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호에 싣는 「다시 읽는 만해 한용운」은 1932년 2월 잡지 『불교』에 수록한 한용운의 「선과 인생」이라는 글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이 글은 불교에서만 다루는 일로 여겨졌던 선의 세계를 삶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설명한 유명한 논설입니다. 선禪의 의미를 ‘마음을 닦는 일’이라고 아주 간결하게 정의해놓고 있습니다. 불교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주창했던 만해 한용운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월간지 형태로 발간한 『불교』는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중앙교 무원의 기관지로서 1924년 7월부터 1933년 7월까지 통권 108호를 발행하고 휴간되었습니다. 창간호부터 83호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84·85합호부터 종간호까지는 한용운이 발행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 잡지에는 불교의 여러 문제를 다룬 논설을 비롯하여 경전의 번역, 전통문화와 문학작품의 소개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실었습니다. 한용운이 발행인을 맡으면서 「불교청년운동에 대하여」, 「정교를 분립하라」 등의 논설을 통해 조선총독부의 종교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도 싣고 있습니다.
이 글의 원문은 국한문 혼용체이지만 권영민 편 『한용운문학전집』에 따라 모든 표기법을 현대 국어 정서법에 맞춰 고쳤으며 어려운 한자어는 한자를 병기하고 간단한 주석을 붙였습니다.
— 편집자 해설(권영민)
6 선기禪機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이 백만억 대중을 모으시고 법을 설하실 새 돌연히 일지화一枝花를 들어서 대중에게 보였다. 대중은 다 망연茫然하여 그 뜻을 알지 못하였으되 오직 가섭迦葉 일인이 미소하였다. 이것은 만겁萬劫의 지기知己요 일세의 쾌사다. 선기禪機1에 있어서 가장 평화스럽고 가장 숭고한 일이다. 선기라는 것은 어떠한 형식으로 나타나든지 그 자체의 묘미에 있어서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움직이는 경애境涯2에 대하여 보는 자의 주관적으로 그 기봉機鋒3이 이둔완급利鈍緩急을 평정評定하게 되는 것이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은 검劒을 잡고 불佛을 핍하였다.4 형식에 있어서 그것은 확실히 불계佛戒 중의 오역죄5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검광劍光·불광佛光이 비일비이非一非二한 데 이르러, 문수의 악검핍불握劒逼佛6은 오역五逆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불세출의 선기禪機로 화하였다. 그러나 문수의 악인 핍불은 완전히 오역죄를 범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다. 다만 문수는 일찍이 안중에 불을 보지 못하고 수중에 검을 보지 못하였고 심중에는 불을 핍하는 의식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문수는 검劒을 잡고 불을 핍하였으나, 밖으로 그 상이 없었고 안으로 그 마음이 없었으므로 오역죄의 성립될 요소가 없었다.
임제臨濟의 할喝7과 덕산德山의 방棒8은 선기에 있어서 특별한 명물名物이다. 임제의 법문法門은 언제든지 할喝뿐이요, 덕산의 법문은 언제든지 방棒뿐이다. 임제는 어느 학자의 어느 질문에 대하여서도 할을 썼고, 덕산은 어느 학자의 무슨 문법問法에 대하여서든지 방을 썼다. 그리하여 임제의 할은 할마다 법에 당치 아니함이 없고, 덕산의 방은 방마다 법에 어김이 없다 한다. 그러나 임제의 할은 할마다 치할痴喝9이요, 덕산의 방은 방마다 맹방盲棒10이 었다. 왜 그러냐 하면 임제의 할은 할을 쓰는 마음이 없었고, 덕산의 방은 방을 쓰는 상相이 없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임제의 할은 한마디의 무심한 소리에 지나지 못하고 덕산의 방은 한 가지의 무정한 고목에 지나지 못하였다. 사량복탁思量卜度11의 지해知解가 없는 무심한 할인 고로 어느 법에 통하지 아니함이 없고, 친소애증親疎愛憎의 착상이 없는 이상離相의 방인 고로 맞지 아니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할은 진정한 치할이라야 되고 방은 완전한 맹방이라야 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여 할과 방에 지해知解와 착상着相이 있으면 그것이 이른바 영리한 치할이요 총명한 맹방이다. 그러한 봉할은 선기禪機에 있어서 십만 팔천 길(路)이다.
중국의 황산곡黃山谷12은 당시의 선학으로 유명한 회당선사晦堂禪師를 찾아보고 법을 물었다. 회당선사는 곤困하면 잠자고 목마르면 차 마시는 등의 심상尋常한 말로 대답하였다. 황산곡은 회당선사에게 법을 물을 때 물론 기이한 말을 들을 줄로 기대하였다가 심상한 말로 대답함을 듣고는 마침내 의심을 내어서, 자기와 교분이 두텁지 못하여서 법의 묘리를 다 말하지 않는 줄로 알아서 법을 묻기를 더욱 심각하게 하였다. 그런데 법을 물을 때마다 회당선사는 “내가 네게 숨김이 없다”는 말로 대답할 뿐이다. 회당선사는 실로 숨김이 없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황산곡의 의심은 언제든지 풀리지 아니하였다. 그 후 늦은 봄 어느 날이었다. 회당선사는 황산곡과 동반하여 길을 가다가 목서화木犀花13가 만개하여 그 향기가 사람을 엄습함을 알았다. 회당선사가 황산곡에게 묻되, “네가 목서향木犀香을 듣느냐?” 황산곡이 대답하되, “듣느니라”. 회당선사가 말하되, “내가 네게 숨김이 없다” 하니 황산곡이 언하言下에 깨달았다. 그것은 과연 어떠한 지경이냐.
1 언어나 논리, 이론이 아닌 직관적이고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진리를 가리키는 순간을 이른다.
2 환경이나 처지.
3 공격이나 언변의 날카로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상대의 말이나 상황에 맞서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대답하거나 행동하는 선사의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깨달음을 의미한다.
4 逼. 위협한다는 뜻.
5 불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악행. 어머니, 아버지, 아라한을 죽이는 죄와 부처의 몸에 상처를 내 피 흘리게 하는 죄,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죄를 이르며 이러한 죄를 범할 경우 즉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6 칼을 쥐고 부처를 위협하다.
7 할喝은 고함치는 소리, 일갈을 의미한다. 임제 조사는 제자가 참된 자아, 즉 본래면목에 도달하게 하기 위해 순식간에 마음의 분별을 끊는 방식으로 “할”이라고 일갈했다. 할喝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수행자에게 언어 이전의 직관을 촉구하고, 분별심과 집착을 단숨에 깨뜨리려는 선적禪的 도구다.
8 방棒은 지팡이라는 뜻으로, 선림에서 사용하는 몽둥이 또는 몽둥이로 치는 일을 의미한다. 덕산 선사는 제자가 법에 대해 묻자 답을 하는 대신 곧장 지니고 있던 몽둥이로 제자를 내리쳤다. 방棒은 언어 이전의 자각, 즉 몸의 충격을 통해 마음의 각성에 도달하는 수행 방식을 말한다.
9 어리석은 고함.
10 무분별한 몽둥이질.
11 사유하고 판단하며 헤아리는 이성적·분별적인 작용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선종에서는 이를 참된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긴다.
12 북송 시대의 문인 황정견黃庭堅(1045~1105). 山谷은 그의 호다. 황산곡은 소식蘇軾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당대 최고의 문장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3 물푸레나무꽃.
7 견성見性
견성見性이라는 것은 자성自性을 본다는 뜻이니, 선을 닦아서 화두話頭의 의정疑情을 파하면 일체 공안이 일시 돈파頓破14하여 요요了了15히 불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혹은 자성自性은 체가 없어서 형색이 없거니 어찌 시각으로 능히 볼 바이리요. 성을 본다는 것은 성을 깨닫는다는 말이라 하고, 혹은 성은 능히 눈으로 볼 바가 아닌, 즉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하여 견성에 대한 해설은 자못 불일不一하다. 그러나 불성은 눈으로 능히 볼 수 있느니 성은 형색이 있는 까닭이다. 왜 그러냐 하면 언어도단·심행처멸心行處滅16한 법성法性만이 불성이 아니요, 산산山山·수수水水·화화花花·초초草草 어느 것 하나도 불성이 아닌 것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산산·수수·화화·초초는 누구든지 볼 수 있는 것인즉, 일체중생이 다 견성한 것이어서 하필 참선의 오悟를 기다려 비로소 견성한다 하리요 하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체중생이 다 견성한 것이다. 그러나 미迷한 자는 스스로 견성한 줄을 알지 못하느니, 산산·수수·화화·초초가 다 불성인 줄 모르고, 가령 관념적으로 안다 하더라도 어찌하여서 산산·수수·화화·초초가 다 불성인 줄을 모르는 까닭이다. 그뿐 아니라 허령담적虛靈湛寂하여 무형 무색한 법성도 마음으로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능히 눈으로 볼 수 있느니, 오悟한 자는 육근六根17을 호용互用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의근意根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안근眼根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근耳根으로도 볼 수 있고 비근鼻根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悟한 자에게는 눈·귀·코·혀·몸·뜻(眼耳鼻舌身意)의 육근만 호용互用될 뿐만 아니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진六塵도 호용互用되는 것이며,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18이므로 진공묘유眞空妙有19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이라는 것은 마음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육진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영운 조사靈雲祖師20는 도화桃花를 보고 견성하였느니 그것은 누구라도 아는 일이지만, 영운이 도화를 보고 견성할 때에 그 도화가 영운을 보고 견성한 줄은 천고에 아는 사람이 없느니 그것은 일대 한사一大恨事다.
14 단번에 깨뜨림.
15 뚜렷하고 분명함.
16 생각조차도 일어나지 않고, 생각이 일어날 자리조차도 없어진 상태.
17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여섯 인지 기관, 혹은 그 기관들이 갖는 인지 능력.
18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한 구절. 색色은 만유의 세계이며, 모든 것이 인연의 소생으로서 그 본성은 실유實有의 것이 아닌, 즉 공空이라는 뜻. 이와 반대의 경우도 그대로 성립된다.
19 진공眞空은 일체의 망집을 떠나 사량분별을 끊은 불가득의 절대 세계를 뜻하며, 묘유妙有라고도 함. 여기서는 진공이면서 묘하게도 존재함을 의미한다.
20 중국 선종의 대표적 고승. 『전등록』에 깨달음과 관련된 그의 일화가 전해진다. 영운이 스승 동산에게서 이십 년을 지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머리를 깎고 길을 떠나게 되는데 어느 봄날 산속에서 복사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문득 크게 깨달아 “삼십 년을 찾았지만 그대는 오늘 한 송이 복사꽃 아래 있었구나!(三十年來尋劍客, 幾回落葉又抽枝. 自從一見桃花後, 直到如今更不疑)”라고 외쳤다.
8 선禪의 활용活用
불교도의 선학자들이 흔히 산간 암혈巖穴21에서 참선을 행하는 고로, 세인은 이를 오해하여 선이라는 것은 암혈송하岩穴松下22에서만 행하는 염세적 고선사선枯禪死禪23으로 오인하는 일이 없지 않다. 선학이라는 것은 물론 인人에 있는 것이나 초학자로서는 경境을 가리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학이라는 것은 어떠한 처소에서든지 자기의 주공做工24 여하에 있는 것이지마는, 복잡한 성색을 피하는 적정寂靜한 처소가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선학자는 고래로 대개는 산간 암혈에서 정진하게 되었으나, 선학을 종료한 후에는 반드시 출세하여 입니입수入泥入水25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요, 뿐만 아니라 수학할 때도 반드시 산간 암혈이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은 아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글을 배우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요, 농사를 하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요, 그밖에 모든 업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서 병마공총兵馬倥傯·초연탄우硝烟彈雨26의 중에서도 참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때일수록 참선이 필요한 것이다.
선이라는 것은 고적故寂을 묵수墨守하는 사선死禪이 아니요, 기봉機鋒을 활용하여 임운등등任運騰騰27하는 활선活禪이다. 선은 능히 위구危懼28를 제하고, 선은 능히 애상哀傷을 구驅29하고, 선은 능히 생사를 초超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수양이냐.
송宋의 정이천程伊川30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유명한 학자요 현인이었다. 하루는 정이천이 몇 명의 동반同伴과 같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현순백결玄鶉百結31의 납의衲衣32를 입은 걸승乞僧 한 사람이 동선同船을 하게 되었다. 그 배가 중류에 이르자 홀연히 풍파가 대작大作하여 배가 능히 진퇴를 못 하고 방향이 없이 표류하여 거의 복선覆船 지경이 된지라 동선한 사람이 다 경겁황망驚㥘慌忙33하여 거의 의식을 잃고 포복전도匍匐顚倒34하며 사공까지도 당황실조唐慌失措35하는지라. 정이천은 물론 상당한 수양이 있는지라 타인과 같이 경겁망조驚㥘罔措하지는 아니하나 다소의 공포를 느껴서 궤슬단좌跪膝端坐36의 의범儀範을 지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동선한 걸승은 그러한 풍랑으로 복선의 위경危境에 이름에도 불구하고 돈연 무관심의 태도로 발랑鉢囊37에 의지하여 가수假睡38하고 있는지라, 아무라도 그의 초인적 행동을 볼 때에 이상한 느낌을 갖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모든 것이 비범한 정이천으로서는 그 행동을 범연히 간과치 아니하여 내심으로 많은 억측을 하여서 그는 지인至人이 아니면 천치天痴라고 추상推想하였다. 그리하다가 다행히 그 배가 피안彼岸에 도달하여 각각 그 길에 취就할 때에 정이천은 그 걸승에 향하여, 불의의 풍랑으로 전도 위구에 제회際會하여 거의 무감각이라고 할 만큼 태연자약하여 가수假睡에 취就하던 이유를 물었다. 그 걸승은 미소하면서 말하되, “아무 이상한 것이 없느니 나는 배를 타고 올 때에 처음부터 강물을 보지 못하고 또한 배를 보지 못하였노라. 강물과 배를 보지 못하였거니 어찌 풍랑을 보았으리요. 강물과 배와 풍랑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나의 생사를 잊었노라. 생사를 잊었거니 무슨 위구의 관심이 있으리요. 태연자약하여 가수에 취함이 또한 마땅치 아니하리오” 하였다. 정이천은 그 말을 듣고 스스로 반성한 바 있었다 한다. 적정寂靜39한 중에서 기봉機鋒을 쉬려淬礪40하고 황망한 중에서 적정을 얻는 것이 진실로 참된 활용이다. 선은 고목 사회死灰41의 회심멸지灰心滅志42가 아니요, 임운등등任運騰騰43의 만기종횡萬機縱橫44이다. 이러한 선이 외인으로부터 고선枯禪·사선死禪의 오해를 받을 뿐 아니라, 선학자 자체도 왕왕 선의 활용을 오인하여, 산간 암혈에서 고절苦節을 사수死守하고 활용 도생의 본지를 망각하는 것은 선학을 위하여 유감 천만의 일이다.
21 바위굴.
22 바위굴이나 소나무 아래 같은 자연 속. 외부 세계와 단절된 은둔처에서 조
용히 수행하는 모습을 이른다.
23 생기 없고 죽은 듯한 참선, 즉 형식에 치우치고 활력이 없는 수행을 가리키
는 말.
24 학업이나 일을 힘써 하는 것.
25 진흙탕에도 들어가고 물에도 들어간다는 말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어떤 더
럽고 어려운 환경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26 전쟁 같은 긴박하고 혼란한 상황과 총탄이 날리는 격전을 의미하는 것으
로,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비유한 말이다.
27 임운任運이란 변화무쌍한 조화에 내맡김을 뜻하는 것으로, 선사가 자유자
재하게 인연에 따르는 경지를 일컬을 때 쓴다.
28 염려하고 두려워함.
29 몰아내다.
30 북송 시대의 유학자이자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대표적인 인물.
31 검고 얼룩진 누더기에 수많은 덧댐이 있는 옷차림이라는 뜻으로, 초라한
행색을 이를 때 쓰는 말.
32 낡은 헝겊을 모아 기워 만든 승려의 옷. 가사.
33 놀라 겁을 내고 허둥지둥함.
34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 기고, 뒤집혀 자빠지다.
35 당황하여 균형을 잃음.
36 무릎을 꿇고 가지런히 하여 앉음.
37 바랑.
38 의식이 반쯤 깨어 있는 옅은 잠.
39 일체의 미망에서 해탈하여 안락한 경계.
40 갈고닦음.
41 불기운이 식은 재.
42 마음이 재처럼 식고 뜻이 사라짐.
43 자유자재하고 막힘이 없는 경지.
44 온갖 일과 인연 속을 자유롭게 다니며 걸림 없는 활동.
9 결론結論
인생관으로 보아서 인격적으로 보아서 사람은 피동되지 않는 것을 참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색을 따라서 시각이 착잡하고 성聲을 따라서 청각이 교란하며, 희로애락을 따라서 정의 상궤를 잃고 안전과 위구를 따라서 심의 중추를 옮긴다면, 다시 말하면 외적 환경을 따라 내적 의식을 좌우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완전한 인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홍색紅色을 볼 때에 청색을 보던 인식으로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진정한 시각이요, 궁성宮聲을 들을 때에 각성角聲을 듣던 감각45으로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진정한 청각이 될 것이며, 사물의 환경이 여하히 변동되든지 진아眞我의 자체는 상도를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람이 될 것이다. 풍우가 여회如晦46하되 계명鷄鳴은 이미 아니며, 대침大浸이 계천稽天47하되 지주支柱는 불이不移하느니, 심야의 숙수熟睡48 중에 돌연히 자객의 상인霜刃49을 만나매 태연히 목을 늘이어 칼을 받아서, 자객으로 하여금 경복자퇴敬服自退50케 한 송의 한기韓琦51가 광세曠世52의 명재상名宰相이 되었고, 복잡한 난관의 정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공원에 산보하며 지어池魚의 유영遊泳을 정관靜觀하던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위대한 정치가가 되었느니, 이것은 다 선적 심경이다. 그 사람들이 물론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선천적 혹은 후천적 수양이 자연히 선적 활용에 부합된 것이다. 제불 제조의 살활자재殺活自在53·종금수의縱擒隨意54·억양반복抑揚反覆55·여탈종횡與奪縱橫56, 모든 기봉機鋒이 선의 활용이다.
45 동아시아의 전통 오음계 궁상각치우를 의미. 오음계는 오행이론에 바탕을
두었는데 궁성은 토에 대응하여 중심과 안정을 뜻하며 각성은 목에 대응하
며 생장과 확산을 의미한다.
46 마치 그믐밤처럼 어두운 상태.
47 대홍수가 하늘에 이름.
48 깊은 잠. 숙면.
49 서슬 퍼런 칼날.
50 깊이 공경하여 스스로 물러남.
51 송나라의 명재상. 덕망이 놓고 청렴하기로 유명했다. 한기의 덕망과 통치
덕에 도둑마저 감화되어 물건을 훔치지 않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52 세상에 보기 드묾.
53 일깨우기도 하고 깨닫게 하기도 함.
54 놓아주고 가두는 것이 모두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
55 억누르고 드러냄을 되풀이함. 변화무쌍한 설법과 지도를 의미할 때 쓴다.
56 주거나 빼앗고 때로는 곧고 때로는 비트는 것.
— 『불교佛敎』 92호號, 1932. 2
이번 호에 싣는 「다시 읽는 만해 한용운」은 1932년 2월 잡지 『불교』에 수록한 한용운의 「선과 인생」이라는 글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이 글은 불교에서만 다루는 일로 여겨졌던 선의 세계를 삶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설명한 유명한 논설입니다. 선禪의 의미를 ‘마음을 닦는 일’이라고 아주 간결하게 정의해놓고 있습니다. 불교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주창했던 만해 한용운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월간지 형태로 발간한 『불교』는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중앙교 무원의 기관지로서 1924년 7월부터 1933년 7월까지 통권 108호를 발행하고 휴간되었습니다. 창간호부터 83호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84·85합호부터 종간호까지는 한용운이 발행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 잡지에는 불교의 여러 문제를 다룬 논설을 비롯하여 경전의 번역, 전통문화와 문학작품의 소개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실었습니다. 한용운이 발행인을 맡으면서 「불교청년운동에 대하여」, 「정교를 분립하라」 등의 논설을 통해 조선총독부의 종교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도 싣고 있습니다.
이 글의 원문은 국한문 혼용체이지만 권영민 편 『한용운문학전집』에 따라 모든 표기법을 현대 국어 정서법에 맞춰 고쳤으며 어려운 한자어는 한자를 병기하고 간단한 주석을 붙였습니다.
— 편집자 해설(권영민)
6 선기禪機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이 백만억 대중을 모으시고 법을 설하실 새 돌연히 일지화一枝花를 들어서 대중에게 보였다. 대중은 다 망연茫然하여 그 뜻을 알지 못하였으되 오직 가섭迦葉 일인이 미소하였다. 이것은 만겁萬劫의 지기知己요 일세의 쾌사다. 선기禪機1에 있어서 가장 평화스럽고 가장 숭고한 일이다. 선기라는 것은 어떠한 형식으로 나타나든지 그 자체의 묘미에 있어서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움직이는 경애境涯2에 대하여 보는 자의 주관적으로 그 기봉機鋒3이 이둔완급利鈍緩急을 평정評定하게 되는 것이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은 검劒을 잡고 불佛을 핍하였다.4 형식에 있어서 그것은 확실히 불계佛戒 중의 오역죄5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검광劍光·불광佛光이 비일비이非一非二한 데 이르러, 문수의 악검핍불握劒逼佛6은 오역五逆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불세출의 선기禪機로 화하였다. 그러나 문수의 악인 핍불은 완전히 오역죄를 범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다. 다만 문수는 일찍이 안중에 불을 보지 못하고 수중에 검을 보지 못하였고 심중에는 불을 핍하는 의식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문수는 검劒을 잡고 불을 핍하였으나, 밖으로 그 상이 없었고 안으로 그 마음이 없었으므로 오역죄의 성립될 요소가 없었다.
임제臨濟의 할喝7과 덕산德山의 방棒8은 선기에 있어서 특별한 명물名物이다. 임제의 법문法門은 언제든지 할喝뿐이요, 덕산의 법문은 언제든지 방棒뿐이다. 임제는 어느 학자의 어느 질문에 대하여서도 할을 썼고, 덕산은 어느 학자의 무슨 문법問法에 대하여서든지 방을 썼다. 그리하여 임제의 할은 할마다 법에 당치 아니함이 없고, 덕산의 방은 방마다 법에 어김이 없다 한다. 그러나 임제의 할은 할마다 치할痴喝9이요, 덕산의 방은 방마다 맹방盲棒10이 었다. 왜 그러냐 하면 임제의 할은 할을 쓰는 마음이 없었고, 덕산의 방은 방을 쓰는 상相이 없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임제의 할은 한마디의 무심한 소리에 지나지 못하고 덕산의 방은 한 가지의 무정한 고목에 지나지 못하였다. 사량복탁思量卜度11의 지해知解가 없는 무심한 할인 고로 어느 법에 통하지 아니함이 없고, 친소애증親疎愛憎의 착상이 없는 이상離相의 방인 고로 맞지 아니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할은 진정한 치할이라야 되고 방은 완전한 맹방이라야 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여 할과 방에 지해知解와 착상着相이 있으면 그것이 이른바 영리한 치할이요 총명한 맹방이다. 그러한 봉할은 선기禪機에 있어서 십만 팔천 길(路)이다.
중국의 황산곡黃山谷12은 당시의 선학으로 유명한 회당선사晦堂禪師를 찾아보고 법을 물었다. 회당선사는 곤困하면 잠자고 목마르면 차 마시는 등의 심상尋常한 말로 대답하였다. 황산곡은 회당선사에게 법을 물을 때 물론 기이한 말을 들을 줄로 기대하였다가 심상한 말로 대답함을 듣고는 마침내 의심을 내어서, 자기와 교분이 두텁지 못하여서 법의 묘리를 다 말하지 않는 줄로 알아서 법을 묻기를 더욱 심각하게 하였다. 그런데 법을 물을 때마다 회당선사는 “내가 네게 숨김이 없다”는 말로 대답할 뿐이다. 회당선사는 실로 숨김이 없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황산곡의 의심은 언제든지 풀리지 아니하였다. 그 후 늦은 봄 어느 날이었다. 회당선사는 황산곡과 동반하여 길을 가다가 목서화木犀花13가 만개하여 그 향기가 사람을 엄습함을 알았다. 회당선사가 황산곡에게 묻되, “네가 목서향木犀香을 듣느냐?” 황산곡이 대답하되, “듣느니라”. 회당선사가 말하되, “내가 네게 숨김이 없다” 하니 황산곡이 언하言下에 깨달았다. 그것은 과연 어떠한 지경이냐.
1 언어나 논리, 이론이 아닌 직관적이고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진리를 가리키는 순간을 이른다.
2 환경이나 처지.
3 공격이나 언변의 날카로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상대의 말이나 상황에 맞서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대답하거나 행동하는 선사의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깨달음을 의미한다.
4 逼. 위협한다는 뜻.
5 불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악행. 어머니, 아버지, 아라한을 죽이는 죄와 부처의 몸에 상처를 내 피 흘리게 하는 죄,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죄를 이르며 이러한 죄를 범할 경우 즉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6 칼을 쥐고 부처를 위협하다.
7 할喝은 고함치는 소리, 일갈을 의미한다. 임제 조사는 제자가 참된 자아, 즉 본래면목에 도달하게 하기 위해 순식간에 마음의 분별을 끊는 방식으로 “할”이라고 일갈했다. 할喝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수행자에게 언어 이전의 직관을 촉구하고, 분별심과 집착을 단숨에 깨뜨리려는 선적禪的 도구다.
8 방棒은 지팡이라는 뜻으로, 선림에서 사용하는 몽둥이 또는 몽둥이로 치는 일을 의미한다. 덕산 선사는 제자가 법에 대해 묻자 답을 하는 대신 곧장 지니고 있던 몽둥이로 제자를 내리쳤다. 방棒은 언어 이전의 자각, 즉 몸의 충격을 통해 마음의 각성에 도달하는 수행 방식을 말한다.
9 어리석은 고함.
10 무분별한 몽둥이질.
11 사유하고 판단하며 헤아리는 이성적·분별적인 작용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선종에서는 이를 참된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긴다.
12 북송 시대의 문인 황정견黃庭堅(1045~1105). 山谷은 그의 호다. 황산곡은 소식蘇軾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당대 최고의 문장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3 물푸레나무꽃.
7 견성見性
견성見性이라는 것은 자성自性을 본다는 뜻이니, 선을 닦아서 화두話頭의 의정疑情을 파하면 일체 공안이 일시 돈파頓破14하여 요요了了15히 불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혹은 자성自性은 체가 없어서 형색이 없거니 어찌 시각으로 능히 볼 바이리요. 성을 본다는 것은 성을 깨닫는다는 말이라 하고, 혹은 성은 능히 눈으로 볼 바가 아닌, 즉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하여 견성에 대한 해설은 자못 불일不一하다. 그러나 불성은 눈으로 능히 볼 수 있느니 성은 형색이 있는 까닭이다. 왜 그러냐 하면 언어도단·심행처멸心行處滅16한 법성法性만이 불성이 아니요, 산산山山·수수水水·화화花花·초초草草 어느 것 하나도 불성이 아닌 것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산산·수수·화화·초초는 누구든지 볼 수 있는 것인즉, 일체중생이 다 견성한 것이어서 하필 참선의 오悟를 기다려 비로소 견성한다 하리요 하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체중생이 다 견성한 것이다. 그러나 미迷한 자는 스스로 견성한 줄을 알지 못하느니, 산산·수수·화화·초초가 다 불성인 줄 모르고, 가령 관념적으로 안다 하더라도 어찌하여서 산산·수수·화화·초초가 다 불성인 줄을 모르는 까닭이다. 그뿐 아니라 허령담적虛靈湛寂하여 무형 무색한 법성도 마음으로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능히 눈으로 볼 수 있느니, 오悟한 자는 육근六根17을 호용互用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의근意根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안근眼根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근耳根으로도 볼 수 있고 비근鼻根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悟한 자에게는 눈·귀·코·혀·몸·뜻(眼耳鼻舌身意)의 육근만 호용互用될 뿐만 아니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진六塵도 호용互用되는 것이며,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18이므로 진공묘유眞空妙有19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이라는 것은 마음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육진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영운 조사靈雲祖師20는 도화桃花를 보고 견성하였느니 그것은 누구라도 아는 일이지만, 영운이 도화를 보고 견성할 때에 그 도화가 영운을 보고 견성한 줄은 천고에 아는 사람이 없느니 그것은 일대 한사一大恨事다.
14 단번에 깨뜨림.
15 뚜렷하고 분명함.
16 생각조차도 일어나지 않고, 생각이 일어날 자리조차도 없어진 상태.
17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여섯 인지 기관, 혹은 그 기관들이 갖는 인지 능력.
18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한 구절. 색色은 만유의 세계이며, 모든 것이 인연의 소생으로서 그 본성은 실유實有의 것이 아닌, 즉 공空이라는 뜻. 이와 반대의 경우도 그대로 성립된다.
19 진공眞空은 일체의 망집을 떠나 사량분별을 끊은 불가득의 절대 세계를 뜻하며, 묘유妙有라고도 함. 여기서는 진공이면서 묘하게도 존재함을 의미한다.
20 중국 선종의 대표적 고승. 『전등록』에 깨달음과 관련된 그의 일화가 전해진다. 영운이 스승 동산에게서 이십 년을 지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머리를 깎고 길을 떠나게 되는데 어느 봄날 산속에서 복사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문득 크게 깨달아 “삼십 년을 찾았지만 그대는 오늘 한 송이 복사꽃 아래 있었구나!(三十年來尋劍客, 幾回落葉又抽枝. 自從一見桃花後, 直到如今更不疑)”라고 외쳤다.
8 선禪의 활용活用
불교도의 선학자들이 흔히 산간 암혈巖穴21에서 참선을 행하는 고로, 세인은 이를 오해하여 선이라는 것은 암혈송하岩穴松下22에서만 행하는 염세적 고선사선枯禪死禪23으로 오인하는 일이 없지 않다. 선학이라는 것은 물론 인人에 있는 것이나 초학자로서는 경境을 가리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학이라는 것은 어떠한 처소에서든지 자기의 주공做工24 여하에 있는 것이지마는, 복잡한 성색을 피하는 적정寂靜한 처소가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선학자는 고래로 대개는 산간 암혈에서 정진하게 되었으나, 선학을 종료한 후에는 반드시 출세하여 입니입수入泥入水25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요, 뿐만 아니라 수학할 때도 반드시 산간 암혈이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은 아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글을 배우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요, 농사를 하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요, 그밖에 모든 업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서 병마공총兵馬倥傯·초연탄우硝烟彈雨26의 중에서도 참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때일수록 참선이 필요한 것이다.
선이라는 것은 고적故寂을 묵수墨守하는 사선死禪이 아니요, 기봉機鋒을 활용하여 임운등등任運騰騰27하는 활선活禪이다. 선은 능히 위구危懼28를 제하고, 선은 능히 애상哀傷을 구驅29하고, 선은 능히 생사를 초超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수양이냐.
송宋의 정이천程伊川30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유명한 학자요 현인이었다. 하루는 정이천이 몇 명의 동반同伴과 같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현순백결玄鶉百結31의 납의衲衣32를 입은 걸승乞僧 한 사람이 동선同船을 하게 되었다. 그 배가 중류에 이르자 홀연히 풍파가 대작大作하여 배가 능히 진퇴를 못 하고 방향이 없이 표류하여 거의 복선覆船 지경이 된지라 동선한 사람이 다 경겁황망驚㥘慌忙33하여 거의 의식을 잃고 포복전도匍匐顚倒34하며 사공까지도 당황실조唐慌失措35하는지라. 정이천은 물론 상당한 수양이 있는지라 타인과 같이 경겁망조驚㥘罔措하지는 아니하나 다소의 공포를 느껴서 궤슬단좌跪膝端坐36의 의범儀範을 지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동선한 걸승은 그러한 풍랑으로 복선의 위경危境에 이름에도 불구하고 돈연 무관심의 태도로 발랑鉢囊37에 의지하여 가수假睡38하고 있는지라, 아무라도 그의 초인적 행동을 볼 때에 이상한 느낌을 갖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모든 것이 비범한 정이천으로서는 그 행동을 범연히 간과치 아니하여 내심으로 많은 억측을 하여서 그는 지인至人이 아니면 천치天痴라고 추상推想하였다. 그리하다가 다행히 그 배가 피안彼岸에 도달하여 각각 그 길에 취就할 때에 정이천은 그 걸승에 향하여, 불의의 풍랑으로 전도 위구에 제회際會하여 거의 무감각이라고 할 만큼 태연자약하여 가수假睡에 취就하던 이유를 물었다. 그 걸승은 미소하면서 말하되, “아무 이상한 것이 없느니 나는 배를 타고 올 때에 처음부터 강물을 보지 못하고 또한 배를 보지 못하였노라. 강물과 배를 보지 못하였거니 어찌 풍랑을 보았으리요. 강물과 배와 풍랑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나의 생사를 잊었노라. 생사를 잊었거니 무슨 위구의 관심이 있으리요. 태연자약하여 가수에 취함이 또한 마땅치 아니하리오” 하였다. 정이천은 그 말을 듣고 스스로 반성한 바 있었다 한다. 적정寂靜39한 중에서 기봉機鋒을 쉬려淬礪40하고 황망한 중에서 적정을 얻는 것이 진실로 참된 활용이다. 선은 고목 사회死灰41의 회심멸지灰心滅志42가 아니요, 임운등등任運騰騰43의 만기종횡萬機縱橫44이다. 이러한 선이 외인으로부터 고선枯禪·사선死禪의 오해를 받을 뿐 아니라, 선학자 자체도 왕왕 선의 활용을 오인하여, 산간 암혈에서 고절苦節을 사수死守하고 활용 도생의 본지를 망각하는 것은 선학을 위하여 유감 천만의 일이다.
21 바위굴.
22 바위굴이나 소나무 아래 같은 자연 속. 외부 세계와 단절된 은둔처에서 조
용히 수행하는 모습을 이른다.
23 생기 없고 죽은 듯한 참선, 즉 형식에 치우치고 활력이 없는 수행을 가리키
는 말.
24 학업이나 일을 힘써 하는 것.
25 진흙탕에도 들어가고 물에도 들어간다는 말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어떤 더
럽고 어려운 환경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26 전쟁 같은 긴박하고 혼란한 상황과 총탄이 날리는 격전을 의미하는 것으
로,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비유한 말이다.
27 임운任運이란 변화무쌍한 조화에 내맡김을 뜻하는 것으로, 선사가 자유자
재하게 인연에 따르는 경지를 일컬을 때 쓴다.
28 염려하고 두려워함.
29 몰아내다.
30 북송 시대의 유학자이자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대표적인 인물.
31 검고 얼룩진 누더기에 수많은 덧댐이 있는 옷차림이라는 뜻으로, 초라한
행색을 이를 때 쓰는 말.
32 낡은 헝겊을 모아 기워 만든 승려의 옷. 가사.
33 놀라 겁을 내고 허둥지둥함.
34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 기고, 뒤집혀 자빠지다.
35 당황하여 균형을 잃음.
36 무릎을 꿇고 가지런히 하여 앉음.
37 바랑.
38 의식이 반쯤 깨어 있는 옅은 잠.
39 일체의 미망에서 해탈하여 안락한 경계.
40 갈고닦음.
41 불기운이 식은 재.
42 마음이 재처럼 식고 뜻이 사라짐.
43 자유자재하고 막힘이 없는 경지.
44 온갖 일과 인연 속을 자유롭게 다니며 걸림 없는 활동.
9 결론結論
인생관으로 보아서 인격적으로 보아서 사람은 피동되지 않는 것을 참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색을 따라서 시각이 착잡하고 성聲을 따라서 청각이 교란하며, 희로애락을 따라서 정의 상궤를 잃고 안전과 위구를 따라서 심의 중추를 옮긴다면, 다시 말하면 외적 환경을 따라 내적 의식을 좌우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완전한 인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홍색紅色을 볼 때에 청색을 보던 인식으로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진정한 시각이요, 궁성宮聲을 들을 때에 각성角聲을 듣던 감각45으로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진정한 청각이 될 것이며, 사물의 환경이 여하히 변동되든지 진아眞我의 자체는 상도를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람이 될 것이다. 풍우가 여회如晦46하되 계명鷄鳴은 이미 아니며, 대침大浸이 계천稽天47하되 지주支柱는 불이不移하느니, 심야의 숙수熟睡48 중에 돌연히 자객의 상인霜刃49을 만나매 태연히 목을 늘이어 칼을 받아서, 자객으로 하여금 경복자퇴敬服自退50케 한 송의 한기韓琦51가 광세曠世52의 명재상名宰相이 되었고, 복잡한 난관의 정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공원에 산보하며 지어池魚의 유영遊泳을 정관靜觀하던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위대한 정치가가 되었느니, 이것은 다 선적 심경이다. 그 사람들이 물론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선천적 혹은 후천적 수양이 자연히 선적 활용에 부합된 것이다. 제불 제조의 살활자재殺活自在53·종금수의縱擒隨意54·억양반복抑揚反覆55·여탈종횡與奪縱橫56, 모든 기봉機鋒이 선의 활용이다.
45 동아시아의 전통 오음계 궁상각치우를 의미. 오음계는 오행이론에 바탕을
두었는데 궁성은 토에 대응하여 중심과 안정을 뜻하며 각성은 목에 대응하
며 생장과 확산을 의미한다.
46 마치 그믐밤처럼 어두운 상태.
47 대홍수가 하늘에 이름.
48 깊은 잠. 숙면.
49 서슬 퍼런 칼날.
50 깊이 공경하여 스스로 물러남.
51 송나라의 명재상. 덕망이 놓고 청렴하기로 유명했다. 한기의 덕망과 통치
덕에 도둑마저 감화되어 물건을 훔치지 않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52 세상에 보기 드묾.
53 일깨우기도 하고 깨닫게 하기도 함.
54 놓아주고 가두는 것이 모두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
55 억누르고 드러냄을 되풀이함. 변화무쌍한 설법과 지도를 의미할 때 쓴다.
56 주거나 빼앗고 때로는 곧고 때로는 비트는 것.
— 『불교佛敎』 92호號, 193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