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가능한 귀향, 기약 없는 여행
신철규
이병률 시인의 고향인 제천을 답사하기 위해 파주출판도시에서 만났다. 출발 전날 중부 지역에 눈이 내려서 곳곳에 눈이 쌓여 있는 곳이 있었다. 출발 당일엔 강원도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서 국도가 좀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가 운영하는 출판사 건물 앞에서 그는 커피 두 잔을 들고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키가 생각보다 컸다. 사석에서 그를 뵌 적은 없었지만 미리 통화로 취재 동선에 대한 상의를 드릴 때도 그는 언제나 공손하고 친절하게 응대를 해서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의 시집을 거의 빼놓지 않고 따라 읽은 팬이기도 했던 터라 살짝 설레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우리는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면서 출발하기 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는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아직도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는 사람이 있다니. 그의 독특한 취향을 알 수 있었다. 외국의 호텔이나 카페에서 성냥이 있으면 가져온다고 했다.
제천역에서 사진 기자님과 접선하기로 했기에 이동하는 내내 살아온 내력과 방송사 이력에 대한 궁금한 이야기들을 물어보았다. 방송사에 기록될 만한 굵직굵직한 프로그램의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이기에 재밌는 일화들이 많았다. 그러던 그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후배님은 신이 있다고 믿어요?” “네, 뭐 신도는 아니지만 이 세계의 풀리지 않는 신비와 고통스러운 사건이 많은데 그것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소중한 안식처로서의 신, 모든 사람의 고통을 지켜봐주는 신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의미보다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씩의 재능이자 선물(gift)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신이 주었다고 믿어요. 저에게는 외로움을, 혼자임을 견디는 능력이 있어요. 그것이 제가 받은 선물이에요.” 혼자일 수 있는 능력, 혼자여도 전혀 불편하지 않는 능력. 그것도 재능이라면 이병률의 ‘혼자의 천재’라고 할 수도 있겠다.
1시쯤에 제천역에 도착했다. 제천역을 시골의 조그만 역으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KTX가 지나기 시작하면서 건물도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새로 지어졌다. 그의 유년 시절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방학 때면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제천으로 내려왔다. 중앙선을 오가는 비둘기호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누나와 함께 갔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혼자 기차를 탔다. 기차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어머니는 제천에 가는 다른 승객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겼다. 다행히 한 번도 제천역을 지나치거나 다른 역에 내린 적은 없었다. 혼자 가는 여행이 막막하거나 무서웠던 적은 없다. 비둘기호가 지나는 선로는 그 당시만 해도 사람들의 생활 가까이에 있었다. 멱 감는 사람들, 밭 가는 사람들, 풀 매는 사람들, 국도를 뛰는 아이들, 풀밭에 매어 있는 소, 천천히 흐르는 개울, 매연을 뿜으려 느리게 가는 트럭들이 바로 눈앞에서 흘러갔다. 그는 창문에 매달려 그 풍경들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릴 적 기관사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내리면 둘째 고모님이 마중을 나오거나 혼자 고모님 댁을 찾아갔다. 고향 마을인 용산골에 가는 버스가 하루에 한두 대밖에 없어 하룻밤을 자고 갈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둘째 고모님이 조카를 특히 아꼈기에 고모님 댁에서 하룻밤 묵는 것은 그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어머니는 일을 하시느라 항상 바빴다. 어머니는 항상 저 건너에 있는 분이셨다. 할머니나 고모의 품에 안겨서 어머니를 보았던 기억이 많다. 어머니의 사랑이 고플 때 어린 시인의 입에서는 어머니를 찾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고모 보고 싶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럴 때마다 그만큼 좋으면 고모네 가서 살아라, 라는 어머니의 핀잔을 듣기도 했다. 둘째 고모님도 자식이 넷이나 있었지만 조카를 친자식만큼, 아니 그보다 더 아껴주셨다.
우리는 제천역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용산골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이제는 고속도로가 나 있어 크게 어렵지 않은 길이었지만, 옛 기억을 더듬어보기 위해 국도를 택했다.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가 박달재를 넘어 한참을 더 가야 치악산 자락의 끄트머리에 오롯이 자리 잡은 용산골에 닿을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다가 박달재에 이르면 버스가 몇 분간 정차를 했다. 멀미를 겪었던 시인은 여기서 내려서 바깥 공기를 맡으며 멀미를 달랬다. 마음은 이미 고향은 용산골 마음에 있었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산줄기를 넘으면 용산골이 나온다.
그는 충북 제천군 백운면 운학리(용산골)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이곳에서 좀더 떨어진 백운면 방학리 364인데, 아버지가 양자로 간 집의 주소이다. 전체 호수가 20여 호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마을인 용산골에는 할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이 있다. 시인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 집인데, 그는 여기에서 다섯 살 때까지 살았다. 다섯 살 때 서울로 올라왔지만 부모님이 생업으로 인해 자녀들을 살뜰히 돌보기 힘든 분위기 속에서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품을 그리워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면 제천에 내려갔다. 처음엔 친척 분들 도움을 받았지만 초등학교 3년 때부터는 누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내려갔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혼자 다녔다. 워낙 외지에 있던 마을이라 눈이 많이 오면 걸어서 차가 다니는 곳까지 짐을 들고 두 시간 반 정도 힘들게 걸어 나와야 했다.
그는 제천 사람인가?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왜? “많이 좋아하니까요.” 너무나 간명하고 정확한 답변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고 할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태어났으며 언제나 내 생각의 지향점이 그쪽을 향하기 때문에 그래요.” 고향에는 자신을 애지중지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고모부, 사촌들, 그리고 동네 친구들이 있었다. 할머니는 방학만 되면 동네 어귀에 있는 언덕배기에서 손자를 기다렸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동네 아이들이 방학을 맞은 것을 안 날부터 거기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인은 버스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나는 듯이 뛰어 올라가면 할머니가 언덕배기에서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짐을 내팽개치고 할머니의 품에 뛰어들었다.

고향집은 이제 남의 소유가 되었다. 남의 집 명패가 붙어 있는 대문을 시인은 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텃밭 길을 따라 가다 마지막에 다다르는 곳이 할머니가 손자를 기다리고 계셨던 언덕배기다.
잊지 못할 고향 친구가 있다. 옆집 살던 상돈이. 상돈이는 새 잡는 법, 토끼 잡는 법, 물고기 잡는 법, 수영하는 법 등 어린 날의 자연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신기한 모든 경험을 선사해준 친구였다. 아니,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준 선생님이었다. 시골마을을 손바닥보다 훤하게 알고 있던 상돈이는 여름에는 앵두나 복숭아를 서리하기 위해서는 어디가 좋다든지, 겨울에는 남의 집에서 땅에 묻어놓은 무를 꺼내서 같이 먹는다든지 앞장서서 모험의 세계로 인도해주었다. 상돈이는 철 들고 나서 보지 못했다. 간혹 친척들 결혼식에 가서 수소문해 봐도 뚜렷하게 잡히는 것이 없다. 지금은 횡성에 산다는 정도의 소식만 간신히 들려온다. 할아버지 댁 옆집이었던 상돈이네 집은 외지인에게 팔렸는지 집터만 있었다. 무릎 조금 넘게 쌓아 올린 주춧대만 남은 채. 집을 허물어지고 나니 여기에 그 많은 식구가 살았던 것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 10평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예전에 식구들이 다들 포개어 잠을 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 금옥이 누나. 그 누나와의 소중한 기억이 있다. 금옥이 누나는 운학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당시에 전교생이 열 명 남짓 되는 아주 작은 학교였다.
방학 때는 학교가 비니까 학생들에게 하루에 한 사람씩 당번을 배정해서 토끼풀을 주고 오는 것이 방학 숙제였어요. 시골길을 아이들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걸어 내려가야 하는 먼 곳에 운학초등학교가 있었어요. 너무 머니까 당번 날에는 보리밥을 싸갔어요. 제가 좋아하는 누나가 같이 가자니 냉큼 따라나섰어요. 둘만 가니까 얼마나 설렜겠어요. 학교에 도착해서 토끼에게 풀을 주고 잔디밭에서 보리밥을 먹었어요. 반찬이라고는 김치볶음밖에 없었고요. 숟가락이 하나밖에 없어서 난감했었는데, 금옥이 누나가 아무렇지 않게 나뭇가지를 꺾어서 젓가락을 만드는 거예요. 그 모습이 너무 멋있었어요. 언젠가 연세대학교에서 강연을 갔는데, 객석에서 누군가 질문을 하면서 자기가 용산골 김금옥 씨 딸이라는 거예요. 혼미할 정도로 너무 신기했지요.
겨울에 했던 ‘인기척 놀이’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아이들이 저녁은 각자의 집에서 먹고 밤이 되면 마을의 공터에 모여요. 시골 밤은 얼마나 캄캄해요. 전기도 안 들어오고 랜턴도 없었으니까요. 랜턴도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에요. 네 명도 좋고 열 명이 넘어도 가능한 놀이였어요. 아이들이 모여서 두 팀으로 나뉘어서 한쪽은 숨고 한쪽은 찾았어요. 숨는 쪽이 먼저 어두컴컴하고 오목한 곳에 모여서 자리를 잡으면 ‘인기척’하고 소리를 질러요. 그때부터 술래가 되는 팀이 찾는 거지요. 완전히 어리지는 않았고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1학년 애들이 섞여 있었는데 남녀가 같이 좁은 데 모여 있으니 서로 키득거리는 거예요. 인기척 놀이는 잘 숨는 놀이가 아니라 들키기 위한 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용산골로부터 차도리를 지나 하늘재(치악산 줄기)가 있는데 그곳을 할아버지와 함께 세 번이나 넘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불어 개울을 건널 수 없었고 눈이 쌓이면 버스가 안 다녔기 때문이다. 개학을 앞두고 상경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책가방을 둘러멘 할아버지를 어린 손자는 힘겹게 따라 올라갔다. 할아버지는 한참 앞서 걷다가도 손자가 어디쯤 오는지 지켜보셨다. 하늘재를 넘으면 저 멀리 금대리 철도(루프식 철도 일명 또아리굴)가 보였다. (한참 뒤, 이 철로가 지나는 천변과 터널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의 초반부와 후반부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곳을 지나 원주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오면 아버지의 얼차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인은 고향에 도착해서부터 고향에 올라가기 전까지 방학 숙제를 한 번도 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개학까지 남은 이삼 일 동안 매를 맞아가면서 울면서 숙제를 했다.

금옥이 누나와의 추억이 담긴 곳. 학교는 오래 전 폐교되었고 지금은 학교 건물을 보존한 상태로 캠핑장이 되어 있었다. 시인은 예전에 운동장이 넓었는데 지금 보니 너무 좁은 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할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 할아버지는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원주 큰집으로 옮겨가셨다. 그래서 차도리라는 이웃마을로 시집간 막내 고모네 집에 3~4년 간 다니러 제천에 내려온다. 고모와 고모부는 사춘기 시절 어른이 되면 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들을 많았는데, 애정과 함께 인간적인 영양분을 베풀어주셨다.
그리고 덕동계곡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그곳에 가보고 충격을 받았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울창한 숲과 맑은 개울이 흐르는, 자연의 신비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는 그 풍경을 보고 커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엔 고모부께서 경운기로 몰고 다른 동네 어른들, 사촌들과 함께 어린 시인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유년기의 서울 생활은 쉽지 않았다. 방학이 되고 시골에 내려가서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자유와 규율, 자연과 도시가 주는 강한 대비가 그의 글쓰기를 추동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 가까운 곳이 아닌 먼 곳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품게 했을 수도 있다. 그는 라디오 키드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사연만 있으면 세상이 조금은 신비롭게 변하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라디오는 목소리로만 전달되기에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을 상상하면서 더 풍부해지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가진 언어의 여백과 상상력의 힘을 그는 라디오에서 배우지 않았을까. 그는 신청곡을 적은 엽서를 보내면 진행자에게 곧잘 읽히곤 하는 ‘선수’였다. 사람들의 감성을 울리는, 진심이 전달되는 이야기의 선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아버지는 백운중학교를 나오셨다. 백운중학교의 한두 해 선배가 돌아가신 오탁번 시인이시다. 오탁번 시인이 제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무척 놀라셨다. 아버지가 어려서 입양 간 백운면 방학리에서는 윤제림 시인이 성장하셨다. 윤제림 시인과 이병률 시인은 같은 마을을 본적으로 두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출세를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대도시,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학교를 다니면 아버지의 꿈이었던 법관이 되어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아버지의 꿈은 구체적이었다. 서울대 법대에 보내는 꿈. 그의 이름자에 법률 률(律)자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특별한 재주나 기술이 없었던 아버지는 약재상을 하는 친척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약재를 관리하거나 판매하는 일을 맡았다. 지금은 많이 쇠락하기는 했지만 청량리 약령 시장이 그곳이다. 시인은 갑작스럽게 변화된 환경, 다시 말해 조금은 누추하고 답답한 서울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에게 서울은 차갑고 어둡고 답답한 곳이었다. 학교에 가서도 조용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고 친구들을 많이 사귀지 못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키가 컸던 그는 교실 뒷줄에 앉아 고향 마을에 대한 향수에 빠져 창밖을 보는 때가 많았다. 그는 상념에 빠져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고 뜻 모를 그림을 작은 도화지에 그렸는데, 하루는 담임선생님께서 보시더니 그보다 더 큰 도화지에 그려보라고 했다. 그는 어느새 전지(全紙) 크기의 도화지에 그림들을 잇대어 그리기 시작했다. 고향에 들러서 본 풍경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면서 그리기도 했고 초현실적인 기괴한 형상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합창반 대표를 맡기도 했지만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에 나가 곧잘 상을 타기도 했다. 또 그는 중학교 때부터 남모를 글들을 혼자 끄적거렸다. 문예반 담당 선생님께서 더 길게 써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곁가지를 펼쳐가며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글짓기 대회도 나갔는데 잘 마무리 짓지 못한 글이었음에도 상을 받았다.
그가 시 창작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업 시간에 했던 글짓기와 문예반 활동을 유심히 지켜보신 사회 선생님께서 자신과 함께 언론사에서 개설한 시창작 수업을 들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수업료를 선생님께서 대신 내주신다는 것이었다. 그 수업을 담당하셨던 분이 후에 대학교 은사가 된 이근배 시인이다. 그는 격주로 가는 수업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심심해서 뒤적거리던 누나의 책장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김남조 시인의 시전집이었다. 종교적 감성과 애절한 사랑으로 충만한 시들이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시인은 종교를 가져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톨릭에 대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절대적 존재에게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과 다른 이에게 자신을 내주는 희생의 자세가 그의 시의 깊은 자장을 형성한 것은 어떤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시인이 되는 꿈을 가지게 된다.
그는 중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용두동,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제기천 근처에 살았다. (내가 다닌 대학교가 그 근처에 있었고 대학원 다닐 때는 제기천 근처에서 자취를 했었는데 혹 우리는 제기천변 어두운 골목에서 스쳐 지나간 적도 있었을까.) 그 시절 부모님은 구멍가게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 그는 한때 화가를 꿈꾸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환쟁이’가 되고 싶냐고 핏대를 세우며 화를 내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아버지가 시인이 되는 길을 열어주셨다. 수험 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원서를 접수했는데 다 떨어졌다. 이미 재수학원에 등록을 해놓고 방 안에서 자괴감에 빠져 이불을 둘러쓰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서울예대 입학 원서를 내민다. 여기가 집에서도 멀지 않고(서울예대는 그 당시 남산에 있었다) 너한테 맞는 것 같으니 원서를 넣어보라고. 아버지는 누구보다 아들의 길을 세심하게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율(律)은 법률이라는 뜻도 있지만, 운율 또는 시(詩)라는 뜻도 담고 있는 말이다. 어원적으로 보자면, 다닐 행(行)이 부수이며 붓을 뜻하는 율(聿)이 소리 기능을 한다. 이를 생각해보면 법률이 붓으로 길을 내는 것이라면, 글이나 시는 붓과 함께 가는 길이 아닐까. 아니, 가는 길을 붓으로 그리는 것이라고도. 그의 시와 글, 여행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그는 열심히 습작을 했다. 오규원, 최하림, 이근배 시인 같은 큰 스승들이 있었으며, 당대에 가장 주목받은 장석남, 신경숙 같은 쟁쟁한 선배들이 있었다. 그는 최하림 선생에게 사사를 받는다. 하지만 졸업 전까지 치열하게 한 습작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그는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바로 방송 작가의 길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원고를 쓰는 데 재미를 붙였다. 시청률도 잘 나왔고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그램마다 자리를 잡았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을 들자면 <우정의 무대>가 될 것이다. 정해진 원고대로 움직이지 않는 현장의 좌충우돌에서 사람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고 애달픈 사연이 마음을 울렸다. 방송 일에서의 성공이 거듭될 때마다 그는 불안해졌다. 시에서 한없이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방송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진 상태에서 불현듯 프랑스 유학을 결심한다.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하지만 기약된 유랑이었다. 일 년치의 학비와 생활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년여의 프랑스 체류 기간을 정리할 즈음, 그는 돌아갈 비행기 값을 마련하다는 명목으로 신춘문예에 응모할 시를 쓴다. 당선 소식이 그에게는 하나의 소환장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환장이 실제로 날아들었다. 이방인으로 떠났던 그가 시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는 파리로 떠날 때 두 시인의 시집을 들고 갔다. 허수경과 마종기.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지만 그는 시를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두 시인은 그가 시인이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게 해준 빛 같은 존재이다. 마종기 시인은 그의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의 추천사를 써주시고, 허수경 시집은 『찬란』에 발문을 남긴다. 그에게 마종기 시인은 특별하다. 그에게 특히 강하게 남은 시집은 마종기 시인의 시집은 『그 나라 하늘빛』이다. 미국에 체류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신이 두고 간 것들을 모국어로 쓰고 호명하는 애절함이 짙게 배어 있어 있는 그 시집을 아껴 읽었다. 그 시집에는 모국어의 온도와 질감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마종기 시인과 이병률 시인의 정서적 친연성이 생길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첫 시집 출간회 때도 마종기 시인이 우연찮게 한국을 방문하던 시기와 겹쳐 찾아주셨고 그 후부터는 귀국하실 때마다 동행하면서 인연이 두터워졌다. 심지어 이병률 시인의 호적에 마종기 시인이 올려져 있다. 65세 이상 외국에 계시는 분들은 한국에 적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간헐적이나마 이병률과 마종기는 동거인이다.
이병률에게 사람은 상수이며 또 변수이다. 그는 사람과 사람살이에 관심이 많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행동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 살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다. 또한 사람은 언제나 같을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 ‘나’라는 사람도 상수가 될 수 없지만 ‘너’도 상수는 아니다. 네가 누구냐에 따라서, 어디서 나고 어떻게 자란 사람인지에 따라서 그에 맞는 내가 불쑥 튀어나온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타자가 된다. 내가 모르는 나를 그 사람이 발견해주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마주보며 일어나기도 하지만 서로가 없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나의 옷매무새를 가지런하게 해주고 내가 없는 빈자리를 다듬어주는 사람들이 그의 곁에는 늘 있었다. 그 또한 다른 이에게 그러한 사람이 되어주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나를 늘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는 멀리 떠날 수 있었고 또 돌아와야 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면에서 그는 어느 정도 충청도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향성의 인간이다. 시와 산문을 읽으면서 떠오른 그의 이미지는, 한적한 시골 정류장 근처에 있는 가게에 평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마을 사람들이 한가롭게 나와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그 모서리쯤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옷 솔기를 다듬거나 바닥에 떨어진 벚꽃 잎에 열없이 사진기를 들이대면서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이런 은근함과 은은함이 배어나는 것이 그의 시와 산문이다. 은근함은 타인의 삶과 말에 서서히 녹아들거나 스며드는 것을 말하며, 은은함은 자신이 끝내 닿을 수 없는 타인의 어둠을 가만히 놓아두는 것을 말한다. 그는 자신과 타인의 삶이 맞닿는 교집함으로 타인의 심연에 오래 머무르고, 자신과 타인의 삶이 만날 수 없는 여집합을 가만히 보듬는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끌림이다. 인연은 연인이 되기도 한다. 마음의 주파수가 맞거나 행복과 고통의 임계치가 어느 정도 비슷한 사람에게 우리는 끌린다.
그의 시에는 ‘먼 데’라는 공간과 ‘저녁’이라는 시간이 자주 나온다. 그에게 ‘먼 데’는 여기에서의 비루하고 비참한 생활을 버텨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생활과 사람 때문에 그는 언제나 뒷걸음친다. 아니, 그 스스로 떠밀리는 사람이다. 그에게 절연은 세상 바깥으로의 은둔이고 나 바깥으로의 피신이다. 그 밀리면서 만들어내는 시간의 무늬와 감정의 파동이 그의 시를 추동한다. 그는 언제나 떠도는 기다림과 분주한 머무름 사이에 있다. 그에게 슬픔은 유전 형질처럼 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이별의 연습이 되어버린 방랑은 슬픔의 비린내를 강하게 풍긴다.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무늬들」 부분(『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언젠가 그가 강연에서 시와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신달자 시인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여행을 자주 다니시는데 여행을 다니다 보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오지 않나요. 여행에서 돌아오면 이별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했나요. 시인의 답이 절창이다. “사력을 다해 사랑하고 사력을 다해서 잊습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사랑하고 죽을힘을 다해 잊는다. 죽을힘은 죽으려고 하는 힘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쓰는 힘이기에 사랑이 끊어지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며, 죽을 정도로 아프지만 죽는 것만큼 힘들게 사랑을 끊어냈다는 뜻이다. 사랑은 찬란하지만 남겨지거나 떠나는 것은 참혹을 견디는 일이다.

그에게 기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에게 기차는 언제나 자신을 낯설고 설레는 곳을 데려다주는 마법의 융단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기차나 기차역이 나오지 않는 시집은 없다. 이상하게도 공항이나 비행기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다른 나라로 몸을 옮겨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은 출발지와 목적지, 입국과 출국 사이에 변수를 허용하지 않는 직선적인 것이라면, 기차는 여전히 아놀로그이다. 기차가 오는 선로가, 기차가 들어오거나 나가는 곳에서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선로가 우리 삶이 온 자리와 갈 자리를 보여주며, 이상한 장애물과 낯선 것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기차에서는 서로 마주보거나 몸이 같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다. 눈빛이 마주치기도 하다가 어긋나기도 하면서 가까이에서 사람을 느끼는 일, 짐을 올려주는 일. 창에 비친 풍경 속에 든 앞사람의 얼굴을 훔쳐보는 일, 그러면서 혼자를 느끼는 일이 가능한 공간이 바로 기차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차에서 자신이 본 풍경을 글로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시인의 꿈을 품었다. 기차가 자신의 시와 글의 첫 단추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잊히지 않는 여행에서의 인연이 있다. 파리에서 2년을 살았는데, 신춘문예 당선 통보를 받고 귀국하기 전 마지막 여행을 프라하로 떠났다가 돌아올 때의 일이다.
프라하에서 밤 기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오는 중이었어요. 기차가 유럽의 교통 허브인 프랑크푸르트에서 정차를 했죠. 한 이십 분 정도. 플랫폼에 걸린 시계는 아침 7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요. 한 여인이 객실 문을 열고 들어와 짐가방을 선반에 올리려고 했는데 키가 작아서 조금 힘들어했어요. 보다 못 한 제가 일어나서 짐을 올려줬지요. 그녀는 마침 제 맞은편에 앉았지요. 그녀도 창밖을 보고 저도 그러고 있는데, 창 저쪽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어요. 마주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창을 보았는데 유리창에 서로의 얼굴이 담긴 것이에요. 배낭에서 사과를 꺼내 반쪽으로 갈라 반쪽을 그녀에게 주고 남은 것을 제가 먹었어요. 처음에는 안 받으려고 했는데 조심조심 베어 먹더라고요. 그렇게 창밖을 보면서 사과를 먹다가 말을 건넸지요. 그녀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고 했어요. 안타깝지만 그녀는 파리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내린다고 했어요. 그녀가 내려할 역에 도착해서 제가 짐을 내려주니까 저한테 인사를 하고 갔어요. 기차가 정차한 그 짧은 순간 엄청나게 갈등을 했어요. 따라 내릴까 말까. 시상식에 가야 하니까 귀국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내리면 그 시간에 도착을 못 하는데 어쩌나. 지금도 이름이 잊히지 않아요. 안느. 저의 더듬거리는 불어에도 다정한 눈길로 대화하던 눈빛과 표정이 잊히지 않아요. 떠나면서 프랑스 친구들에게 써놓은 편지의 문법이 맞는지 물어볼 때도 자상하게 한 문장 한 문장 다듬어주고. 그녀가 저한테는 불멸의 인연으로 남아 있어요.
「장도열차」라는 시를 쓸 무렵 그는 중국을 오래 여행하고 있었다. 란저우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지나친 역에서의 느낌을 메모해놓은 것이 바로 「장도열차」라는 시라고 한다. 그는 삼박 사일 동안 기차를 탔다. 딱딱한 침대가 있는 조금은 불편한 기차에서 그는 같은 객실에 있는 사람들과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먹을 것도 나눠먹었다. 그렇게 오던 중에 갑자기 철로 양편으로 세 시간 넘게 해바라기 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 아름다움이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그 이후에는 희미한 옛사랑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연함과 서글픔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는 너무나 반복된 풍경 속에 놓이면서 이상한 착란이 왔다. 눈동자가 그 샛노란 빛에 닳아버리는 감각 같은 것이 찾아왔었다. 그는 아름다움에 지는 사람이다.
5시 6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폼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 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장도열차」 부분(『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 2003)
그의 여행 산문집에는 순간과 풍경을 담은,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인적 없는 설원의 풍경이거나 샌드위치와 커피가 정갈하게 놓인 카페의 식탁, 그리고 식탁 아래에 있는 흰색 타일과 하늘색 타일이 뒤섞인 바닥, 누추한 역과 기차를 배경으로 흘러가는 사람의 흐린 형상, 무심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 창밖으로는 바다가 느리게 늠실거리고 창턱에는 오밀조밀한 인형들이 늘어서 있는 창틀, 수평선을 배경으로 수줍게 웃으며 백사장에 서 있는 연인, 아래에서 올려다본, 빛을 가득 담은 물푸레나무 잎들……. 그 고요와 정지의 순간들은 영원의 무늬이지 않을까.
그는 이제 이 주 이상의 긴 여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부모님께 불효를 많이 했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 옆에서 눈 마주쳐주고 손잡아 드리는 것으로 그것을 갚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외국에 나가서 살 거라고 했다. 아마 그것이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다고. 돌아오지 않는 여행. 딱히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을 마감하지 않을까 하는 예감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예감이 아니라 실행하는 날이 곳 올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고 했다. 그곳이 어디든 그가 초대해준다면(나에게는 프랑스의 어느 시골 기차역이 떠오른다) 그에게 엽서를 보내고 밤기차를 타고 찾아가고 싶다. 포도주와 양초만 있으면 그곳의 밤은 얼마나 달큼하고 포근할 것인가. 우리는 흐린 불빛에 비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떠나간, 떠나보낸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울 것이다.
이병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등과 산문집 『혼자가 혼자에게』 『내 옆에 있는 사람』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등을 냈다.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심장보다 높이』를 냈다. 신동엽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불가능한 귀향, 기약 없는 여행
신철규
이병률 시인의 고향인 제천을 답사하기 위해 파주출판도시에서 만났다. 출발 전날 중부 지역에 눈이 내려서 곳곳에 눈이 쌓여 있는 곳이 있었다. 출발 당일엔 강원도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서 국도가 좀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가 운영하는 출판사 건물 앞에서 그는 커피 두 잔을 들고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키가 생각보다 컸다. 사석에서 그를 뵌 적은 없었지만 미리 통화로 취재 동선에 대한 상의를 드릴 때도 그는 언제나 공손하고 친절하게 응대를 해서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의 시집을 거의 빼놓지 않고 따라 읽은 팬이기도 했던 터라 살짝 설레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우리는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면서 출발하기 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는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아직도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는 사람이 있다니. 그의 독특한 취향을 알 수 있었다. 외국의 호텔이나 카페에서 성냥이 있으면 가져온다고 했다.
제천역에서 사진 기자님과 접선하기로 했기에 이동하는 내내 살아온 내력과 방송사 이력에 대한 궁금한 이야기들을 물어보았다. 방송사에 기록될 만한 굵직굵직한 프로그램의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이기에 재밌는 일화들이 많았다. 그러던 그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후배님은 신이 있다고 믿어요?” “네, 뭐 신도는 아니지만 이 세계의 풀리지 않는 신비와 고통스러운 사건이 많은데 그것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소중한 안식처로서의 신, 모든 사람의 고통을 지켜봐주는 신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의미보다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씩의 재능이자 선물(gift)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신이 주었다고 믿어요. 저에게는 외로움을, 혼자임을 견디는 능력이 있어요. 그것이 제가 받은 선물이에요.” 혼자일 수 있는 능력, 혼자여도 전혀 불편하지 않는 능력. 그것도 재능이라면 이병률의 ‘혼자의 천재’라고 할 수도 있겠다.
1시쯤에 제천역에 도착했다. 제천역을 시골의 조그만 역으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KTX가 지나기 시작하면서 건물도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새로 지어졌다. 그의 유년 시절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방학 때면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제천으로 내려왔다. 중앙선을 오가는 비둘기호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누나와 함께 갔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혼자 기차를 탔다. 기차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어머니는 제천에 가는 다른 승객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겼다. 다행히 한 번도 제천역을 지나치거나 다른 역에 내린 적은 없었다. 혼자 가는 여행이 막막하거나 무서웠던 적은 없다. 비둘기호가 지나는 선로는 그 당시만 해도 사람들의 생활 가까이에 있었다. 멱 감는 사람들, 밭 가는 사람들, 풀 매는 사람들, 국도를 뛰는 아이들, 풀밭에 매어 있는 소, 천천히 흐르는 개울, 매연을 뿜으려 느리게 가는 트럭들이 바로 눈앞에서 흘러갔다. 그는 창문에 매달려 그 풍경들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릴 적 기관사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내리면 둘째 고모님이 마중을 나오거나 혼자 고모님 댁을 찾아갔다. 고향 마을인 용산골에 가는 버스가 하루에 한두 대밖에 없어 하룻밤을 자고 갈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둘째 고모님이 조카를 특히 아꼈기에 고모님 댁에서 하룻밤 묵는 것은 그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어머니는 일을 하시느라 항상 바빴다. 어머니는 항상 저 건너에 있는 분이셨다. 할머니나 고모의 품에 안겨서 어머니를 보았던 기억이 많다. 어머니의 사랑이 고플 때 어린 시인의 입에서는 어머니를 찾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고모 보고 싶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럴 때마다 그만큼 좋으면 고모네 가서 살아라, 라는 어머니의 핀잔을 듣기도 했다. 둘째 고모님도 자식이 넷이나 있었지만 조카를 친자식만큼, 아니 그보다 더 아껴주셨다.
우리는 제천역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용산골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이제는 고속도로가 나 있어 크게 어렵지 않은 길이었지만, 옛 기억을 더듬어보기 위해 국도를 택했다.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가 박달재를 넘어 한참을 더 가야 치악산 자락의 끄트머리에 오롯이 자리 잡은 용산골에 닿을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다가 박달재에 이르면 버스가 몇 분간 정차를 했다. 멀미를 겪었던 시인은 여기서 내려서 바깥 공기를 맡으며 멀미를 달랬다. 마음은 이미 고향은 용산골 마음에 있었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산줄기를 넘으면 용산골이 나온다.
그는 충북 제천군 백운면 운학리(용산골)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이곳에서 좀더 떨어진 백운면 방학리 364인데, 아버지가 양자로 간 집의 주소이다. 전체 호수가 20여 호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마을인 용산골에는 할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이 있다. 시인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 집인데, 그는 여기에서 다섯 살 때까지 살았다. 다섯 살 때 서울로 올라왔지만 부모님이 생업으로 인해 자녀들을 살뜰히 돌보기 힘든 분위기 속에서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품을 그리워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면 제천에 내려갔다. 처음엔 친척 분들 도움을 받았지만 초등학교 3년 때부터는 누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내려갔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혼자 다녔다. 워낙 외지에 있던 마을이라 눈이 많이 오면 걸어서 차가 다니는 곳까지 짐을 들고 두 시간 반 정도 힘들게 걸어 나와야 했다.
그는 제천 사람인가?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왜? “많이 좋아하니까요.” 너무나 간명하고 정확한 답변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고 할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태어났으며 언제나 내 생각의 지향점이 그쪽을 향하기 때문에 그래요.” 고향에는 자신을 애지중지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고모부, 사촌들, 그리고 동네 친구들이 있었다. 할머니는 방학만 되면 동네 어귀에 있는 언덕배기에서 손자를 기다렸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동네 아이들이 방학을 맞은 것을 안 날부터 거기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인은 버스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나는 듯이 뛰어 올라가면 할머니가 언덕배기에서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짐을 내팽개치고 할머니의 품에 뛰어들었다.
고향집은 이제 남의 소유가 되었다. 남의 집 명패가 붙어 있는 대문을 시인은 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텃밭 길을 따라 가다 마지막에 다다르는 곳이 할머니가 손자를 기다리고 계셨던 언덕배기다.
잊지 못할 고향 친구가 있다. 옆집 살던 상돈이. 상돈이는 새 잡는 법, 토끼 잡는 법, 물고기 잡는 법, 수영하는 법 등 어린 날의 자연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신기한 모든 경험을 선사해준 친구였다. 아니,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준 선생님이었다. 시골마을을 손바닥보다 훤하게 알고 있던 상돈이는 여름에는 앵두나 복숭아를 서리하기 위해서는 어디가 좋다든지, 겨울에는 남의 집에서 땅에 묻어놓은 무를 꺼내서 같이 먹는다든지 앞장서서 모험의 세계로 인도해주었다. 상돈이는 철 들고 나서 보지 못했다. 간혹 친척들 결혼식에 가서 수소문해 봐도 뚜렷하게 잡히는 것이 없다. 지금은 횡성에 산다는 정도의 소식만 간신히 들려온다. 할아버지 댁 옆집이었던 상돈이네 집은 외지인에게 팔렸는지 집터만 있었다. 무릎 조금 넘게 쌓아 올린 주춧대만 남은 채. 집을 허물어지고 나니 여기에 그 많은 식구가 살았던 것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 10평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예전에 식구들이 다들 포개어 잠을 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 금옥이 누나. 그 누나와의 소중한 기억이 있다. 금옥이 누나는 운학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당시에 전교생이 열 명 남짓 되는 아주 작은 학교였다.
방학 때는 학교가 비니까 학생들에게 하루에 한 사람씩 당번을 배정해서 토끼풀을 주고 오는 것이 방학 숙제였어요. 시골길을 아이들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걸어 내려가야 하는 먼 곳에 운학초등학교가 있었어요. 너무 머니까 당번 날에는 보리밥을 싸갔어요. 제가 좋아하는 누나가 같이 가자니 냉큼 따라나섰어요. 둘만 가니까 얼마나 설렜겠어요. 학교에 도착해서 토끼에게 풀을 주고 잔디밭에서 보리밥을 먹었어요. 반찬이라고는 김치볶음밖에 없었고요. 숟가락이 하나밖에 없어서 난감했었는데, 금옥이 누나가 아무렇지 않게 나뭇가지를 꺾어서 젓가락을 만드는 거예요. 그 모습이 너무 멋있었어요. 언젠가 연세대학교에서 강연을 갔는데, 객석에서 누군가 질문을 하면서 자기가 용산골 김금옥 씨 딸이라는 거예요. 혼미할 정도로 너무 신기했지요.
겨울에 했던 ‘인기척 놀이’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아이들이 저녁은 각자의 집에서 먹고 밤이 되면 마을의 공터에 모여요. 시골 밤은 얼마나 캄캄해요. 전기도 안 들어오고 랜턴도 없었으니까요. 랜턴도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에요. 네 명도 좋고 열 명이 넘어도 가능한 놀이였어요. 아이들이 모여서 두 팀으로 나뉘어서 한쪽은 숨고 한쪽은 찾았어요. 숨는 쪽이 먼저 어두컴컴하고 오목한 곳에 모여서 자리를 잡으면 ‘인기척’하고 소리를 질러요. 그때부터 술래가 되는 팀이 찾는 거지요. 완전히 어리지는 않았고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1학년 애들이 섞여 있었는데 남녀가 같이 좁은 데 모여 있으니 서로 키득거리는 거예요. 인기척 놀이는 잘 숨는 놀이가 아니라 들키기 위한 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용산골로부터 차도리를 지나 하늘재(치악산 줄기)가 있는데 그곳을 할아버지와 함께 세 번이나 넘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불어 개울을 건널 수 없었고 눈이 쌓이면 버스가 안 다녔기 때문이다. 개학을 앞두고 상경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책가방을 둘러멘 할아버지를 어린 손자는 힘겹게 따라 올라갔다. 할아버지는 한참 앞서 걷다가도 손자가 어디쯤 오는지 지켜보셨다. 하늘재를 넘으면 저 멀리 금대리 철도(루프식 철도 일명 또아리굴)가 보였다. (한참 뒤, 이 철로가 지나는 천변과 터널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의 초반부와 후반부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곳을 지나 원주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오면 아버지의 얼차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인은 고향에 도착해서부터 고향에 올라가기 전까지 방학 숙제를 한 번도 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개학까지 남은 이삼 일 동안 매를 맞아가면서 울면서 숙제를 했다.
금옥이 누나와의 추억이 담긴 곳. 학교는 오래 전 폐교되었고 지금은 학교 건물을 보존한 상태로 캠핑장이 되어 있었다. 시인은 예전에 운동장이 넓었는데 지금 보니 너무 좁은 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할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 할아버지는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원주 큰집으로 옮겨가셨다. 그래서 차도리라는 이웃마을로 시집간 막내 고모네 집에 3~4년 간 다니러 제천에 내려온다. 고모와 고모부는 사춘기 시절 어른이 되면 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들을 많았는데, 애정과 함께 인간적인 영양분을 베풀어주셨다.
그리고 덕동계곡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그곳에 가보고 충격을 받았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울창한 숲과 맑은 개울이 흐르는, 자연의 신비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는 그 풍경을 보고 커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엔 고모부께서 경운기로 몰고 다른 동네 어른들, 사촌들과 함께 어린 시인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유년기의 서울 생활은 쉽지 않았다. 방학이 되고 시골에 내려가서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자유와 규율, 자연과 도시가 주는 강한 대비가 그의 글쓰기를 추동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 가까운 곳이 아닌 먼 곳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품게 했을 수도 있다. 그는 라디오 키드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사연만 있으면 세상이 조금은 신비롭게 변하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라디오는 목소리로만 전달되기에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을 상상하면서 더 풍부해지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가진 언어의 여백과 상상력의 힘을 그는 라디오에서 배우지 않았을까. 그는 신청곡을 적은 엽서를 보내면 진행자에게 곧잘 읽히곤 하는 ‘선수’였다. 사람들의 감성을 울리는, 진심이 전달되는 이야기의 선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아버지는 백운중학교를 나오셨다. 백운중학교의 한두 해 선배가 돌아가신 오탁번 시인이시다. 오탁번 시인이 제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무척 놀라셨다. 아버지가 어려서 입양 간 백운면 방학리에서는 윤제림 시인이 성장하셨다. 윤제림 시인과 이병률 시인은 같은 마을을 본적으로 두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출세를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대도시,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학교를 다니면 아버지의 꿈이었던 법관이 되어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아버지의 꿈은 구체적이었다. 서울대 법대에 보내는 꿈. 그의 이름자에 법률 률(律)자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특별한 재주나 기술이 없었던 아버지는 약재상을 하는 친척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약재를 관리하거나 판매하는 일을 맡았다. 지금은 많이 쇠락하기는 했지만 청량리 약령 시장이 그곳이다. 시인은 갑작스럽게 변화된 환경, 다시 말해 조금은 누추하고 답답한 서울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에게 서울은 차갑고 어둡고 답답한 곳이었다. 학교에 가서도 조용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고 친구들을 많이 사귀지 못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키가 컸던 그는 교실 뒷줄에 앉아 고향 마을에 대한 향수에 빠져 창밖을 보는 때가 많았다. 그는 상념에 빠져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고 뜻 모를 그림을 작은 도화지에 그렸는데, 하루는 담임선생님께서 보시더니 그보다 더 큰 도화지에 그려보라고 했다. 그는 어느새 전지(全紙) 크기의 도화지에 그림들을 잇대어 그리기 시작했다. 고향에 들러서 본 풍경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면서 그리기도 했고 초현실적인 기괴한 형상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합창반 대표를 맡기도 했지만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에 나가 곧잘 상을 타기도 했다. 또 그는 중학교 때부터 남모를 글들을 혼자 끄적거렸다. 문예반 담당 선생님께서 더 길게 써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곁가지를 펼쳐가며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글짓기 대회도 나갔는데 잘 마무리 짓지 못한 글이었음에도 상을 받았다.
그가 시 창작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업 시간에 했던 글짓기와 문예반 활동을 유심히 지켜보신 사회 선생님께서 자신과 함께 언론사에서 개설한 시창작 수업을 들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수업료를 선생님께서 대신 내주신다는 것이었다. 그 수업을 담당하셨던 분이 후에 대학교 은사가 된 이근배 시인이다. 그는 격주로 가는 수업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심심해서 뒤적거리던 누나의 책장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김남조 시인의 시전집이었다. 종교적 감성과 애절한 사랑으로 충만한 시들이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시인은 종교를 가져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톨릭에 대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절대적 존재에게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과 다른 이에게 자신을 내주는 희생의 자세가 그의 시의 깊은 자장을 형성한 것은 어떤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시인이 되는 꿈을 가지게 된다.
그는 중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용두동,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제기천 근처에 살았다. (내가 다닌 대학교가 그 근처에 있었고 대학원 다닐 때는 제기천 근처에서 자취를 했었는데 혹 우리는 제기천변 어두운 골목에서 스쳐 지나간 적도 있었을까.) 그 시절 부모님은 구멍가게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 그는 한때 화가를 꿈꾸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환쟁이’가 되고 싶냐고 핏대를 세우며 화를 내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아버지가 시인이 되는 길을 열어주셨다. 수험 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원서를 접수했는데 다 떨어졌다. 이미 재수학원에 등록을 해놓고 방 안에서 자괴감에 빠져 이불을 둘러쓰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서울예대 입학 원서를 내민다. 여기가 집에서도 멀지 않고(서울예대는 그 당시 남산에 있었다) 너한테 맞는 것 같으니 원서를 넣어보라고. 아버지는 누구보다 아들의 길을 세심하게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율(律)은 법률이라는 뜻도 있지만, 운율 또는 시(詩)라는 뜻도 담고 있는 말이다. 어원적으로 보자면, 다닐 행(行)이 부수이며 붓을 뜻하는 율(聿)이 소리 기능을 한다. 이를 생각해보면 법률이 붓으로 길을 내는 것이라면, 글이나 시는 붓과 함께 가는 길이 아닐까. 아니, 가는 길을 붓으로 그리는 것이라고도. 그의 시와 글, 여행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그는 열심히 습작을 했다. 오규원, 최하림, 이근배 시인 같은 큰 스승들이 있었으며, 당대에 가장 주목받은 장석남, 신경숙 같은 쟁쟁한 선배들이 있었다. 그는 최하림 선생에게 사사를 받는다. 하지만 졸업 전까지 치열하게 한 습작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그는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바로 방송 작가의 길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원고를 쓰는 데 재미를 붙였다. 시청률도 잘 나왔고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그램마다 자리를 잡았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을 들자면 <우정의 무대>가 될 것이다. 정해진 원고대로 움직이지 않는 현장의 좌충우돌에서 사람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고 애달픈 사연이 마음을 울렸다. 방송 일에서의 성공이 거듭될 때마다 그는 불안해졌다. 시에서 한없이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방송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진 상태에서 불현듯 프랑스 유학을 결심한다.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하지만 기약된 유랑이었다. 일 년치의 학비와 생활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년여의 프랑스 체류 기간을 정리할 즈음, 그는 돌아갈 비행기 값을 마련하다는 명목으로 신춘문예에 응모할 시를 쓴다. 당선 소식이 그에게는 하나의 소환장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환장이 실제로 날아들었다. 이방인으로 떠났던 그가 시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는 파리로 떠날 때 두 시인의 시집을 들고 갔다. 허수경과 마종기.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지만 그는 시를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두 시인은 그가 시인이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게 해준 빛 같은 존재이다. 마종기 시인은 그의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의 추천사를 써주시고, 허수경 시집은 『찬란』에 발문을 남긴다. 그에게 마종기 시인은 특별하다. 그에게 특히 강하게 남은 시집은 마종기 시인의 시집은 『그 나라 하늘빛』이다. 미국에 체류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신이 두고 간 것들을 모국어로 쓰고 호명하는 애절함이 짙게 배어 있어 있는 그 시집을 아껴 읽었다. 그 시집에는 모국어의 온도와 질감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마종기 시인과 이병률 시인의 정서적 친연성이 생길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첫 시집 출간회 때도 마종기 시인이 우연찮게 한국을 방문하던 시기와 겹쳐 찾아주셨고 그 후부터는 귀국하실 때마다 동행하면서 인연이 두터워졌다. 심지어 이병률 시인의 호적에 마종기 시인이 올려져 있다. 65세 이상 외국에 계시는 분들은 한국에 적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간헐적이나마 이병률과 마종기는 동거인이다.
이병률에게 사람은 상수이며 또 변수이다. 그는 사람과 사람살이에 관심이 많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행동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 살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다. 또한 사람은 언제나 같을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 ‘나’라는 사람도 상수가 될 수 없지만 ‘너’도 상수는 아니다. 네가 누구냐에 따라서, 어디서 나고 어떻게 자란 사람인지에 따라서 그에 맞는 내가 불쑥 튀어나온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타자가 된다. 내가 모르는 나를 그 사람이 발견해주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마주보며 일어나기도 하지만 서로가 없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나의 옷매무새를 가지런하게 해주고 내가 없는 빈자리를 다듬어주는 사람들이 그의 곁에는 늘 있었다. 그 또한 다른 이에게 그러한 사람이 되어주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나를 늘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는 멀리 떠날 수 있었고 또 돌아와야 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면에서 그는 어느 정도 충청도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향성의 인간이다. 시와 산문을 읽으면서 떠오른 그의 이미지는, 한적한 시골 정류장 근처에 있는 가게에 평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마을 사람들이 한가롭게 나와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그 모서리쯤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옷 솔기를 다듬거나 바닥에 떨어진 벚꽃 잎에 열없이 사진기를 들이대면서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이런 은근함과 은은함이 배어나는 것이 그의 시와 산문이다. 은근함은 타인의 삶과 말에 서서히 녹아들거나 스며드는 것을 말하며, 은은함은 자신이 끝내 닿을 수 없는 타인의 어둠을 가만히 놓아두는 것을 말한다. 그는 자신과 타인의 삶이 맞닿는 교집함으로 타인의 심연에 오래 머무르고, 자신과 타인의 삶이 만날 수 없는 여집합을 가만히 보듬는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끌림이다. 인연은 연인이 되기도 한다. 마음의 주파수가 맞거나 행복과 고통의 임계치가 어느 정도 비슷한 사람에게 우리는 끌린다.
그의 시에는 ‘먼 데’라는 공간과 ‘저녁’이라는 시간이 자주 나온다. 그에게 ‘먼 데’는 여기에서의 비루하고 비참한 생활을 버텨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생활과 사람 때문에 그는 언제나 뒷걸음친다. 아니, 그 스스로 떠밀리는 사람이다. 그에게 절연은 세상 바깥으로의 은둔이고 나 바깥으로의 피신이다. 그 밀리면서 만들어내는 시간의 무늬와 감정의 파동이 그의 시를 추동한다. 그는 언제나 떠도는 기다림과 분주한 머무름 사이에 있다. 그에게 슬픔은 유전 형질처럼 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이별의 연습이 되어버린 방랑은 슬픔의 비린내를 강하게 풍긴다.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무늬들」 부분(『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언젠가 그가 강연에서 시와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신달자 시인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여행을 자주 다니시는데 여행을 다니다 보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오지 않나요. 여행에서 돌아오면 이별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했나요. 시인의 답이 절창이다. “사력을 다해 사랑하고 사력을 다해서 잊습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사랑하고 죽을힘을 다해 잊는다. 죽을힘은 죽으려고 하는 힘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쓰는 힘이기에 사랑이 끊어지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며, 죽을 정도로 아프지만 죽는 것만큼 힘들게 사랑을 끊어냈다는 뜻이다. 사랑은 찬란하지만 남겨지거나 떠나는 것은 참혹을 견디는 일이다.
그에게 기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에게 기차는 언제나 자신을 낯설고 설레는 곳을 데려다주는 마법의 융단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기차나 기차역이 나오지 않는 시집은 없다. 이상하게도 공항이나 비행기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다른 나라로 몸을 옮겨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은 출발지와 목적지, 입국과 출국 사이에 변수를 허용하지 않는 직선적인 것이라면, 기차는 여전히 아놀로그이다. 기차가 오는 선로가, 기차가 들어오거나 나가는 곳에서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선로가 우리 삶이 온 자리와 갈 자리를 보여주며, 이상한 장애물과 낯선 것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기차에서는 서로 마주보거나 몸이 같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다. 눈빛이 마주치기도 하다가 어긋나기도 하면서 가까이에서 사람을 느끼는 일, 짐을 올려주는 일. 창에 비친 풍경 속에 든 앞사람의 얼굴을 훔쳐보는 일, 그러면서 혼자를 느끼는 일이 가능한 공간이 바로 기차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차에서 자신이 본 풍경을 글로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시인의 꿈을 품었다. 기차가 자신의 시와 글의 첫 단추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잊히지 않는 여행에서의 인연이 있다. 파리에서 2년을 살았는데, 신춘문예 당선 통보를 받고 귀국하기 전 마지막 여행을 프라하로 떠났다가 돌아올 때의 일이다.
프라하에서 밤 기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오는 중이었어요. 기차가 유럽의 교통 허브인 프랑크푸르트에서 정차를 했죠. 한 이십 분 정도. 플랫폼에 걸린 시계는 아침 7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요. 한 여인이 객실 문을 열고 들어와 짐가방을 선반에 올리려고 했는데 키가 작아서 조금 힘들어했어요. 보다 못 한 제가 일어나서 짐을 올려줬지요. 그녀는 마침 제 맞은편에 앉았지요. 그녀도 창밖을 보고 저도 그러고 있는데, 창 저쪽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어요. 마주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창을 보았는데 유리창에 서로의 얼굴이 담긴 것이에요. 배낭에서 사과를 꺼내 반쪽으로 갈라 반쪽을 그녀에게 주고 남은 것을 제가 먹었어요. 처음에는 안 받으려고 했는데 조심조심 베어 먹더라고요. 그렇게 창밖을 보면서 사과를 먹다가 말을 건넸지요. 그녀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고 했어요. 안타깝지만 그녀는 파리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내린다고 했어요. 그녀가 내려할 역에 도착해서 제가 짐을 내려주니까 저한테 인사를 하고 갔어요. 기차가 정차한 그 짧은 순간 엄청나게 갈등을 했어요. 따라 내릴까 말까. 시상식에 가야 하니까 귀국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내리면 그 시간에 도착을 못 하는데 어쩌나. 지금도 이름이 잊히지 않아요. 안느. 저의 더듬거리는 불어에도 다정한 눈길로 대화하던 눈빛과 표정이 잊히지 않아요. 떠나면서 프랑스 친구들에게 써놓은 편지의 문법이 맞는지 물어볼 때도 자상하게 한 문장 한 문장 다듬어주고. 그녀가 저한테는 불멸의 인연으로 남아 있어요.
「장도열차」라는 시를 쓸 무렵 그는 중국을 오래 여행하고 있었다. 란저우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지나친 역에서의 느낌을 메모해놓은 것이 바로 「장도열차」라는 시라고 한다. 그는 삼박 사일 동안 기차를 탔다. 딱딱한 침대가 있는 조금은 불편한 기차에서 그는 같은 객실에 있는 사람들과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먹을 것도 나눠먹었다. 그렇게 오던 중에 갑자기 철로 양편으로 세 시간 넘게 해바라기 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 아름다움이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그 이후에는 희미한 옛사랑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연함과 서글픔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는 너무나 반복된 풍경 속에 놓이면서 이상한 착란이 왔다. 눈동자가 그 샛노란 빛에 닳아버리는 감각 같은 것이 찾아왔었다. 그는 아름다움에 지는 사람이다.
5시 6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폼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 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장도열차」 부분(『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 2003)
그의 여행 산문집에는 순간과 풍경을 담은,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인적 없는 설원의 풍경이거나 샌드위치와 커피가 정갈하게 놓인 카페의 식탁, 그리고 식탁 아래에 있는 흰색 타일과 하늘색 타일이 뒤섞인 바닥, 누추한 역과 기차를 배경으로 흘러가는 사람의 흐린 형상, 무심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 창밖으로는 바다가 느리게 늠실거리고 창턱에는 오밀조밀한 인형들이 늘어서 있는 창틀, 수평선을 배경으로 수줍게 웃으며 백사장에 서 있는 연인, 아래에서 올려다본, 빛을 가득 담은 물푸레나무 잎들……. 그 고요와 정지의 순간들은 영원의 무늬이지 않을까.
그는 이제 이 주 이상의 긴 여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부모님께 불효를 많이 했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 옆에서 눈 마주쳐주고 손잡아 드리는 것으로 그것을 갚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외국에 나가서 살 거라고 했다. 아마 그것이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다고. 돌아오지 않는 여행. 딱히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을 마감하지 않을까 하는 예감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예감이 아니라 실행하는 날이 곳 올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고 했다. 그곳이 어디든 그가 초대해준다면(나에게는 프랑스의 어느 시골 기차역이 떠오른다) 그에게 엽서를 보내고 밤기차를 타고 찾아가고 싶다. 포도주와 양초만 있으면 그곳의 밤은 얼마나 달큼하고 포근할 것인가. 우리는 흐린 불빛에 비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떠나간, 떠나보낸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울 것이다.
이병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등과 산문집 『혼자가 혼자에게』 『내 옆에 있는 사람』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등을 냈다.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심장보다 높이』를 냈다. 신동엽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