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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겨울] 다시 읽는 만해 한용운 - 「나는 왜 승僧이 되었나?」

2025-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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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출의 동기


나는 왜 승僧이 되었나? 내가 태어난 이 나라와 사회가 나를 승이 되지 아니치 못하게 하였던가. 또는 인간 세계의 생사병고 같은 모든 괴로움이 나를 시켜 승방僧房에 몰아넣고서 영생과 탈속脫俗을 속삭이게 하였던가. 대체 나는 왜 승이 되었나? 승이 되어 가지고 무엇을 하였나? 또 무엇을 얻었나? 그래서 인생과 사회와 시대에 대하여 어떠한 도움을 하여왔나? 이제 위승爲僧이 된 지 삼십 년에 출가의 동기와 그동안의 파란波瀾과 현재의 심경을 생각하여 볼 때에 스스로 일맥一脈의 감회가 가슴을 덮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나의 고향은 충남 홍주洪州였다. 지금은 세대가 변하여 고을 이름조차 홍성洪城으로 변하였으나 그때 나는 이런 소년의 몸으로 선친先親에게서 나의 일생 운명을 결정할 만한 중요한 교훈을 받았었으니, 그는 국가 사회를 위하여 일신을 바치는 옛날 의인들의 행적이었다. 그래서 마냥 선친은 스스로 그러한 종류의 서책을 보시다가도 무슨 감회가 계신지 조석으로 나를 불러다 세우고 옛사람의 전기傳記를 가르쳐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사상史上에 빛나는 그분들의 기개와 사상을 숭배하는 마음이 생기어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보나 하는 것을 늘 생각하여 왔다. 그러자 그해가 갑진년 전前해로 대세大勢의 초석礎石이 처음으로 기울기 시작하여서 서울서는 무슨 조약이 체결되어 뜻있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경성을 향하여 모여든다는 말이 들리었다. 그 때에 어찌 신문이나 우편이 있어서 알았으리마는 너무도 크게 국가의 대동맥이 움직여지는 판이 되어 소문은 바람을 타고 아침저녁으로 팔도에 흩어지었다. 우리 홍주서도 정사政事에 분주하는 여러 선진자先進者들은 이곳저곳에 모여서 수군수군하는 법이 심상한 기세가 아니었다.


그래서 좌우간 이 모양으로 산속에 파묻힐 때 아니라는 생각으로 하루는 담뱃대 하나만 들고 그야말로 폐포파립弊袍破笠으로 나는 표연히 집을 나와 ‘서울’이 있다는 서남 방면을 향하여 도보하기 시작하였으니 부모에게 알린 바도 아니요, 노자도 일분一分 지닌 것이 없는 몸이매 한양漢陽을 가거나 말는지 심히 당황한 걸음이었었으나 그때는 어쩐지 태연하였다. 그래서 좌우간 길 떠난 몸이매 해지기까지 자꾸 남들이 가르쳐주는 서울 길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날은 이미 기울고 오장의 주림이 대단하게 되자 어떤 술막집에 들어 팔베개 베고 그 하룻밤을 자노라니 그제야 무모한 이 걸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의구疑懼가 일어났었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어떻게 나랏일을 돕나, 또한 한학漢學의 소양 이외에 아무 교육이 없는 내가 어떻게 소지素志를 이루나. 그날 밤 야심토록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며 사고思考 수십 회에 이를 때에 문득 나의 아홉 살 때 일이 유연油然히 떠오른다. 그것은 9세 때 『서상기西廂記』 1 의 통곡 1장을 보다가 이 인생이 덧없어 회의懷疑하던 일이라. 영영일야營營日夜하다가 죽으면 인생에 무엇이 남나. 명예냐, 부귀냐. 그것이 모두 아쉬운 것으로 생명이 끊어짐과 동시에 모두 다가 일체 공空이 되지 않느냐. 무색하고 무형한 것이 아니냐. 무엇 때문에 내가 글을 읽고 무엇 때문에 의식衣食을 입자고 이 애를 쓰는가, 하는 생각으로 5, 6일 밥을 아니 먹고 고로苦勞하던 일이 있었다. 인생은 고적孤寂한 처지에 놓이면 역시 그에 따라 고적한 사상을 가지기 쉬운 것이라. 이에 나는 나의 전정前程을 위하여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것과 또 인생 그것에 대한 무엇을 좀 해결하여 보겠다는 불같은 마음으로 한양 가던 길을 구부리어 사찰을 찾아 보은報恩 속리사俗離寺로 갔다가 다시 더 깊은 심산유곡深山幽谷의 대찰大刹을 찾아간다고 강원도 오대산의 백담사百潭寺까지 가서 그곳 동냥중, 즉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불도佛道를 닦기 시작하였다. 물욕, 색욕에 움직일 청춘의 몸이 한갓 도포 자락을 감고 고깔 쓰고 염불을 외우게 되매 완전히 현세를 초탈한 행위인 듯이 보이나, 아마 내 자신으로 생각하기에도 그렇게 철저한 도승道僧이 아니었을 것이다.


수년 승방에 갇혀 있던 몸은 그에서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길이 없어 『영환지략瀛環志略』 2 이라고 하는 책을 통하여 조선 이외에도 넓은 천지의 존재를 알고 그곳에 가서나 뜻을 펴볼까 하여 엄모라는 사람과 같이 원산元山서 배를 타고 서백리아西伯利亞를 지 향하고 해삼위海蔘威로 갔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나의 동행이던 엄모가 사갈蛇蝎 같은 밀정密偵으로 나를 해친 자였음을. 그래서 실로 살을 에어내는 듯한 여러 가지 고난의 와중을 헤치고 구사일생으로 다시 귀국하였다. 그러자 각처에는 의병이 일어나서 시세—크게 이지러지게 되어 나는 간성杆城에서 쫓기어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의 깊은 산골 암자를 찾아가 거기에서 참선 생활을 하였다. 

1 『서상기西廂記』는 중국 원대元代 희곡 작가 왕실보王實甫의 작품으로, 중국 고전 희곡을 대표한다. 서생 장군서張君瑞와 재상가 외동딸 최앵앵崔鶯鶯의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2 중국 청나라의 서계여徐繼畬가 지은 세계 지리 책이며 전 10권으로 1850년에 간행하였다. 조선과 일본에 소개되어 개화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일본행과 불교계 파란


그러다가 반도 안에 국척跼蹐하여 있는 것이 어쩐지 사내의 본의가 아닌 듯하여 일본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는 조선의 새 문명이 일본을 통하여 많이 들어오는 때이니까 비단 불교문화뿐 아니라, 새 시대 기운이 융흥隆興한다 전하던 일본의 자태를 보고 싶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관馬關에 내려 동경에 가서 조동종曹洞宗의 통치기관인 종무원을 찾아 그곳 홍진설삼弘眞雪三이라는 일본의 고승과 계합契合이 되었다. 그래서 그분의 호의로 학비 일분一分 없는 몸이나 조동종대학에 입학하여 일어도 배우고 불교도 배웠다. 그럴 때에 조선에서는 최린崔麟, 고원훈高元勳, 채기두蔡基斗 등 제씨가 유학생으로 동경으로 건너왔더라. 그러다가 나는 다시 귀국하여 동래 범어사로 가 있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가서 박한영朴漢永, 전금파全錦坡(고인이 되었으나)의 세 사람과 결의까지 하였다. 그럴 때에 서울 동대문 외 원흥사元興寺에서 전 조선 불도들이 모여 불교대회를 연다는 소식이 들리므로, 나는 부랴부랴 상경하였는데 그때는 이회광李晦光 씨가 대표가 되어 승려 해방과 학교 건설 등을 토의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단히 좋으나 미기未幾에 합병이 되자 전기前記 이회광 일파는 무슨 뜻으로 그러하였는지 일본의 조동종과 계약을 맺되 조선의 사찰 관리권과 포교권과 재산권을 모두 양도하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 주책없는 계약을 하자 한 것이 그때 이회광 일파의 원종圓宗이므로 우리는 그를 막기 위하여 임제종臨濟宗이란 종을 창립하여 그의 반대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운동이 다행히 주효하여 이회광의 계약은 취소되어 조선의 불교는 그냥 살아 있게 된 터이었다. 그 뒤 합병이 되어 몸에 닥치는 간섭이 심하므로 일시 통도사通度寺에 내려가서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초출抄出하였고, 또 『유심惟心』이라는 잡지를 경영하다가 기미己未의 33인 운동으로 옥사獄舍에 갇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승려 삼십 년에 무엇을 얻었나. 서울 안국동의 범어사梵魚寺 법당 곁에 부처님을 모시고 일석日夕 생각함에 나는 결국 영생 하나를 얻은 것을 느낀다. 어느 날 육체는 사라져 우주의 적멸寂滅과 함께 그 자취를 감추기라도 하리라. 그러나 나의 마음은 끝없이 둥글고 마음 편한 것을 느낀다. 그렇더라도 남아일세男兒一世에 나서 승으로 그 생애를 마치고만 말 것인가. 우리 앞에는 정치적 무대는 없는가? 그것이 없기에 나는 승이 된 것이나 아닐까. 만일 우리도(하략) 마지막으로 이 심경을 누가 알아주랴. 오직知者는 知不知者不知를 곡哭할 뿐이노라. 

— 『삼천리』 제6호, 1930년 5월 

3 이 말은 『논어論語』 「위정」 17장에 등장하며, 원래 “知之爲知知 不知爲不知 是知也”, 즉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진정한 앎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데서 시작된다는 공자의 핵심 철학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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