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천연색의 세상에서 일색一色의 경지로
이숭원
「일색과후一色過後」는 대립과 차별을 떠난 궁극의 세계를 뜻한다. 이 작품을 수록한 몇 개 시집에 제목의 뜻풀이가 있는데, 그중 『아득한 성자』(2007)의 풀이가 가장 자세하다. “모든 대립을 초월하고 차별을 떠난 일체 평등의 궁극의 세계. 한 뿌리의 풀, 한 송이의 꽃 무엇을 보아도 중도中道의 이치를 나타내지 않은 것이 없으며, 무엇을 보아도 부처가 아닌 것이 없는 세계. 깨달음까지도 버린 무작묘용無作妙用의 세계. 여기서는 오욕락으로 가득한 현실에 젖었다가 청정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일색一色’이란 말은 ‘불이不二’라는 말과 함께 중국 선종에서 많이 사용한 용어다. 10세기경 조동종의 승려 동안상찰同安常察 선사가 지은 게송 「십현담十玄談」은 깨달음의 단계를 열 개로 나누고 각 층위의 제목을 붙였다. 그중 마지막 단계가 ‘일색’이다. 「십현담」에 주석을 단 매월당 김시습은 ‘일색’이 판본에 따라 ‘정위전正位前’ 또는 ‘일색과후’로 나타난다고 했다. 첫 번째 ‘심인心印’에서 열 번째 ‘일색’에 이르는 각 단계는 순환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일색’은 첫 단계인 ‘심인’으로 이어진다. 대립을 떠난 궁극 의 세계인 ‘일색’은 결국 깨달음의 본원인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이므로, ‘일색’을 ‘일색과후’, 즉 ‘일색을 지난 자리’라고 해도 의미는 같다. 깨달음에 이른 후 다시 중생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대승불교의 흐름을 생각하면 ‘일색과후’라는 말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조오현의 첫 시집 『심우도』(1979)에는 위의 시와는 다른 「일색과후」 연작시 다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두 번째 시집 『산에 사는 날에』(2001)에는 「일색과후」 연작시 다섯 편은 빠지고, 위의 시 「일색과후」가 새로운 작품으로 수록되었다. 만악문도회에서 만든 세 번째 시집 『만악가타집』(2002)에는 「일색과후」 연작시 다섯 편이 「1970년 방문榜文」으로 제목이 바뀌어 여덟 편의 연작시로 재수록되었고, 『산에 사는 날에』의 「일색과후」는 제목 그대로 재수록되었다. 어려운 한자어 제목을 우리말로 많이 바꾼 『아득한 성자』(2007)에도 이 제목으로 실려 있으니, 이 시의 제목은 「일색과후」로 확정하면 될 것 같다.
시의 내용은 제목의 어려운 뜻과는 달리 그리 어렵지 않다. 무산스님의 산중 생활을 자연스럽고 담백하게 서술했다. 전반부는 과거의 일이고 후반부는 현재 상황이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와 디딜방아를 찧고 장작도 패는 행자 생활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고달픈 과거사를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다음에는 때때로 새 울음소리를 듣는다는 말로 산중 수도 생활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일상의 일을 서술한 듯한 “때때로 숲에 숨었을/ 새 울음소리 듣는 일이었다”라는 시행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산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평범하고 흔한 일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숲에 숨었을/ 새 울음소리”라는 표현을 했다. 새가 산에 숨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시구는 ‘새’와 ‘울음소리’를 묘하게 연결 지어 마치 ‘새 울음소리’가 숲에 숨어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이것은 우리가 현상적으로 듣는 새 울음소리는 참된 것이 아니며 진짜 새 울음소리는 숲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때때로’ 새 울음소리를 듣는다고 했으니 진정한 새 울음소리를 듣는 일이 드물게 일어난다는 뜻을 전한다. 수도승으로 수행하는 과정에 숲에서 울려오는 진정한 새 울음소리를 드물게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린 행자 스님은 이제 주위의 인정을 받는 중요한 자리에 이르렀다. 사십 년 동안 수도 정진하여 많은 제자도 길렀다. 개인적으로는 시인으로 이름을 날려 독특한 시풍의 선 시조를 쓰는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시인 자신은 자기 위상을 부정하고 있다. “산에 살면서/ 산도 못 보고” “새 울음소리는커녕/ 내 울음도 못 듣는다”라고 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때때로 숲에 숨었을/ 새 울음소리 듣는” 수준보다 못한 상태다. 시인이 기대하는 정신의 위계가 더 상승하고 깨달음의 시야가 확대되어 일상의 기틀을 타파한 상태에 이르니, 현상 너머의 실체를 파악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산의 실체가 무엇인지, 새 울음소리의 실체가 무엇인지, 대상을 인식하는 나의 실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나와 너의 상대성을 넘어 선 ‘일색’의 경지가 펼쳐져야 하는데, 아직 거기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작정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때때로 내가 사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혼자 탄식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자기 삶에 대해 한마디 말도 못 남기고 덧없이 세상을 떠난다. 자신의 본마음이 무엇인지, 자신을 괴롭힌 희로애락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 채 세상을 하직한다. 「적멸을 위하여」 에 나온 것처럼 “삶의 즐거움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라고 질문을 던져도 할 말이 없다. 산에 살면서 산도 못 보고 새 울음소리는커녕 내 울음도 못 듣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그것이 문제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생사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면 세속의 틀에 박힌 진부한 사유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 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한 발을 새로 내딛는 사고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산의 모습, 진정한 새 울음소리, 자기 내면의 진정한 소리를 들으려면 주체와 객체가 하나로 통합되는 ‘일색’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나와 너, 인간과 자연, 선과 악, 중생과 부처 등 이분법적 차별을 넘어선 절대 평등의 자리를 ‘일색’이라고 한다. 모든 인위적 현상은 영원하지 않으며 그 현상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 ‘일색’의 자리에 이를 수 있다. 이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불교에서는 한 마디로 공空이라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현상을 보는 나 자신도 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나 자신이 실체가 없다니!
이 통찰은 지식으로 되는 일도 아니고 노동으로 되는 일도 아니며 수행 정진을 통한 깨달음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 길을 일러 준 분은 역사시대에 오직 한 사람 고타마 싯다르타, 석가모니 부처뿐이다. 그러니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고의 대전환을 이루는 수행을 계속할 도리밖에 없다.

이숭원
1986년 『한국문학』으로 데뷔.
저서로 『작품으로 읽는 한국 현대시사』 『시 읽는 마음』 『백석 시, 백 편』 『동주 시, 백 편』 등이 있다.
총천연색의 세상에서 일색一色의 경지로
이숭원
「일색과후一色過後」는 대립과 차별을 떠난 궁극의 세계를 뜻한다. 이 작품을 수록한 몇 개 시집에 제목의 뜻풀이가 있는데, 그중 『아득한 성자』(2007)의 풀이가 가장 자세하다. “모든 대립을 초월하고 차별을 떠난 일체 평등의 궁극의 세계. 한 뿌리의 풀, 한 송이의 꽃 무엇을 보아도 중도中道의 이치를 나타내지 않은 것이 없으며, 무엇을 보아도 부처가 아닌 것이 없는 세계. 깨달음까지도 버린 무작묘용無作妙用의 세계. 여기서는 오욕락으로 가득한 현실에 젖었다가 청정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일색一色’이란 말은 ‘불이不二’라는 말과 함께 중국 선종에서 많이 사용한 용어다. 10세기경 조동종의 승려 동안상찰同安常察 선사가 지은 게송 「십현담十玄談」은 깨달음의 단계를 열 개로 나누고 각 층위의 제목을 붙였다. 그중 마지막 단계가 ‘일색’이다. 「십현담」에 주석을 단 매월당 김시습은 ‘일색’이 판본에 따라 ‘정위전正位前’ 또는 ‘일색과후’로 나타난다고 했다. 첫 번째 ‘심인心印’에서 열 번째 ‘일색’에 이르는 각 단계는 순환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일색’은 첫 단계인 ‘심인’으로 이어진다. 대립을 떠난 궁극 의 세계인 ‘일색’은 결국 깨달음의 본원인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이므로, ‘일색’을 ‘일색과후’, 즉 ‘일색을 지난 자리’라고 해도 의미는 같다. 깨달음에 이른 후 다시 중생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대승불교의 흐름을 생각하면 ‘일색과후’라는 말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조오현의 첫 시집 『심우도』(1979)에는 위의 시와는 다른 「일색과후」 연작시 다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두 번째 시집 『산에 사는 날에』(2001)에는 「일색과후」 연작시 다섯 편은 빠지고, 위의 시 「일색과후」가 새로운 작품으로 수록되었다. 만악문도회에서 만든 세 번째 시집 『만악가타집』(2002)에는 「일색과후」 연작시 다섯 편이 「1970년 방문榜文」으로 제목이 바뀌어 여덟 편의 연작시로 재수록되었고, 『산에 사는 날에』의 「일색과후」는 제목 그대로 재수록되었다. 어려운 한자어 제목을 우리말로 많이 바꾼 『아득한 성자』(2007)에도 이 제목으로 실려 있으니, 이 시의 제목은 「일색과후」로 확정하면 될 것 같다.
시의 내용은 제목의 어려운 뜻과는 달리 그리 어렵지 않다. 무산스님의 산중 생활을 자연스럽고 담백하게 서술했다. 전반부는 과거의 일이고 후반부는 현재 상황이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와 디딜방아를 찧고 장작도 패는 행자 생활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고달픈 과거사를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다음에는 때때로 새 울음소리를 듣는다는 말로 산중 수도 생활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일상의 일을 서술한 듯한 “때때로 숲에 숨었을/ 새 울음소리 듣는 일이었다”라는 시행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산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평범하고 흔한 일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숲에 숨었을/ 새 울음소리”라는 표현을 했다. 새가 산에 숨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시구는 ‘새’와 ‘울음소리’를 묘하게 연결 지어 마치 ‘새 울음소리’가 숲에 숨어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이것은 우리가 현상적으로 듣는 새 울음소리는 참된 것이 아니며 진짜 새 울음소리는 숲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때때로’ 새 울음소리를 듣는다고 했으니 진정한 새 울음소리를 듣는 일이 드물게 일어난다는 뜻을 전한다. 수도승으로 수행하는 과정에 숲에서 울려오는 진정한 새 울음소리를 드물게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린 행자 스님은 이제 주위의 인정을 받는 중요한 자리에 이르렀다. 사십 년 동안 수도 정진하여 많은 제자도 길렀다. 개인적으로는 시인으로 이름을 날려 독특한 시풍의 선 시조를 쓰는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시인 자신은 자기 위상을 부정하고 있다. “산에 살면서/ 산도 못 보고” “새 울음소리는커녕/ 내 울음도 못 듣는다”라고 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때때로 숲에 숨었을/ 새 울음소리 듣는” 수준보다 못한 상태다. 시인이 기대하는 정신의 위계가 더 상승하고 깨달음의 시야가 확대되어 일상의 기틀을 타파한 상태에 이르니, 현상 너머의 실체를 파악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산의 실체가 무엇인지, 새 울음소리의 실체가 무엇인지, 대상을 인식하는 나의 실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나와 너의 상대성을 넘어 선 ‘일색’의 경지가 펼쳐져야 하는데, 아직 거기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작정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때때로 내가 사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혼자 탄식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자기 삶에 대해 한마디 말도 못 남기고 덧없이 세상을 떠난다. 자신의 본마음이 무엇인지, 자신을 괴롭힌 희로애락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 채 세상을 하직한다. 「적멸을 위하여」 에 나온 것처럼 “삶의 즐거움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라고 질문을 던져도 할 말이 없다. 산에 살면서 산도 못 보고 새 울음소리는커녕 내 울음도 못 듣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그것이 문제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생사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면 세속의 틀에 박힌 진부한 사유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 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한 발을 새로 내딛는 사고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산의 모습, 진정한 새 울음소리, 자기 내면의 진정한 소리를 들으려면 주체와 객체가 하나로 통합되는 ‘일색’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나와 너, 인간과 자연, 선과 악, 중생과 부처 등 이분법적 차별을 넘어선 절대 평등의 자리를 ‘일색’이라고 한다. 모든 인위적 현상은 영원하지 않으며 그 현상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 ‘일색’의 자리에 이를 수 있다. 이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불교에서는 한 마디로 공空이라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현상을 보는 나 자신도 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나 자신이 실체가 없다니!
이 통찰은 지식으로 되는 일도 아니고 노동으로 되는 일도 아니며 수행 정진을 통한 깨달음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 길을 일러 준 분은 역사시대에 오직 한 사람 고타마 싯다르타, 석가모니 부처뿐이다. 그러니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고의 대전환을 이루는 수행을 계속할 도리밖에 없다.
이숭원
1986년 『한국문학』으로 데뷔.
저서로 『작품으로 읽는 한국 현대시사』 『시 읽는 마음』 『백석 시, 백 편』 『동주 시, 백 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