가는 농사를 크게 지었는데 도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전주 말로 ‘도 부자’라고 한다)이었다. 어머니는 그 집안의 딸이었다. 재력 있는 집안과 직책이 높은 공무원의 결합이었다. 그 당시 잠업이 크게 번성할 때여서 오가는 돈이 워낙 컸기 때문에 산더미 같은 지폐를 지게로 지고 다녔다고도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퇴직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1917년생, 아버지는 1938년생. 시인의 누나가 1965년생, 시인이 1967년생. 시인이 태어날 무렵에 할아버지는 쉰을 넘기셨던 것이다. 그 당시 공무원의 퇴직 나이가 쉰 살인 것은 크게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주 시내 쪽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고 동서학동으로 이동했다. 전주를 떠나기 전까지 살던 곳이 동서학동이었다. 송천 초등학교 2학년 때 조부의 개량 한옥이 빚으로 넘어간다. 할아버지가 노름빚을 크게 진 것이 원인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임실로 들어가시고 어머니는 삼 남매를 데리고 동서학동의 전북 대학교 소 교수 집에 딸린 별채를 얻어 분가를 한다. 그곳에서 막냇동생 효성이 태어난다. 단층의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마을이었는데 오른쪽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전주교대가 있었고 남쪽에는 전학 온 전주남초등학교가 있었으며 그 반대편 전주천을 건너서 조금만 걸으면 경기전과 전동성당, 풍남문이 있었다. 이 모든 곳이 어린 시인이 친구들과 놀던 놀이터였다. 일 년여를 그 곳에서 살다가 인근 세탁소가 있는 집으로 이사하였다. 시인은 전주천에서 놀던 기억을 시로 풀어내기도 했다.
“내 유년은 전주천 공수내 다리 아래로 흘러갔다/ 작은 아이들이 다람쥐처럼 넘나들던 녹음 속에 똬리를 튼 교육대학 붉은 벽돌 건물과 담 구멍, 세탁소 골목길 그 막다른 집, 이차선 좁은 도로 건너 전파사, 한 집 건너 작은 슈퍼 그리고 과일가게 옆 오래된 기름가게”
(「고무신 배를 띄우다」, 『지도에 없는 집』).
소 교수 집 대문과 골목의 모습.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던, 세탁소를 하던 친구 집에 가서 만화영화 <서부소년 차돌이>를 보았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미국 서부를 개척하는 정의로운 소년에 매료되었고 밤 아홉 시경이면 잠자리에 누워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며 상상력의 나래를 폈다. 학급 반장을 맡았는데 전주의 학교별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운영하는 ‘고전읽기반’에 뽑혀 초등학생이 소화하기 어려운 여러 고전을 읽고 감상문을 쓰고 토론하는 훈련을 했다. 그때만 해도 전기가 자주 나가 어두운 방에서 촛불을 켜고 책을 읽었는데 그 때문인지 시력이 많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촛불을 켜고 공부하는 어린 시인을 대견해하셨다.
전주천에서
또 하나 강렬한 기억은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막냇동생 해산을 앞뒀을 무렵 보름 남짓을 누나와 함께 다시 송천동에서 통학해야 했던 것이다. 버스를 내려서 전주남초등학교로 가는 골목을 학생들의 무리에 섞여 걸어가고 있으면 어머니가 골목에 나와 앉아 계셨다. 남산만 한 배를 하고 쪼그려 앉아서 등교하며 지나가는 누나와 시인을 보고 돌아가시고는 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나와 있지 않아 의아했었는데 어른들로부터 동생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서학동의 소 교수 주택은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주신 「국민교육헌장」 암기 과제를 학급에서 제일 빨리 통과해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서둘러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조바심과 안타까운 기다림 속에 해는 기울어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기다리던 어린 시인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잠들었다
시인과 전주교대를 나와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예전에 살던 골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전주남초등학교로 가는 등굣길은 이제 서학동예술마을로 조성되어 카페와 공방이 가득한 운치 있는 골목이 되었다. 옛 양옥집이 약간의 손질을 더해져 아담하고 운치 있는 상점들로 바뀐 것을 시인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몇몇 골목들을 들락날락하다가 소 교수 집으로 특정할 수 있는 집을 찾았을 때 시인은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예전에는 안채와 별채가 있는 마당 넓은 집이었는데 지금은 담으로 그 당시 안채와 별채를 가른 독립된 집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 무렵 서울로 이사하여 서울 남성초등학교로 전학한다. 이사는 갑작스러웠다. 아버지는 먼저 서울에 올라가 계셨고 어머니와 자식들은 뒤따라 올라간다. 전주역에서 어머니가 사주신 요구르트가 너무 맛있어서 찔끔찔끔 아껴 마시다가 그만 쏟고 말았는데, 어머니는 크게 혼을 내고는 다시 사주지 않으셨다. 시인이 느끼기엔 처음 먹어본 천상의 맛이어서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입맛을 다셨다. 부산 등지를 떠돌다 돌아온 아버지를 따라 정착한 곳은 서울의 봉천동이었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실패한 지식인이었다. 전주 지역의 엘리트 코스인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를 거쳐 전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셨다. 그 당시에 아버지가 읽으셨던 백철의 『신문학사조사』 같은 문학 교과서들이 아직 남아 있다. 아버지는 키는 작지만 다부진 몸과 각진 얼굴을 가진 강단 있는 분이셨다. 젊었을 때는 운동과 친구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성품을 가진 청년으로 군인이 되거나 농촌 개간운동에 투신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군인이 되지 못한 것은 밑으로 여동생만 있는 장남이기도 했고 현대사의 아픈 질곡으로 비명횡사하거나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던 동생들을 둔 할아버지의 뜻이 완강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신혼 시절 임실군 청웅면 중산리에 3만 평의 땅을 사서 개간 사업을 하면서 일종의 농촌 부흥 운동에 힘쓰셨는데 워낙 오지이기도 했고 사업도 뜻대로 되지 않아 몇 해 버티지 못하고 다시 전주로 돌아온다. 아버지가 그 이후에도 여러 사업을 전전하셨던 것은 군 경력이 없어 취업에 제약이 많았던 군부 독재 시절의 탓도 컸다. 어머니는 키가 크고 힘도 세고 생활력이 강하셨다. 그 당시에 여성의 몸으로 쌀가마를 져 나르실 정도였다고 한다.
부산에서 도난 방지기 제조 기술을 익힌 아버지는 서울 봉천동에서 도난 방지 회사를 차렸으나 얼마 못 가 망했다. 문과 문 사이에 설치한 센서를 통해 외부 침입자가 발생하면 요란한 경보음을 내는, 당시로서는 첨단 보안 사업이었지만 먹고살기도 급급한 1970년대 서울 변두리의 경제 사정에 비추어볼 때 시기상조였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사당동으로 이사하였고 아버지는 실패를 거듭하였다. 그 당시 사당동은 서울의 변두리 중 하나였다. 남성초등학교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판잣집들이 끝없이 늘어 서 있었다. 남성초등학교 앞 가게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서 어머니는 작은 식당을 하셨다. 아버지는 다시 사업을 도모하였다 실패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사업이었으며 그 이후 재기를 못 하고 실의에 빠져 폭음으로 삶을 탕진하신다. 가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6학년 때, 시인은 아버지와 남동생과 함께 사당동 달동네로, 어머니와 누나는 친척 집으로, 막냇동생은 전주의 조부모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새벽에 막노동을 나가느라 일찍 집을 비우셨는데 나가기 전 어린 자식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놓으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두 형제만 덩그러니 집에 있었다. 시인은 그 어린 나이에 연탄불에 냄비를 올려놓고 수제비를 떠서 동생과 먹었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틴 뒤 누나가 와서 살림을 도맡았다. 그 집은 전기는 들어왔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시인의 방과 후 첫 일과는 물지게를 지고 삼십여 분을 걸어내려가 물을 길어오는 일이었고 매일 거칠고 고달픈 변두리 산동네의 밑바닥 삶을 체험하였다. 그 당시 동네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않고 낮에는 동네를 서성거렸다. 어린 마음에 친구들과 놀고 싶었지만 성실하게 등교를 한다. 그렇게 육 개월쯤 지났을 무렵, 어머니가 구해온 돈으로 그곳을 벗어나 달동네 아래쪽 주택가에 두 칸짜리 전셋집을 얻어 들어간다. 하지만 잦은 이사로 살림은 간소해졌다. 이후 어머니는 낮에는 건강식품 외판원, 밤에는 재봉공장 미싱사 등을 하며 놀라울 정도로 집안을 일으켰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매 달 선정하는 판매왕을 놓쳐본 적이 없을 정도로 꽤 많은 수익을 거두셨다. 반면 아버지는 경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채 친구와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냈으며 집에서는 점점 폭군이 되었다. 어머니가 억척같이 모은 돈으로 집안 살림이 펴질 만하면 아버지는 돈을 엉뚱한 데 갖다 써서 살림은 공회전을 거듭했다. 동네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그 무렵부터 대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닌다. 처음 교회를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대단한 신도여서가 아니라 불교를 믿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토론을 한 적이 더러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식견이나 논리 면에서 매번 질 수밖에 없었던 터라 아버지가 알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던 성경 말씀의 논리로 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흑석동과 노량진의 경계인 산꼭대기에 있던 동양중학교에 입학한다. 이 무렵 아버지의 권유로 웅변을 배우면서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는 법을 배웠고 교내외 웅변대회에서 여러 번 입상하였다.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거듭된 실패 이후 한량으로 살며 술에 취하면 폭군이 되어버리는 그를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았다. 다행히 어머니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사당역 근처에 집을 마련하면서 살림은 안정되기 시작한다.
1982년, 서울 영동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경기고등학교를 가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청담동 이모 집으로 주소를 이전하였으나 신설 학교인 영동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같이 주소를 옮긴 동생은 이 년 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사당동의 동양중학교에서 영동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시인을 포함해서 단둘뿐이었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4월 5일 식목일 밤에 아버지가 타계하셨다. 무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였으나 아버지의 죽음은 사춘기에 큰 충격이 었다. 성격도 내성적으로 변하고 학교생활에 의욕을 잃고 많은 시간을 집에 머물렀다. 영동고등학교는 신설 학교였지만 재벌 그룹의 총수, 현직 부총리와 서울시장, 강남의 신흥 부자 등 이름만 대면 아는 고위층과 부유층의 자제들이 많았는데 아버지를 잃은 시인은 중학교나 동네의 친구 하나 없는 강남의 학교로 통학하면서 주눅이 들어 지냈다. 대단한 일탈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서 눈에 띄게 두각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성적도 고만고만했다.
그런 어둡고 외로운 고등학생 시절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사람은 국어 교사인 강성천 선생님이셨다. 강성천 선생님은 동국대학교를 나오고 『현대문학』에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온 문학 평론가이셨다. 수업 시간이면 문학 정전에 대한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독해를 해서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분을 흠모하고 존경하면서 문학을 공부하며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품었고 결국 국문학과에 지원하게 된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셔서는 대뜸 학생들에게 무작위로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물었고 짝이 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있다는 대답을 한 순간 선생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수업이 끝나가도록 선생님과 짝이 『광장』에 대한 담론을 주고받는 것을 본 시인의 질투심이 폭발한다. 하굣길에 당장 그 책을 사서 읽었다. 『광장』을 읽으면서 혼돈과 충격에 휩싸였다. 혼돈은 유신 교육 시절이어서 정치・사회사적 맥락에 대한 정보가 적은 탓에 밀실과 광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고, 충격은 주인공 이명준이 마지막에 제 3국으로의 송환을 택하고 나서 인도양 한가운데서 바다에 뛰어 들어 자살한 그 결단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이다. 단선적이고 표면적인 현상 너머의 세계와 인간의 불가해함에 대해 어렴풋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또한 예술가이면서 지식인이라는 문학인의 독특한 위상에 흥미를 느꼈다. 눈에 띄는 대로 시집과 소설책을 읽었고 김영랑과 윤동주 시집을 끼고 다녔다. 교회에서 문학의 밤, 성극 등의 연출을 도맡으면서 어렴풋이나마 글쓰기를 일생의 업으로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3학년 초, 지망하는 학과를 적어내라는 담임선생님의 지시에 1지망 문학, 2지망 사학, 3지망 철학을 적어냈다. 일명 문사철文史哲. 선생님이 불러서는 너 같은 애는 처음 봤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도 강남에 위치한 학교의 학생들은 대개 법학과나 경영학과, 행정학과를 1지망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전남 여수에서 아파트 건설 사업에 뛰어들어 살림을 일구셨다. 대형 건설사가 대단지 아파트를 짓는 것과 달리 작은 아파트 단지 한 동 정도를 맡아서 하는 시공사를 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대단한 돈이 되었던 것은 아니어서 살림은 팍팍했다. 어머니는 저녁을 해놓은 뒤 밤 기차를 타고 여수로 내려가서 다음 날 일을 보고 또 밤 기차로 서울에 돌아오는 생활을 오래 하셨다. 시인은 어머니를 억척스러운 생활력에 대한 존경심과 여성의 몸으로 험한 노동 현장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 하지만 자애롭지 못하고 거칠고 우악스러운 면에 대한 거부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바라봤다고 한다. 그 생활은 시인의 대학 시절까지 이어졌는데, 끊임없이 소송에 시달려야 하는 일이었기에 시인은 그 소장들에 대한 반론문을 쓰는 일이 잦았다.
1985년, 서울 영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에 입학한다. 소망하던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건대신문사의 학생 기자로 일하면서 학창 생활의 대부분을 신문사에 쏟았다. 학교 수업은 안 들어가도 학교신문은 매주 빠짐없이 나와야 했다. 열댓 명의 기자가 종이 신문 8면을 꼬박 채워야 했기 때문에 바빠서 수업에 못 들어간 것도 있다. 유일하게 신문이 안 나오는 시기가 시험 기간이었다. 그때가 되어야만 한숨 돌리고 놀 수 있었다. 신문 만드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중요한 수업은 열심히 들었고 시험에 빠진 적은 없었다.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다. 입학한 해에 총학생회가 부활했고 삼민투를 비롯한 학생운동이 본격화되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 규명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따라서 대학신문 기자 생활 역시 군부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신념과 의지를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렵 계급 모순을 극단적으로 그려내는 최서해의 소설을 읽으며 밤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집단적인 저항이 불가능한 착취의 상황에서 한 개인이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면 죽음을 불사하는 항거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지금 보면 다소 투박하고 천편일률적인 인물과 이야기 전개를 보이는 전형적인 프로 소설이기는 하지만 198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서 현실의 모순에 대한 대결 의지만으로도 그 소설들은 큰 울림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신문사 주간 교수가 조남현 선생님이다. 선생님을 주로 뵙는 것은 신문사에서였다. 선생님의 균형 있고 깊이 있는 글과 시선,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에 많은 것을 배우고 평생의 스승으로 삼을 것을 결심하였다. 한창 골몰했던 민중시에 객관적 거리를 두게 된 것도 조남현 선생님 덕분이었다. 민중문학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고 문학의 본령에 대한 균형 잡힌 시선을 갖게 해주신 것이다. 한번은 신문에 쓴 글을 보시고 조남현 선생님이 불러서 찾아갔더니 ‘이거 뭘 보고 쓴 것이냐’라고 물으셨다. ‘중앙지 신문을 보고 썼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대뜸 ‘너는 신문을 믿냐’고 반문하셨다. 지금의 신문은 객관적인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있고 외부의 강압적인 힘에 의해 왜곡이 일어난 것이며, 그것은 사실 관계뿐만 아니라 입장과 논조에도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수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탐독했던 영랑과 동주는 순정한 언어로 섬세한 감정의 파동을 시적으로 구현하는데 머물렀다면, 김수영은 투박하고 거친 언어로 현실의 첨단에 서는 시적 긴장을 내장하고 있었다. 김수영의 시를 읽으며 자유와 정의를 향한 ‘퓨리턴의 초상’과 부정한 시대를 비켜서서 응전하는 불온성과 소시민성에 매료되었다. 특히, 1학년 때 창간된 언론 민주화 운동을 위한 잡지 『말』의 창간호 표지에 실린 김정환 시인의 창간 축시를 읽고 민중 시에 적극 호응하였고 그처럼 살고 그처럼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시대에 지식인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호소를 담은 시였는데 그런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시로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온 시집 『황색예수전』을 열심히 읽었다. 같은 과 예비역 선배와 함께 문학동인 ‘시랑詩廊’ 활동을 하며 동인지 『시랑』 2, 3집에 참여하여 습작 민중시를 발표하였으나 다른 동인들과 문학관이 맞지 않는 데다 신문 만드는 일에 집중하느라 중단하였다.
군대에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시력이 너무 나빠 제2 국민역 판정을 받았다. 대학 시절 간간이 시를 써 대학신문 문학상에 응모했으나 번번이 떨어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4학년 때 평론 「김수영 연구: 참여문학 정신을 중심으로」를 건대신문 문화상에 응모하여 평론 부문에 입상한다. 수상 후 인사를 간 자리에서 심사를 맡았던 조남현 교수는 이런저런 격려를 하며 시 대신 평론 공부를 더 해보라는 덕담을 건넸고 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졸업을 앞두고 짧게 『크리스천 저널』이라는 잡지사에 몸을 담기도 했지만 1989년 대학 졸업 후 8월부터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편집국 교열부에서 근무하였다. 매일매일 국내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뉴스를 접하며 세상을 보는 눈을 떴고 비판적이면 서도 균형과 객관성을 갖춘 세계관을 형성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정확하고 바른 문장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였다. 삼 년 정도 연합 통신을 다닌 뒤, 1992년 9월 그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산 문화재단에 입사한다. 설립준비위원회부터 합류하게 되는데, 그 당시 재단의 설립 준비 책임을 맡은 류태영 교수가 대학신문 시절 주간 교수로 계셨던 분이어서 맺어진 인연이었다. 새마을운동 창시의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농과대학 교수였던 그가, 제자 가운데 문학을 전공했고 도전적이면서도 예의 바른 동향(전북 임실)의 시인을 눈여겨봤고 함께 일할 것을 권했다. 류 교수님의 한마디가 입사를 망설이던 그를 단번에 움직이게 했다. “자네, 원래 문청 아니었나?” 문학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문청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권유에 응하였다.
대산청소년문학상, 대산문학상, 서울국제문학포럼, 동아시아 문학포럼 등 지금까지 펼쳐진 대산문화재단 사업 대부분이 창단 초창기에 계획하고 실행한 일들이다. 재단을 출범하면서 그의 목표는 한국문학의 발전과 세계화였다. 이는 교보생명의 창립자이자 대산문화재단의 초대 이사장인 대산大山 신용호 선생과 2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대산 선생의 장남이자 서울대학교 의과대 교수였던 신창재 박사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 덕분에 가능한 것 이었다. 특히 대산 선생께서는 한국에서도 노벨상을 받는 작가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치시면서 한국문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집중할 것을 원하셨다. 그 당시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에서 점하고 있던 위치와 소수 언어 및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대산 선생께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더 해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 시인의 가슴에 깊이 박힌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문학의 장場 자체를 풍요롭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결국 사업의 초점은 한국문학의 기초 체력을 기르면서 미래 세대를 육성하는 일로 맞춰졌다. 본격적인 작가 양성을 위한 예비 작업의 성격을 띤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을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부터 기성 문인의 문학적 역량을 평가하고 알리는 대산문학상까지 생애주기를 바탕으로 한 단계적인 문학 육성 사업이 종적인 사업 축이라면,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횡단하는 국제문학포럼은 횡적인 사업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문학 속의 한국문학’이라는 세계문학의 종속적 위치에 있는 한국문학이 아니라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이라는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하고 국가와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횡단하는 작업은, 근래에 있었던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가 가능해진 중요한 기초 토대가 되었다. 1997년 IMF를 맞고 그것을 겨우 회복해나가던 시기에 세계적인 작가들을 대거 한자리에 불러 모은 서울국제문학포럼이 가능했던 것은 신창재 회장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는 젊었고 의욕이 있었고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 그는 그때를 청년기의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축복 같은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그 이후 2021년 5월까지 재단의 여러 사업에 실무와 총괄을 맡아서 일한다. 이는 2021년 한국문학번역원의 제8대 원장에 취임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는다. 장고 끝에 한국문학번역원장을 맡기로 함으로써 삼십 년간 몸담으며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운 대산문화재단을 사직한다.
대산문화재단에서 문학 기초 역량 육성 사업과 해외 문학 교류 사업에 매진하는 동시에 한국 문단의 주요 작가들과 협업하였다. 그러면서 제쳐두었던 습작을 시작해 신춘문예에 꾸준히 투고했지만 번번이 본심 진출 정도에 그친다. 한번은 친한 선배가 심사에 올라온 시인의 작품을 아쉽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올리기에는 작품의 힘이 약하니 여러 편을 묶어 잡지에 투고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더 좋은 작품을 써서 등단하겠다는 결심을 품고 계속 도전하지만 낙방한다. 그 와중에 1996년 《세계일보》 문학 담당 조용호 기자의 권유로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 3」을 발표한다. 단발적인 작품 발표에 그쳤던 것이 『시평』에 「수락산」 외 5편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집에 놀러 온 장대송 시인이 습작해놓은 시 원고 뭉치를 읽어 보겠다고 가져가서 『시평』의 주간 고형렬 시인에게 건넸고 이를 김정환 시인과 함께 심사하여 『시평』 2002년 1월에 발간한 봄호에 추천함으로써 본격적인 시 창작의 길을 시작한다. 2006년 첫 시집 『인디오 여인』을 민음사에서 출간한다. 시집을 낼 정도 분량의 원고가 쌓여 정리하던 중에 우연히 만난 최승호 시인이 평소 시를 눈여겨봤다며 시집 낼 원고가 있다면 살펴보겠다고 편집자 역할을 자처하였다. 최승호 시인은 첫 시집의 윤문, 목차, 제목 선정에 이르기까지 전반을 살핀 산파였다. 원고 뭉치에 적어놓은 애초의 시집 제목은 ‘서사시를 읽는 겨울’이었다. 이국적인 제목이 독자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이응(ㅇ)’이 네 개나 있어 활자의 시각적인 면과 발음 차원에서도 재미를 준다는 최승호 시인의 제안에 따라 ‘인디오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수정한다. 민음사 편집주간인 박상순 시인의 후의에 힘입어 민음사에서 출간하기로 결정되고 여기에 가장 존경하는 평론가 중 한 분인 유종호 선생의 해설을 수록하였다. 뒤늦은 출발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있기는 했지만 늦은 만큼 자신만의 진중하고 깊이 있는 시들을 써나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출간된 이 시집이 시인의 진정한 시적 출발로 자리매김한다.
그사이 대학원에 입학하여 시적 전회의 중요한 촉발점이 된 백석과 이용악을 본격적으로 깊이 연구한다. 특히, 그들의 북방 시 편은 암흑기의 우리 민족의 현실과 수난을 핍진하게 담아내는데 그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을 아로새긴다. 두 번째 시집 『지도에 없는 집』에서 백석과 이용악이 인유되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밟아 간 민족 유랑의 길을 몸소 체험하면서 획득되어 나온 것들이다. 북방 공간은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땅이자 망각된 땅이며 이제는 다른 국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민족의 혈맥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유랑과 수난이 겹치는 낯설고 험한 환경에서 역사와 전통을 지켜낸 살아냄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의 시들에 시원 회귀의 상상력과 현실 의식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시편들이 쌓이기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백석이 고향 마을의 풍속을 재현하면서 섬세한 이미지로 포착한 모더니즘과 이용악이 현 실 속으로 깊이 들어가 수난의 현실을 객관적 상관물로 상징적으로 포착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동시에 받아 안으려 한 것이다. 최원식 선생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을 자신의 시로 구현하려고 했다. 세 번째 시집 『슬픔의 뼈대』까지 이어지는 공간적이고 횡적인 펼침의 과정은 시간적이고 종적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과 동시에 진행된다. “원천적으로 곽효환의 시는, 이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비속하고 남루하며, 불모의 세상을 넘어선 어딘가에는 비속함과 남루함을 벗어난 신성하고 근원적인 세계가 있을 것이라 상상하는 데 자신만의 발생론을 두고 있다. 그만큼 곽효환의 시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의 부재, 실재로서 엄연히 존재했던 것들의 사라짐, 재현할 수 없는 신성하고도 아름다웠던 것들의 결여 형식에 대한 순간적 탈환에 매진해왔다.”*
*유성호, 「시원의 탐사와 사랑의 추구(김달진문학상 심사평)」, 『서정시학』 2019년 여름호, 16쪽.
이러한 횡적인 펼침과 종적인 거슬러 오름, 서정적 응축과 서사적 풀림이라는 두 축이 정확한 균형을 이루는 시집이 바로 네 번째 시집 『너는』이다. 민족의 뿌리와 시원을 찾아가면서 그 속에 깃든 신화와 역사를 추적하는 작업과 함께 가족사와 유년의 풍경이라는 ‘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정신의 편력이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시 세계와 시적 지향성을 이렇게 정리한다.
내가 시단에 들어온 2000년대 초중반은 시의 전성기가 지나고 시와 독자의 거리 또는 불화가 깊어지기 시작한 때였어요. 이 낡은 신인이 어떻게 쓸 것인가가 큰 고민이었죠. 시가 읽히지 않게 된 것은 백석이나 이용악의 시처럼 서정과 서사를 겸비한 시들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나의 시에 서사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은 그러한 진단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이용악의 「북쪽」이라는 단 여섯 행의 시에는 어마어마한 북방의 서사가 응축되어 있으며, 「낡은 집」은 식민지의 핍박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죠. 또 한편으로는 꾸준히 신문을 따라 읽었습니다. 사실을 기반으로 쓰이는 신문 기사에는 자신만의 입장과 논조가 반영될 수밖에 없기에 모든 기사가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시대적 동향을 따라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시사적 문제들을 시 속에 들여올 수 있었죠. 내 시의 지향성을 네 개로 정리하면 이럴 거예요. 북방 시편들, 보편적 가치와 진실에 대한 질문, 동시대적 현실, 그리고 서정. 북방 시편들은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고, 동시대의 문제와 현안 들을 시적으로 포착하는 작업들이 최근 시집인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에 포함되어 있어요. 이 시들은 메시지를 강하게 표출하는데 그 반대편에 연시戀詩의 성격을 띠는 서정시를 배치해놓았죠.
그는 다시 길 위에 서서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큰 물길의 지류가 퍼져나가는 것은, 큰 둥치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불규칙하게 퍼져나가는 것은 멀리서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그 먼 풍경들을 가까운 풍경으로 끌고 오는 것이 이후의 시적 작업이 될 것이다. 물길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가지들이 새로 허공을 더듬 듯이 매 순간 자신이 서 있는 현실과 만나는 일일 것이다. 그 변화와 굴곡을 기다리며 그는 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기초 예술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 정책과 제도 정비를 통한 문학 생태계의 복원과 순환을 위한 사업을 맡을 기회가 있다면 기꺼이 또 그 현장의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임실군 오수면 주천리에 있는 귀로재로 향했다. 전주역에서 한 시간 정도 순천완주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오수IC에서 빠져나와 둔남천을 건너면 주천리가 나온다. 꽤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한가운데로 흐르는 개천 양옆으로 평탄하게 집들이 자리하고 있어 안온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었다. 조부님이 들어와서 살던 본가는 이미 폐가가 된 지 오래였다. 그 본가와 개천을 두고 마주한 곳에 귀로재가 있다.
주천리는 현풍 곽씨 집성촌인데 시인은 곡성공파이다. 본래는 띠집이어서 매해 지붕을 새로 이어야 했고 비좁은 데다가 세월의 풍상으로 물이 새기도 해 종친들이 뜻을 모아 옛 틀을 증축 하였다. 귀로재는 증조할아버지와 그분의 형님께서 가산을 일정 정도 보태어 중건한 것이다. 귀로재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세조가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봉위하였는데, 단종 때 도승지를 역임한 곽도(노재공)가 선조이다. 주천리의 뒷산 이름이 노산魯山이었는데 폐위된 왕 노산군魯山君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열다섯 가문의 선비들이 무작정 내려와 산기슭 한편을 거처로 삼았다. 곡성공은 노재공(득형)의 4남으로 곡성 현감을 지냈으며 연산군의 폐정 때문에 조정이 혼란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선친의 유지가 깃든 주천리에 정착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곡성공 역시 은거의 삶을 살다 노산에 안장되었는데 그를 기려 무덤 아래의 묘재를 귀로재歸魯齋로 이름하였다. 이와 같은 귀로재의 내력은 최근 보수와 복원 작업을 마무리한 뒤 재각 대청에 걸어놓 은 「귀로재 중수기重修記」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 중수기를 시인이 썼다.
본가를 뒤로하고.
귀로재에서.
시인은 갈수록 퇴락해가는 본가를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집 안 마당에는 잡초와 넝쿨이 우거져 있고 흙벽은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개천을 건너 종친이신 마을 이장 댁을 통해 귀로재에 들었다. 양쪽으로 뻗은 기와는 날아가는 새처럼 경쾌하고 웅장한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편액은 효산 이광열이 썼으며, 건물 안에는 세 개의 현판과 여섯 개의 주련이 있다. 귀로재를 나와 시인은 선영을 둘러보기 위해 노산으로 걸어올라갔다. 그를 기다리며 충심과 절의를 지켜 소신을 다한 혈맥에 대한 살뜰한 애정이 담겨 있는 그의 시를 떠올렸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거친 밥상을 들인 누추한 집에서
시대와 불화하며 끝끝내 은둔의 삶을 택한
그래서 심상하고 초라한 산을 닮은
둔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
내 몸 어디에도 그 노둔한 피가 흘러
나 역시 보잘것없고 무던하지만
어느 대목과 마주 서면 앙버티며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 「노둔한 사람들」 부분
곽효환
1996년 《세계일보》, 2002년 『시평』으로 데뷔.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너는』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외 다수가 있고, 저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외 다수가 있다. 그 밖에 편저 『이용악 시선』 『구보 박태원의 시와 시론』 『아버지, 그리운 당신』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백석 시 그림집』 『이용악 전집』(공편), 『청록집— 청록집 발간 70주년 기념 시 그림집』 『별 헤는 밤—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 그림집』 등을 냈다. 고대신예작가상, 애지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김달진 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 수상.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심장보다 높이』를 냈다. 신동엽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유심상 등 수상. 명지전문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