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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겨울] 시인의 뿌리를 찾아서 - 김명인 편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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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르디 뻣센 바다에서 순하고 너그러운 바다로

 신철규

 

 

김명인 시인을 만난 것은 울진시외버스터미널이었다. 울진의 곳곳을 오가기 위해서는 차가 필요했고 점심 때 보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리 내려와 있어야 했다. 시인은 버스로 내려왔다. 다행히 약속 시간에 맞게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전화를 드렸더니 이미 와 계셨다. 버스가 예정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했던 것이다. 시인은 마스크를 쓰고 계셨다가 벗었는데 시인을 뵌 것이 족히 10년이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정정하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1년여 전 뇌일혈로 쓰러지셨다가 일어나셨다는 것을 전해 들었던 터라 고향 탐방을 요청드리기 조심스러웠지만 시인께서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감행한 답사 여행이었다. 울진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을 가지고 있는데 고향 마을인 후포는 북쪽에 있는 터미널에서 가자면 한참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바로 차로 이동을 했다. 차에서 가는 동안 후포에 관한 이야기부터 여쭈어보았다.

 

후포는 원래 ‘후리포’로 불렸어. 모르긴 몰라도 ‘후리 그물질’이 성행했던 곳이어서 붙인 이름일 거야. 후포(厚浦)라는 한자식 이름은 그 뒤에 붙여진 거고. 후리 그물질이 뭐냐 하면 바다에 그물을 둘러치고 그물의 양끝을 끌어당겨서 고기를 잡는 어로 방법인데, 나 어릴 때는 그것으로 물고기를 종종 잡곤 했어. 청어나 양미리, 멸치 같은 것이 어선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포구로 밀려들면 바닷물이 시커멓게 변할 정도로 떼를 지어 올 때가 있는데, 그러면 온 동네가 떠나가게 목청껏 고함을 지르거나 횃불을 들어 물고기가 들어온 것을 알렸지. 그럼 밭에서 호미 들고 괭이 들고 일하던 사람들도 포구로 몰려나와. 급하게 배를 띄워서 포구를 막아서 양쪽 편에 그물을 둘러치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그물 끝을 당기면, 그때는 남녀노소가 구분도 없이, 아이들의 조막손도 힘을 보태서 그물을 끌어올렸는데, 그물이 무거워지면서 물고기의 은빛 비늘이 펄떡이면서 빛나기 시작하는데 그게 장관이야. 그물의 묵직한 손맛은 지금도 생생해. 그물을 모아들이면 물고기를 삽으로 떠서 플라스틱 양동이에 담아서 넣어주면 양동이가 넘칠 만큼 들고 각자 집으로 갔지. 그날만큼은 온 동네가 비린내로 진동을 하고 잔치 아닌 집이 없었어.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후포로 이동하는 중에 시인은 불우한 가계의 내력을 풀어내셨다. 자세한 내력은 산문집 『소금바다로 가다』의 1부 ‘바다가 있는 풍경’에 실린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간추려서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삼율三栗(‘밤마을’ 세 개가 합쳐진 이름이다)의 ‘상밤투’에 있던 중석광산의 사택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때의 기억은 희미하다.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하밤투’에 있던 할머니의 집으로 합가合家를 한다. (상밤투와 하밤투를 가르는 것이 7번 국도이다. 그 당시에는 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만큼 좁은 흙길이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낳은 아들이 셋 있었는데 이 세 아들들이 모두 온전치 못한 삶을 살았다. 전쟁은 그의 가계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큰 숙부는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총살당하시고 삼척지구방위군 장교였던 작은 숙부는 포탄 파편에 맞아 돌아가신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일본으로 넘어가 염색 공장 일을 보셨는데 꽤 자수성가를 했던 모양이다.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서는 주석 광산 일을 맡아 하셨는데 사업 수완이 있어 살림을 넉넉하게 꾸렸으나 피난 시절을 거친 후 생계에 손을 놓게 된다.

 

열사의 조상을 갖지 못한 가계여,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저렇게 멍하니 서서 노려보는

소화 14년의 젊은 아버지,

희미한 사진 속의 긴 세월 가라앉아 건너오면서

광산의 덕대로, 쌀장수로, 마침내 그것도 놓아버리고

서른 해, 삶의 대목마다 흐릿하게 탈색된 채

이제는 손안에 잡혀서 떨려올 뿐인

― 「소화(昭和) 14년」

 

김명인의 시에서 아버지는 부재하거나 그늘 속에 있다. 아버지는 언제나 어둠으로 가려져 있거나 빈집처럼 허전한 존재로 그려진다. 아버지는 ‘빈집’을 끌고 가고 있으며 때로는 ‘빚’처럼 찾아들기도 한다. “일생을 어머니의 그늘에 묻혀 / 양지를 모르셨던 아버지”(「유적을 위하여」,  『물 건너는 사람』). 스스로를 유형流刑에 처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는 간간이 빚보증 때문에 빚을 집으로 가져오시기도 했다. 아버지가 지은 부채는 집에 빛을 가려서 어둠을 드리운다. “빛을 가렸던 부채는 식구들마다 조금씩 나누어가져서” “필생의 빚 끊임없이 살을 저며 나르던 달빛, / 풍파의 가계는 밤의 파도가 실어 출렁인다”(「유적에 적다」, 『푸른 강아지와 놀다』).

그리고 모질게 생계를 이어가신 어머니가 있다. 어머님은 열한 명의 자녀를 낳아 열 명을 성년으로 키워낼 만큼 억척이셨다. 하지만 생계와 육아를 동시에 짊어지기는 어려웠고 손을 놓은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에 뛰어드셨다. 하지만 살림이 펴진 적은 없었다. 포목 장사에서 쌀 장수로 업종이 바뀔 때마다 가산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집의 크기 또한 줄어들었다. 시인의 시에서 어머니는 무화과로 표상된다. 그것은 힘겨운 생계를 짊어지느라 안으로 곪아든 꽃이며 내부(로)의 상처이다. 아니, “늙도록 개화를 못하는 / 무화과, 벌 나비도 없이 제 스스로 씨방을 닫아 거는”(「무화과」 『푸른 강아지와 놀다』) 상처의 속꽃이다. 어머니는 1950년대 초 할머니와 합가를 할 무렵 신앙생활에 깊이 빠지기 시작해서 시어머니와 다툼이 잦았고 방해도 만만치 않으셨지만 끝내 시어머니를 굴복시키고 신앙심을 지켜낸다. 어머니는 후포로 가는 바닷가 언덕에 있는 교회에 다녔는데 어린 시인을 대동하는 때가 많았다. 시인은 교회 부속 유치원에 다니기도 했다. 그 교회는 명칭은 바뀌었을망정 후포고등학교에서 후포항으로 가는 포장길 왼쪽편 그 자리에 있다. 후포로 들어서면서 시인은 유년 시절에 본 후포의 해질 무렵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술회한다.

 

내 시에 유난하게 등장하는 풍경 중의 하나는 박모(薄暮)의 모습이다. 새벽같이 장사를 나가서, 해가 저물어야 돌아오시던 어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이 그런 풍경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일모(日暮)란 하루가 낮 동안 보존해왔던 사물들을 힘겹게 놓아버리는 시간이다. 장사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해가 저물어 마침내 사물의 윤곽이 지워지고, 그 사이의 경계에 번져 있던 선들이 거둬지고, 그리하여 풍경이 한 어둠에 파묻히기까지 오래오래 동구 밖을 지켜보았던 어린 시절이 내게는 있었다. 그때 내가 마주치곤 했던 환각은 캄캄해지도록 부스럭대다 접혀지는 사물들의 날갯짓이었다. 어둠 속으로 소리들도 함께 스러진다는 사실을 어린 나는 기다림이라는 실제로 체험했던 것이다.

 

유년 시절까지만 해도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리다가 초등학교 입학 무렵부터 기운 가세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어둑한 둘레의 시간’으로 명명한다. 절박함과 허기로 가득했던 시간이며, 한때는 어머니의 손에 의해 고아원에 맡겨질 만큼 가난으로 인한 외로움과 절망감 또한 극심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추위와 배고픔이 더 극심해진 경험으로 남게 된다. “어느 날 잠 깨니 개울물 소리는 / 일일이 내 머리칼마다 부딪치며 흘러” “움켜쥐면 손바닥엔 날카로운 / 얼음 조각이 잡혔다”(「안개―송천동 그해 그 모든 것들 속에서」, 『동두천』) 평론가 김현이 그의 초기 시에서 ‘고아 의식’을 읽어낸 것은 정확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공부는 곧잘 했었지만 성적은 들쭉날쭉했다. 전교 1등을 하면 중학교 입학 등록금을 면제해주는 제도가 있었지만 조금 못 미쳤던 것이다. 개학을 했지만 그는 한동안 등록금도 없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형과 함께 동네를 떠돌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동네를 지나가다 배회하던 형제를 본 형의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형제는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사실은 예전 후포고등학교가 세워질 무렵 아버지가 학교 부지에 들어갈 땅을 희사한 것을 담임선생님이 기억하고 있다가 학교 측에 알렸고 이에 대한 배려로 등록금을 면제해준 것이었다.

 

(후포초등학교 정면에서 찍은 정경. 학교 다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은 좀 떨어진 냇가에서 돌을 가지고 와 돌담을 쌓고 마룻바닥에 초칠을 한 것 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한번은 배가 고파서 학교 울타리로 넘어온 감나무 가지에 달린 감을 따먹었다가 주인 영감님께 혼이 나기도 했었다.)

 

우리는 후포초등학교와 후포고등학교를 둘러본 뒤 후포항으로 향했다. 항구는 예상했던 것보다 컸다. 어린 시절의 후포항은 포구의 왼편에 축대가 있었고 그것과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테트라포드를 쌓아 만든 방파제에 등대가 하나 있는 조그만 항구였다고 한다. 이제는 100여 미터 넘게 축대가 늘어나 제법 큰 항구가 되어 있었다. 그 많던 통통배도 다 사라지고 수십 톤짜리 어선도 드나드는 꽤 큰 항구가 된 것이다.

 

바닷가의 삶은 가난 그 자체였다. 그에게 고향의 다른 이름은 가난이었다. 그에게 고향은 꿈을 빼앗긴 사람들이 사는 곳이며 꿈을 허락하지 않는 족쇄와도 같았다. “앞날이 아득하고 막막할 때마다 눈높이에 걸려 출렁거리는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내가 키웠던 상념들은 저 경계를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끊임없이 충동질하는 탈출에의 욕망이었던 것이다.”(「우연과 필연」, 72~73쪽) 시인의 눈에 바다에 깃든 삶은 낚시에 물린 고기와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죽은 사람들과 떠난 사람들, 그리고 실패해서 돌아온 사람들과 돌아와서 실패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거나 “몸을 버린 사람들”( 「안개 바다」)이었다. 그에게 고향 마을은 꿈이 막힌 땅이며 꿈꿀 수 없는 척박한 땅이기도 했다. 지독한 허기와 답답한 갈증, 뼈저린 외로움과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향을 버려야 했다. 그것은 바다를 등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가 홀로 웅크린 곳은 어디든지 절벽 같은 파도의 끝.” “다시 안개를 쫓아 바다를 등지고 떠나고 있었다.”(「안개 바다」, 『동두천』)

김명인의 첫 시집 『동두천』에는 바다를 수식하는 말로 “푸르디 뻗센(뻣센)”이라는 말이 자주 반복되는데, 푸름은 바다의 광활함과 깊이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뻣셈이라는 차단과 단단함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지점이 흥미롭다. 바다의 열려 있음과 심오함은 오히려 시인에게 막막한 벽으로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바다는 육지의 끝, 다시 말해 사람이 더 나아갈 수 없는 한계 지점이라기보다는 고개를 넘어 내륙으로 갈 수 있는 발을 묶어 매는 구속의 표상이다. 포구 앞바다에 내리는 황혼의 이미지는 죽음을 동반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황천(荒天)’과 같다. 이러한 이미지와 함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지독한 안개가 있다. 그것은 파도의 끝에서 피어나는 물의 장막 또는 물의 감옥(남진우)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웅크리고 있으면서 언제나 시인을 덮쳐올 것 같은 매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음험한 존재로 그려진다. “욕심의 / 갈고리를 하고 안개가 / 바다 쪽에서 끊임없이 우리들을 끌어당겼다.”(「안개 바다」) 시인에게 안개에 쌓인 바다는 불투명한 미래와 자신을 옥죄는 답답한 현실을 표상한다. 또한 그것을 뚫고 지나가거나 넘어서야만 고향에 닿거나 떠날 수 있기에 ‘더러운 사무침’ 또는 ‘더러운 그리움’(「영동행각 IV」)을 동반한다. 떠나는 길은 안개에 싸여 있거나 안개가 길을 끊고 있다. “잡목 사이로 하늘은 갰다 흐렸다 / 그리고 내 길은 / 절반 더 산안개에 묻혀 있다”(「영동행각 III」, 『동두천』)

바다를 등졌다고 할 만큼 그는 바다에 대한 증오와 환멸이 강하게 배어 있었지 않나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시인의 생각과는 결이 다르다.

 

바다는 생존과 직결된 공간이지. 바다를 등졌다는 것은 바다와 연결된 삶이 끝났다는 뜻이지 그것을 버리겠다는 뜻은 아니야. 바다에 기댄 삶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거기에는 있는 거야. 완전히 바다에 투신해서, 원양어선이라도 타서 바다에 녹아든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내 삶의 경로는 그것과는 다른 방향을 가게 된 것이지. 바다는 호불호 이전에 나에겐 하나의 원형(原型)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바다에 기댄 삶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은 있지만 바다와 끊어진 삶을 상상하기는 힘들어.

 

그의 중고등학교 시절 또한 가난으로 제대로 된 학업이 불가능했다.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뒤늦게 입학을 하면서 공부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심지어 학교에 가지 않는 날도 많았고 그럴 때면 바닷가에 나와 방파제에서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잡거나 헤엄을 치면서 소일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무렵 하나의 원체험으로 남아 있는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나간 경험을 하게 된다. 학업을 뒷받침할 형편이 못 되는 가계에 대한 원망과 함께 동급생들에 비해 뒤처진 학업을 복구할 의지마저도 놓게 되면서 하게 된 나름의 선택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업을 해서라도 무너진 가계를 일으켜보자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큰 마음을 먹고 나간 바다였지만 출항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실신한다.

 

멀미가 심해 낚시는커녕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기절하다시피 쓰러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튿날 아침이었고 이미 배는 조업을 마치고 항구로 향하고 있었지. 항구에 가까운 곳에서만 배를 타보았지, 먼 바다에 나가는 배를 타본 것도 처음이었고 원체 멀미가 심한 체질이기도 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지. 통통배라 하더라도 네 시간은 족히 타고 가야 했으니 항구에서는 꽤 먼 거리였을 거야. 죽는 줄 알았지. 심지어 그때 누가 들어서 바다에 던져도 괜찮다 싶을 정도로 괴로웠으니까.

 

바다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 두 마장도 가기 전에 버스에서 내려야 할 만큼 심한 멀미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바다는 원래 험난한 곳이었다. 어린 시절, 양미리 잡으러 나간 배 몇 척이 졸지에 한꺼번에 뒤집혀졌는데, 선원 두어 명만 헤엄쳐서 겨우 살아남고 나머지는 물 밑 바위틈에 끼었는지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동네에 줄초상이 난 것이다. 동네에는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많았다.

멀미 때문에 배를 탈 수도 없고 농토도 없어 농사를 짓기도 힘들었던 상황에서 시인이 선택한 것은 공부와 상급 학교 진학이었다. 밑천이 없어서 장사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만이 고향과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지. 해발 1,000미터 가까운 산들이 길을 막고 있었는데 공부를 해야만 길이 열리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마음을 먹고 늦게까지 교실에 혼자 남아 공부를 했는데 시골 학교라 공부에 전념하는 학생이 많지 않아서 성적이 금방 올라갔다. 전 학년 다 합쳐도 300명이 되지 않는 작은 학교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고향집에 놀러 온 이종사촌을 따라 서울에 있는 이모님 댁으로 올라간다. 시골 학교에서는 제대로 된 진학 공부를 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감행한 일이었다. 단칸방에 살던 가난한 이모님 댁에 신세를 지는 것은 민망한 일이었지만, 그만큼 열망이 강했던 것이기도 하다.

전철을 탈 돈이 없어서 한참을 걸어 종로도서관에 나가서 공부를 했다. 의대에 지원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자신의 성적이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조금은 무리한 지원일 것이었다. 아직은 날씨가 매섭게 추운 2월이었다. 입시에 낙방하고 나서 서울 지리도 모른 채 무작정 거리를 걸어 나온 곳이 한강변이었다. 강물은 시퍼렇게 흐르고 날도 추워서 집에 돌아와 짐을 꾸려서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마침 후기 시험이 있는 학교가 있으니 지원해보라는 이모부의 간곡한 요청에 마음을 돌려 시험을 봤고 운이 좋게 합격을 하게 된다. 시험 결과도 보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와 있는데, 농업을 가르치셨던 담임선생님께서 찾아오셔서 신문 호외지에 난 이름이 네가 맞냐며 합격 소식을 알린 것이다. 합격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서러움의 눈물을 오래 흘렸다. 사흘 밤낮을 밥도 먹지 않고 울다가 자다가 했다. 어렵게 입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형편에 대한 원통함이 뒤늦게 북받쳤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려대 국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쌀장수를 하시던 어머니가 어렵게 입학금을 마련한다. 입학금이 17,000원이었고 신발이 다 해져서 4,000원짜리 구두를 하나 사 신으니 수중에 남은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고단한 고학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실제로 입학 수속을 밟고 싶은 마음보다도 재수를 할 생각이 컸지만 힘들게 돈을 마련하신 어머니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어 등록을 하고 억지로 학교를 다녔다. 피 같은 그 돈을 다른 데 쓸 수는 없어 등록을 하기는 했지만, 학과 공부에도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다가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학과 공부에 열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공부를 열심히 한 이유는 마땅한 용돈벌이가 없는 상황에서 장학금이라도 벌어서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1학년 국어 작문을 조지훈 선생님께서 가르치셨는데 낙제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2학년 시론 수업도 선생께서 맡으셨는데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다. 근데 기말과제가 시 두 편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이론적인 비평 글이야 곧잘 쓰기도 했지만 시 쓰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되든 안 되든 자신이 수업 시간에 배운 시인들의 시를 모방하면서 시를 써서 제출했다. 하지만 학기가 끝나고서도 그는 계속 시를 썼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시를 앓았다. 시를 더 알고 싶어 앓았고 다 모를 때까지 앓고 싶었다. 그는 절박하게 시에 매달렸고, 자신이 살아낸 삶의 절박함을 시에 옮겨놓기 위해 애썼다. 이때부터 부끄러운 습작을 들고 지훈 선생님의 댁을 드나들며 사숙한다.

 

조지훈 선생님은 크고 높으셨지. 스승을 뵐 때마다 나는 한참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느낌이 강했어. 스승은 이미 시에서든 학문에서든 아득히 높은 곳에 계셨고 나는 이제 갓 문학에 입문한 초년생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스승은 다정함이나 무서움 같은 감정보다는 나 스스로를 단정한 몸가짐으로 엄격하게 다스려야만 하는 마음이 앞섰지. 선생님은 별말씀 없이 가지고 간 시에다 파란 만년필로 첨삭을 해주신 정도였지만 그것이 내게 큰 공부였지. 꼭 고쳐야 할 말들만 고쳐서 돌려주셨어. 시에 어울리는 말과 대상에 부합하는 표현을 스스로 찾아보라는 뜻이었을 거야. 오래 말씀을 나눠본 것은 신춘문예 심사가 끝난 1967년 늦은 12월이었을 거야. 마침 그해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응모를 했었는데 심사위원이 조지훈 선생님이셨던 것 같아. 일부러 댁에 부르셔서 갔었는데 차를 한 잔 내려주시면서 처음 본 작품을 읽어주셨지. 그 작품이 바로 그 이듬해인 1968년 1월 1일에 발표되는 당선작, 바로 마종하 시인의 시 「겨울 행진」이었어. 그때도 짐작이 안 된 바는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신춘문예에 낙방한 것에 섭섭해할까 봐 당선작을 미리 알려주면서 내 시가 당선작에 못 미치는 부분을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 같아. 마침 선생님 돌아가시기 한 해 전이었어.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은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청년의 모습보다는 그 당시의 문단에서의 위치나 학식, 시력詩歷 등에서 중후하고 완숙한 대가大家의 풍모로 남아 있어. 여러 스승을 뵙고 거쳐왔지만, 지훈 선생님만큼 큰 어른으로 각인된 분은 없을 정도로 나에겐 유일한 스승이라고 지금까지 마음에 품고 있어.

 

 

그가 조지훈 선생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돌아가시던 해인 1968년 2월이었다. 학교 선배인 오탁번 시인과 찾아뵈었던 것인데 돈을 모아 ‘도라지 위스키’를 사 갔다고 한다. 선생님의 병환이 위중한 줄도 모르고 술을 들고 찾아간 것이 못내 죄송스럽고 좋은 술도 못 사 간 자신의 무례함이 못내 부끄럽다고 시인은 술회한다.

그는 등단 후에 한동안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무잡한’ 시들을 써서 발표했다고 한다. 언어의 세공에 힘쓰면서 현실과는 거리를 둔 아름다움을 좇았다. 하지만 이런 시가 나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가 강하게 찾아왔다. 그는 형해形骸와 같은 언어를 벗어나 체험의 직접성과 구체성, 그로 인한 생생한 감동을 찾고 싶었다. 그러던 중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모여 결성한 동인이 바로 ‘반시’이다. 동인지『반시』 창간호의 선언문은 시인이 초안을 작성하고 다른 동인들이 수락하면서 큰 수정 없이 실리게 된다. 창간호는 그 당시 3,000부를 찍었는데 절판이 되기도 할 만큼 문단 각계의 비상한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창간호 선언문에는 시의 각오와 시인의 운명에 대한 그 당시 시인의 생각이 오롯이 담겨 있다. ‘반시’의 모토는 ‘삶과 시의 동일성’과 ‘사람살이의 실천적 구체성’이었다.

 

우리가 옹호하는 시는 언제나 삶의 문제에 귀일하는 것이고, 시의 바탕은 삶과 동일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므로, 우리의 시는 잊혀 져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개성과 자유의 참모습을 되찾아 내어 그것을 사랑의 위치로 환원시키는 일이며, 다수의 삶이 누려야 할 다양성을 옹호하는 일이다. 아울러 우리의 시는 민중의 애환을 함께하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찢겨버린 조국의 아픈 상처와 비장감을 어루만지는 데에 있다. 또한 우리의 시는 모든 관계의 이질감으로부터 동질감을 획득하는 데에 있고, 시인과 시인 아닌 자의 구분을 지양하는 데에 있다.

— 『반시』창간호 ‘선언문’에서

 

 

첫 시집 『동두천』에 실린 시들은 거의 대부분 ‘반시’ 동인을 함께한 이후의 시들로만 묶여 있으며 대표적인 것이 「동두천」 연작과 「영동행각」 연작이다. 이 시집에는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절망감과 정치적 현실에 대한 거부감이 동시에 드러난다. 이는 부정적 현실에 의한 상처를 세심하게 기록하면서 어둡고 불안한 현실의 출구 없음을 바라보는 객관적 인식으로 표출된다. 현실을 수용하지도 못하고 정면으로 저항하지도 못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반성적 자의식과 비극적 감정은 ‘더러운 그리움’, ‘고단한 외로움’이라는 구문으로 집약되며, 허무의식과 폐허의식은 현재를 막막한 어둠으로, 미래를 희망 없는, 부질없고 막막한 ‘내일’로 인 식하게 하는 비극적 세계관으로 귀결된다. 고아나 혼혈아처럼 뿌리 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아이들, 겨울이라는 계절적 배경, 실존의 궁핍함과 답답함을 표상하는 막막한 어둠이 자주 보인다. 그의 시의 특색은 삶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며, 미래 역시 밝은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비극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후포항을 떠나 해변도로를 따라 울진의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맑은 샘이 있었던, 그래서 동네 아낙들의 빨래터였던 ‘물치’도 지나면 오른쪽으로는 망망한 대해가 펼쳐졌고 도로 왼편으로는 간간이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의 큰 숙부와 작은 숙부가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 한 해변과 바다를 지나가기도 했다. 바람은 잔잔했지만, 파도는 간간이 높아지기도 했다. 월송정 근처 해변에 있는, 그가 자주 갔던 낚시 포인트에 잠시 들러 사진을 찍었다. 그가 장년이었고 딸들이 초등학생일 무렵 여름방학이면 그 해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시인은 낚시를 하거나 물고기를 잡고 아이들은 해변에서 조개를 잡거나 모래사장에 낙서를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밤이면 모래사장 위에 텐트도 없이 돗자리를 깔고 모기에 물어뜯기면서 잤다. 밤하늘의 은하수와 이마받이를 하면서.

 

 

(월송정. 월송정은 독특하게 넘을 월越과 소나무 송松을 써서 소나무밭 너머에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정자에서 멀리 보이는 바닷가 쪽에 낚시 포인트와 해변이 있다.)

 

그는 힘들 때마다, 삶에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바다를 찾았다. 아니, 바다를 떠나서 도회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간절하게 바다를 원했다. 마침 어머니께서 기도원을 월송정 근처 마을에 세워서 그는 방학 때마다 거기 내려와 살았다. 글도 쓰고 공부도 하고 낚시도 하고 산책도 했다. 우리는 망양정에 들러 먼 바다에 눈을 잠시 두었다가 울진대종으로 향했다. 2006년 울진대종은 경주의 에밀레종에 버금가는 대종을 만들기 위해 울진군에서 의욕적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울진 출신인 김명인 시인께 대종에 새길 시를 부탁하게 된다.

 

대종까지 보았을 때 동해엔 여린 낙조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 있는 보부상 주막촌으로 향했다. 내륙으로 가는 길은 왼쪽에 천을 낀 구불구불한 국도였다. 이 길을 따라 보부상 또는 바지게꾼들이 울진에서 잡아서 말린 오징어, 조기 등을 등짐에 싣고 열두 고개(십이령)를 넘어 안동이나 영주에 팔러 다녔다. 보부상 주막촌은 열두 고개를 넘기 전 요기도 하고 봉놋방에서 쪽잠이라도 청했던 옛 주막을 복원한 것이다. 깊은 골짜기로 들어서면서 해거름이 짙어졌다. 과거의 시간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시인은 할머니가 어린 시절 들려준 나무꾼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셨다. 그러고는 장사를 나가신 어머니 대신 할머니가 자신을 맡아서 돌볼 적 이야기도 해주셨다. 다 큰 자식을 둘이나 먼저 보내고 내적 응어리를 품은 채 남은 삶을 버텨야 했던 할머니. 어린 손자를 뒷산 큰 밭 나무 그늘 아래 묶어두고 김을 매시거나 하루 종일 점심도 안 먹고 밭일을 하셨다. 밭일을 하시면서 했던 넋두리는 죽은 자식들의 이름과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 대한 한탄이 주조를 이루었다. 저물녘 어린 손자를 업고 내려오면서도 그 넋두리는 그치지 않았는데 간혹 그 넋두리의 긴 레퍼토리 속에는 손자의 이름도 섞여 있곤 했다. 신산한 삶에 대한 쓸쓸함의 정서가 시인 속에 내장된 것은 이러한 경험도 일정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두천은 작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마을인데, 저녁때인지 몇몇 집의 굴뚝에서는 희고 소담스러운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주막촌 입구 쪽에 시인의 시「너와집 한 채」를 새긴 시비가 있었다.

이 시에 나오는 강원남도는 지명에 없는 곳이다. 그는 실제로 태어날 때는 강원도 소속이었었지만 울진군이 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63년 행정구역상 경상북도에 속하는 것으로 변경된다. 이 시는 일견 이 세상에 없는 장소에 깃들어 사는 낭만적인 상상이 담긴 작품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내게는 식솔을 거두면서 살아야 하는 가장의 무게와 책임감, 그리고 수렁과 같은 현실로 발길을 되돌려야 하는 자신을 다독이는 시로 보인다.

첫 시집 『동두천』을 내고 나서 시인은 7, 8년 정도 시를 쓰지 못하게 된다. “첫 시집의 주제이기도 했던 펼쳐야 할 사랑과 접히는 마음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시를 포기할까 고뇌하던 시기였다.”(「우연과 필연」, 75쪽) 경기대학교 재직 시절 초청 강연으로 모신 황동규 시인께서 지나가는 말로 “김 선생, 지금 시를 안 쓰면 결국 놓아버리게 될 거요”라 조심스럽게 다그쳤는데 시인에게 가슴 아프게 박힌다. 그는 다시 시를 붙잡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의 쓰라린 삶, 덧난 상처들과 화해하려고 했으며 그 삶 속에서 시를 건져내려고 애썼다. 그는 상처의 힘으로 시를 썼고 상처가 나아가는 자리의 환함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없는 마음속 지도를 찾는 길과 다름없었다. 지워진 길 또는 마음속에 가라앉은 길은 이 세계의 유적과 허방들을 건너야만 이를 수 있었다. 그의 시의 언어는 이제부터 안쪽으로 휘도는 내향성의 소용돌이로 변모한다. 그는 허방처럼 빠져드는 삶, 삶의 물목마다 놓인 허방들을 넘어 마음 놓고 거주할 집, 마음의 집을 짓고 싶었다. “그러므로 모든 아름다운 별들의 길이 지도 위에/지워져 있듯/우리가 진정 기억하는 것은 어느 지도 위에도 없다.”(「여강」, 『물 건너는 사람』) 하지만 빈집엔 머무를 수 없고 빈집은 떠남을 재촉한다. 그가 사막(숲)과 모래를 바다(호수)와 물을 끌고 와서 바라보는 시선에는 가없이 밀려오고 쓸려가는 파도처럼 반복되는 허기와 모래처럼 힘없이 허물어져버리는 희망에 대 한 생각이 깔려 있다. 시인은 여덟 번째 시집 『파문』을 상재할 무렵 자신의 시 쓰기의 행로를 이렇게 고백한다. “내 시는 결국 실존의 지평을 확인하기 위해 마음의 목측目測으로 등고선을 긋고 삶의 변경들을 잇대놓은 신산스러운 자기 확인의 지형도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 지도는 계속 그려졌지만, 아직도 완성된 부분이 없다.”(「우연과 필연」, 76쪽)

 

우리는 차를 돌려 저녁을 먹기 위해 죽변항으로 향했다. 어둠이 짙어진 도로 옆으로 낮은 산등성이들과 작은 마을들을 지나쳐 갔다. 2022년 3월, 울진군을 뒤덮은 산불 때문에 곳곳에 보이는 산들이 붉은 흙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무들을 가지런히 심어두기는 했지만, 빈자리가 휑한 곳도 없지 않았다. 시인은 짙어져 오는 어둠과 전조등에 드러난 구불구불한 길들을 묵묵히 보고 있었다. 그는 작년에 뇌일혈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다. 마침 미국에 살고 있는 큰딸이 집에 와 있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한 위기를 넘긴 것이다. 급하게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아 큰 탈은 없었지만 어지러움 때문에 일주일을 꼬박 누워서 보냈다. 그때 그는 심각한 섬망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기차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자신은 바다 끝 벼랑에 서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안위를 점검하기 위해 찾아온 간호사가 딸과 나누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경계에 그는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올해 여름 시력 50년을 맞이하는 열세 번째 시집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를 펴냈다. 이 시집은 ‘딴 세상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아득한 삶의 경이를 담아낸 시들로 가득하다. 낯선 세상의 신비와 생생한 외로움으로 흘려보내는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에게 느리게 지나가는 하루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짧지만 긴 여정이 잦아들고 있었다.

 

 

김명인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동두천』, 『물 건너는 사람』, 『푸른 강아지와 놀다』, 『바다의 아코디언』,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 등의 시집과 시선집『따뜻한 적막』을 냈다.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심장보다 높이』를 냈다. 신동엽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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