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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가을] 시인의 뿌리를 찾아서 - 문정희 편

202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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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부르는 슬픈 유랑의 노래 - 문정희 편

신철규


문정희의 시에는 구체적인 현장성과 사실성으로 시적 상황을 살려내면서 생생하게 그려내는 힘이 있다. 사소한 일상의 장면을 어떤 광란과 결단의 시간으로 바꾸는 능력, 또는 범속한 일상에서 시를 포착하는 감각의 힘을 밀도 있는 언어로 길러낸다. 언어의 불안정성과 불완전성, 그리고 대상에 완전히 밀착되지 않는 불투명성에 대한 고민 없이 어떤 좋은 시도 쓰일 수 없다. 사랑 또한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러한 언어의 실패를 극복하고 무한한 감동이나 매혹으로 그 실패의 자리를 자유로이 채우고자 하는 간절함이 그녀의 시를 이끄는 추동력이다.


그녀의 시에는 자유를 찾아 떠난 여행과 유랑이 곳곳에 나온다. 정해진 길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은 길을 향해 모험을 떠나는 것. 그것은 현실의 모순을 대대적으로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사물을 다른 입각점에서 다른 눈으로 봄으로써 삶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언어의 전환과 함께 시야와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내면서 낯선 것의 침입을 받아안는 것이다. ‘죽음’ 또는 ‘삶 너머의 다른 삶’으로의 이행의 과정이 곧 삶의 진정한 여정이다. 여행과 유랑은 상투와 반복, 길들임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새롭고 낯선 감각으로 사람과 대상을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길에서의 이탈과 일상의 일탈, 길 잃음과 헤맴은 알몸으로서의 나와 만나는 치욕적이면서도 황홀한 경험이다. 시를 쓰는 것은 온전한 자신이 되려는 존재의 고투일 것이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시어가 ‘허공’이라는 명사와 ‘홀로’라는 부사이다.


문정희에게 시 또는 시 쓰기는 ‘외줄타기’이다. 외줄타기 위에서는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지만, 그 아래에는 어두운 맨땅이 있다. 삶의 기쁜 국면들은 드물게 지나가고 생활의 압박 속에서 하루하루 삶을 소모하는 삶, 비굴과 착종이 얽혀 있는 지난한 삶으로 추락하는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이 문정희 시의 핵이 아닐까. ‘맨땅’ 위에 ‘시의 외줄’을 걸어놓고 ‘살아 있음에 대한 구체적인 발언’을 쏟아낸 것이 문정희의 시가 아닐까.


시인의 고향인 보성으로 출발하기 위해 광주송정역에 마중 나와 있었다. 대합실로 걸어오는 단단하고 당찬 발걸음, 맹수의 갈기처럼 휘날리는 머리카락, 위엄과 자유분방함을 표방하는 스카프.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맞서는 기개와 대지를 품에 안은 듯한넉넉함으로 대모신大母神 같은 풍모를 남쪽의 도시에서 뵙게 되어 반가움이 앞섰다. 그녀는 언제나 환희와 열정으로 사람을 맞는다. 그리스 비극의 배우 같은 다소 과장된 몸짓과 표정에는 지나친 감격과 뼈저린 절망이 깔려 있다. 우리는 역 근처 허름한 국밥집에서 요기를 하고 보성으로 향했다.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보성으로 가는 길은 58번 국도인데, 이 길은 철길과 잇따라 이어져 있다. 생가가 있는 노동면은 보성군의 북쪽 윗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예재터널을 조금 지나 오른쪽으로 빠진 다음 좁은 지방 도로를 달려 그녀의 고향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보성고보를 잠시 다니다가 광주고보로 내려와 졸업하셨다. 시골의 가산을 지켜야 하는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직접 일군 자산은 크게 없지만 할아버지 대까지 소유하고 있던 땅도 컸고 가산이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는 지역유지이며 시골 토호土豪였다. 넓은 가택에는 소리꾼과 환쟁이가 자주 드나들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고 취미로 사냥을 즐기는 풍류가였지만, 자식들의 교육에는 누구보다 힘을 쏟았다. 친척들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는 그 당시 신여성이었다. 시골에서 일찍 한글을 깨친 몇 안 되는 여성이었고 아이들에게 직접 예방주사를 맞힐 만큼 식견도 높았다. 그녀의 이름을 ‘정희’라고 지은 것도 최초의 공군 여성 비행기 조종사인 ‘이정희’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마흔두 살의 나이에 막내딸인 문정희 시인을 낳았다. 1947년 5월 25일, 그녀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녀는 세 살 때 한국전쟁을 맞았다. 공포로 각인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전쟁은 밤하늘을 뒤덮은 불꽃놀이같은 총탄의 불빛이었으며 구체적인 기억은 인민군들을 피해 마구간에 숨어 있을 때 목덜미로 뿜어져오던 소의 숨결이다. 전쟁이 격화되자 보성 읍내로 피란을 가 사촌 언니들과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플래시 효과를 위해 터뜨린 마그네슘 분말 때문에 놀라 울면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그녀에게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시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있는, 유년 시절의 서사에 자주 나오는 가난과 고난이 거의 없다. 그녀는 초등학교를 유복한 환경에서 다녔다. 집에는 책이 많았고 나이 터울이 크게 나는 오빠들은 모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오빠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오는 날은 잔치가 벌어졌다. 집안의 관심이 오빠들에게 쏠리는 것에 시샘과 서러움이 일어나 그녀는 봉숭아 꽃대 뒤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세운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흙벽돌로 지은 한 칸짜리 건물이었다. 교적비에 따르면 정식 개교일은 1954년 2월 25일이며 노동국민학교 명봉분교로 시작해서 1959년 3월 명봉국민학교로 승격되었다가 1999년 노동초등학교로 통폐합됐다. 오래전 폐교된 뒤 호남농악연구소가 자리 잡았다가 우리가 찾았을 때는 연구소도 떠나고 황폐해져 있었다. 운동장은 들꽃들로 가득했고 초여름인데도 잠자리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교사校舍 앞에 있는 이순신 장군, 책 읽는 소녀, 이성복 동상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위태로웠고 곳곳에 이끼가 끼어 있었다. 정문에 있는 낡은 청동 종이 옅은 바람에 희미한 종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교정을 둘러보는 시인의 눈은 옛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초등학교가 개교했을 때 운동회 겸 마을잔치가 벌어져 아직 입학도 하지 않았지만 알밤 따먹기 놀이에 참여했던 일, 입학했을 때 어머니가 작은어머니와 떡을 해와서 선생님, 친구들과 나눠 먹은 일 등. 


“그 시절/ 당산나무 건너 새로 지은 분교에는/ 가방을 멘 아이가 나 하나뿐이어서/ 아이들은 언제나 나를/ 벌떼처럼 둘러쌌지”

(「책보와 가방」). 


초등학교 너머의 마을에 있는 그녀의 생가에는 들를 수 없었다. 그집은 이미 오래전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기도 하지만 집이 방치되어 쓰러지기 직전이어서 파란 비닐로 덮어둔 흉측한 외관을 보고 싶지 않다는 시인의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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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봉분교 교정에서


열한 살이 되던 초등학교 4학년, 명봉분교를 떠나 광주에 있는 서석국민학교로 전학한다.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광주의 고위직 경찰 간부의 집에서 기거했는데, 그 집은 숲속에 있었던 예전 동명호텔의 한 채를 개조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 집에서 난생 처음 침대를 보았다. 그 집 식구들의 아낌없는 보살핌을 받으면서 서석국민학교를 다닌다. 보성에서만 해도 그녀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존재였지만 광주에서는 보성 사투리를 쓰는 촌에서 온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의 친구들이 신은 샌들을 그녀는 처음 보았다. 그런 촌아이가 뜬금없이 학교에 있는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지만, 지나친 주목에 부담을 느껴 한 달도 안 돼 그만두었다. 그 당시 그녀는 우연찮게 죽음의 공포를 몸서리치게 느끼기도 하고 가족과 떨어진 외로움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의 문학적 원체험이 되었다. “고향과 부모를 떠난외로운 공간에 자연스럽게 문학이 들어온 것이었다.”* 서석국민학교는 그 당시 전국 과밀학교 2위로 전교생이 8천 명에 가까웠으며 3부제로 학기가 운영되었다. 수업 시간에 의무적으로 쓴 위문편지가 담임이었던 이중진 선생님의 눈에 들어 큰 칭찬을 받는다. 힘겨운 수업 시대에 그녀는 전국적인 백일장에서 장원을 오르내리며 《전남일보》에도 대서특필된다.

문정희, 「당당하고 호쾌한 득음을 위하여: 문학적 자서전」, 『키 큰 남자를 보면 외: 제11회 1997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 1996), 162~163쪽. 이하 인용은 쪽수만 표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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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초등학교 정문에서.


어려운 환경에도 그녀는 뜻하던 전남여중에 진학한다. 전남여중 재학 중인 1960년에 4·19를 겪기도 했다. 시적 감수성으로 충만한 선배들의 작품에 잠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많은 책을 읽으면서 시적 수련을 쌓아나갔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하여 큰오빠와 합류한다.


우리는 명봉분교를 나와 명봉역으로 향했다. 명봉역은 보성읍을 종착역으로 하는 기차가 보성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르는 간이역이다. 그녀가 서울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이별한 곳이 바로 이 역이다.


아직도 은소금 하얀 햇살에 서 있겠지

서울 가는 상행선 기차 앞에

차창을 두드릴 듯

나의 아버지

저녁노을 목에 감고

벚나무들 슬픔처럼 흰 꽃 터뜨리겠지

지상의 기차는 지금 막 떠나려 하겠지

— 「명봉역」 부분, 『다산의 처녀』(민음사, 2010)


명봉역 앞에는 예전의 큰 벚나무가 흘러가버린 세월만큼 밑동은 두툼해지고 가지는 조금씩 힘을 잃어갔지만 건재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명봉역」 시비가 가지를 늘어뜨린 벚나무 앞에 서 있었다. 듬직한 아버지와 두 팔을 든 기쁨에 찬 아이의 형상을 둥글고 따뜻하게 빚어놓은 시비. 시인은 「명봉역」 시비를 더듬으며 아버지를 떠올리는 듯했다. 잔디밭 사이로는 그녀의 대표작들을 디딤돌 같은 대리석에 새겨 바닥에 묻어두었다. ‘문정희 시인 길.’ 지난가을에 내린 낙엽이 디딤돌 시비 위에 쌓여 있어 손바닥으로 쓸어내고 하나씩 읽어보았다. 명봉역은 2003년에 방영된 드라마 <여름 향기>의 촬영지여서 한때 관광객이 꽤나 오갔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퇴색해가고 있어 마음이 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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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봉역 시비.

뒤로 역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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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봉역 대합실에서


우리는 명봉역을 떠나 시인의 외가가 있는 율포로 향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율포의 오른쪽에 위치한 명교리다. 시인은 외가 근처의 해변에서 가족들과 함께 물놀이를 하고 칼국수를 끓여 먹었던 따뜻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율포해수욕장을 둘러싼 솔밭의 초입에 시비 「율포의 기억」이 있다.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 「율포의 기억」 부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2004)


시인은 해변에서 넘실거리는 푸른 물과 가지런한 해조음이 만들어내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 힘겹게 하루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삶의 실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위태롭게 물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과 피를 토하듯 하루를 겨우 견뎌내는 삶과 고개를 숙이고 힘겹게 먹이를 건져 올리는 “슬프고 경건한 손”.  문정희의 시는 삶이라는 진창과 개펄에서 무릎을 굽히고 뽑아 올린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타국 생활이 잦았던 딸의 발등을 덮어주는 ‘낙엽’이었으며(「편지」), 그녀가 대지와 생활에 뿌리내릴 수 있는 거름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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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포의 기억」 시비.


시인은 아현동에 있는 중앙여중을 거쳐 진명여고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1961년 중앙여중 2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사인은 간경화였다. 광주시 중흥동에 있는 광주역 근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임종을 앞두고 집으로 옮겨 집에서 돌아가셨다. 진명여고는 큰오빠가 재직하고 있던 중앙청과 가까웠다. 큰오빠는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고 울타리였으며 버팀목이었다. 큰오빠는 그 당시 상공부 공무원이었고 작은오빠는 외무부에 재직했다.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 펴낸 첫 시집 『꽃숨』은 큰오빠의 후원과 주선 덕분에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국적인 고교 백일장에서 문명을 떨쳤다. 그녀는 극심한 환경의 변화에 곤란을 겪고 열패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자기 갱신을 통해 극복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산을 돌보다가 시인이 대학교 4학년 때 서울의 큰오빠 집

으로 올라오신다.


1학년 재학 중에 이화여대 주최 백일장에서 운문 부문 장원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졸업할 때까지 여러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운문과 산문,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장원에 오르는 눈부신 성과를 거둔다. 열일곱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 강연을 온 박목월 시인을 통해 릴케가 각인된다. 문학과의 진정한 첫 만남이었다. 홀트후젠이 쓴 『릴케』 평전을 깊이 공감하면서 읽었다. 재능을 소모하면서 젊은 날을 방황하던 릴케가 『신시집』 이후 보인 시적 기획의 변모와 성숙을 되새긴다. 『말테의 수기』의 첫 문장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모여든다. 하지만 내게는 도리어 죽기 위해 모인다는 생각이 든다”와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에 나오는 “밤과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아라. 쓰지 않고는 죽어도 못 배길 내면의 욕구가 있다면 너는 여기에 네 생애를 걸어도 좋다”, 이 구문들은 그녀의 시적 출발에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시인은 경희대 국문학과에서 주최한 백일장에서 장원에 올라 사 년 장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했지만 미당이 있는 동국대 국문학과에 진학한다. “동국대 백일장 장원의 인연과 시집 『꽃숨』의 제목과 서문을 써주신 미당 선생님의 주선에 따라 동국대에 진학했다.”(164쪽) 미당의 총애를 받으면서 시 창작과 시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기는 했지만, 다른 수업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그러나 국문학자이신 성봉 김성배 교수님이 그녀를 아껴서 원고 쓸 때 춥지 말라고 누비옷도 손수 사주시고 그녀가 뉴욕으로 떠났을 때 머리맡에 있는 난초 화분 하나에 그녀의 이름을 붙여주고 그녀의 성공적 귀환을 빌어주시기도 했다. 그녀는 이미 학교 안에서 시인으로 공인되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그녀는 숙원이었던 등단을 대학교 3학년 때 이루어낸다.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불면」이 당선된 것이다. 길 없고 사람도 없는 사막과 같은 밤을 지나는 고독과 흐린 달빛 아래에서의 불안을 “끈끈한 비밀들이/ 몸 비비는 소리”라는 이미지로 포착한 지점은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졸업 후 1972년 실질적인 첫 시집인 『문정희 시집』(월간문학사)이 출간된다. 자신의 진정한 시적 출발을 문단과 세상에 알리고 싶은 뜻에서 붙인 시집 제목이었다. 시 잘 쓰는 문학소녀가 아니라 ‘시인’ 문정희의 선언이 바로 『문정희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타고난 문학적 재능의 한계를 뚫고 나가려는 몸부림과 결혼과 함께 찾아온 여성의 현실에 대한 자각이 잘 녹아 있다. 그녀의 이후 작업은 문학적 허위와 가식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알몸과 맨몸으로 느끼는 세상의 환희와 고통을 가감 없이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이다. 자기를 둘러싼 굴레와 싸우고 관습적 억압에 저항하면서 진정한 여성의 언어를 획득하려는 노력이었다. 일상의 반란과 일탈로, 딱딱하고 권위적인 체제에 대한 희화로, 참혹한 현실을 핍진하게 담아내는 진정성으로 이 세계와 대결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김인환의 말처럼, 그녀의 시는 ‘긴장’과 ‘유희’ 사이에 있다.


졸업 후 잠깐 『주부생활』이라는 종합 문화지의 기자로 일하기도 하고, 명성여고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결혼 후, 결혼이라는 제도에 갇히고 속박된 여성의 해방을 위한 몸부림을 시에 담아내기 시작한다. 진명여고를 끝으로 교사 생활을 마감하고 그사이 동국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다. 생활에 붙박여 힘들게 살림을 꾸려가다가 다시 한번 모험을 감행한다.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아이 둘을 데리고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뉴욕대학교 대학원 종교교육과 석사 과정. 큰 포부를 가지고 떠났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뉴욕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과 빈곤 그 자체였다. 자유와 고독이 동시적으로 다가왔으며 사회적 타자로서의 자기를 인식하게 된다. 문학적인 개안開眼과 함께 모국어의 살과 뼈를 절실하게 몸에 새긴다. 예술에서는 반복과 답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 시기였다. 어머니는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 석 달 만에 돌아가신다. 아파트 발코니 난간에 줄을 매달아 관이 내려가는 것을 생전에 끔찍이도 싫어하셨던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지게꾼을 불러 계단으로 내려보낸다. 관을 지고 가는 그 느리고 고된 한 걸음을 유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뒤따랐다.


1975년 「새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고 뉴욕에서 이 년여를 체류한 뒤 귀국하여 몇 권의 시집을 내기는 했지만 문학적으로는 다소 정체된 팔 년간의 공백기를 거친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젊은 여성 시인은 강은교와 문정희였다. 강은교 시인이 다소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허무의 사상을 표방했다면, 문정희 시인은 여성의 현실과 여성적 자의식에 더욱 천착한 시들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중시와 정치시가 문단의 주류로 자리를 잡고 최승자, 김혜순, 고정희 시인 등이 화려하게 등장하면서 1970년대풍의 서정시는 문단의 가시권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녀의 공백기는 이것을 비껴가면서 그러한 시적 변모를 껴안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일대 전환이었으며 그러한 시적 노력은 소월시문학상이라는 보상을 받으며 새로운 부활을 맞이한다. 뉴욕이라는 강렬한 문화적 경험과 각성의 시기가 없었다면 대중적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여류의 틀에 갇히거나 전통적인 서정시의 틀 안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문정희의 시는 예술과 현실의 길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때부터 물질에의 속박과 길들임이란 문명 비판적 시선을 바탕으로 신생의 꿈과 생명력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줄기차게 밀고 나간다. 이때의 수상작들이 포함되어 있으면서 다시 한국 시의 장으로 화려하게 귀환한 시집이 바로 『오라, 거짓 사랑아』이며 이 시집이 문정희의 시 세계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한다.


문학은 잔인해요. 최고가 아니면 순식간에 낙오되거나 흩어져버려요. 당대의 문학 장에서 어느 정도 지분과 역할이 있었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만은 없었어요. 문단의 어른들과 문학적 스승들에게 재능이 있다는 걸 인정받기는 했지만, 그 재능에 기대어서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자각을 했어요. 결국 답은 간단했어요. 그 재능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잊고 쓴다. 그리하여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한국 문단은 창의력의 고갈과 시 정신의 쇠락에 대한 고민보다는 문학 장 또는 체제 내에서의 지위를 차지하는 데 더 골몰했던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서 그건 너무 소모적인 것이고 한국 문학을 협소하게 만드는 일이에요. 아까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멸된 사람도 많아요. 안타까운 일이죠. 먼저 바꾼 것은 독서의 방향성이에요. 각 언어권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섭렵해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림과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인접 예술 장르에 미친 듯이 빠져들었어요. 첨단의 세계문학과 예술의 조류가 제 속으로 밀려들어온 거예요. 그 당시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인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제 시가 넓은 시야를 획득하면서 일정 정도 발전적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이러한 노력과 경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한국에 돌아와서 발표한 시들이 한때 소재주의로 읽히기도 했지만, 그 시들은 뒤늦게 한국문학 장에 들어온 외국의 문화적 자산과 조류에 제가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오히려 후세대들과 공감할 수 있는 접점이 되어주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 시기는 한국문학 장에 다시 편입하기 위한 악전고투의 시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적 내공을 쌓는 소중한 담금질의 시기이기도 했어요.


삶을 즐긴다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 죽는다는 것을 뜻하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감각적 황홀에 탐닉한다는 측면에서 문정희의 시는 관능적이다. 그녀는 자신을 ‘나쁜 시인’이라고 부른다. 민중적 시선으로 비판적으로만 바라보는 현실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에 목숨을 걸 수도 있는 감각적 황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시집 중 질적이고 양적인 차원의 비약적 발전이 일어난 시기로 『오라, 거짓 사랑아』부터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까지로 본다. 초기 시집들 중 구하기 힘든 시집도 생기기는 했지만 여러 선집에서 그것을 담아냈기에 큰 아쉬움은 없다고 했다. 다만, 물의 도시인 베네치아에서 삼 개월간 체류하면서 물의 심상을 집중적으로 담아낸 『카르마의 바다』는 재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 시집들 사이에 장시집 『아우내의 새』가 있다. 단순히 3·1 독립운동의 부수적 사건으로 여겼던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이끈 유관순의 삶을 서사적 요소와 극적 요소를 포괄한 연작 서정시로 그려낸 시집이다. 이 시집은 유관순이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준비하게 된 과정과 그 흐름에서 얼마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단단한 정신과 결기로 일제의 간악한 고문을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절절하게 담아낸다. 유관순의 사인死因을 ‘자궁파열’이라고 상징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일제의 수탈과 억압이 궁극적으로는 우리 민족의 생명 말살을 노렸으며, 여성의 사회 참여가 사회적 모순과 여성 차별의 제도적 굴레라는 이중의 모순을 넘어서야 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시도한 장시長詩의 형식은 2006년에 발표한 「불새 시편」에도 연결되는데 안타깝게도 이 시는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그사이 시인은 아이오와대학교 국제창작프로그램(IWP)에 참여했는데 자유로운 시적 영혼이 만개하는 계기가 된다.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인 첫눈이 내린 날, 시인이 묵고 있는 여학생 기숙사 메이플라워에 갑자기 화재 경보음이 울렸다. 그녀는 샤워를 하다 말고 비누 거품도 제대로 닦지 않은 알몸으로 롱코트 하나만 걸친 채 계단으로 내려갔다. 물이 뚝뚝 듣는 채로 그녀는 기숙사 현관 앞에 덜덜 떨며 서 있었는데, 룸메이트였던 연극과 계약직 교수였던 쉘른이 차를 몰고 나와 같이 커피 마시러 가자고 했다. 머그컵에 담겨온 뜨거운 아침 커피는 향기로웠다. 쉘른은 시인에게 “예술가 자격증이 있는 네가 부럽다”고 했다. 예술가는 어떤 것도 넘나들 수 있고 현실적 문법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가지고 있음을 상찬한 것이다. 여권도 원고도 옛 추억이 깃든 사진마저도 다 불타버린다고 해도 예술가로서의 나 자신은 여기 있다는 강렬한 자각과 충만감을 획득한다.


문정희의 시는 시적 전개의 보폭이 크고 활달하며, 비옥한 생명력과 다산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거추장스러운 수사와 장식적인 표현을 절제하면서 화살처럼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오는 활달한 시어가 특징적이다. 시집 『응』이 죽음을 맞닥뜨려야만 하는 비참한 존재의 고독과 아름답고 시퍼런 ‘열정’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무한한 긍정의 세계를 담고 있다면, 『작가의 사랑』은 좀 더 차분한 어조로 어떤 경계에 서 있는 자의 위태로움을 내밀하게 간직하려는 태도가 돋보인다. 『응』이 분단과 독재, 여성의 질곡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현실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가 원시 또는 야생에 도달하려는 열망으로 꿈틀대고 있다면, 『작가의 사랑』은 다시 안으로 돌아와 분단과 독재, 여성 억압의 역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저항을 전면화한다. 『작가의 사랑』 후반부에 실려 있는 「애인」 「딸아」 「곡시」 등은 여성 억압과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를 다루고 있다. 도구화된 여성의 육체, 생산을 위한 매개체로서의 여성이라는 한정적 지위와 남성적 편견을 넘어서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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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지금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시인으로서의 자유를 빼앗기는 것 때문에 망설이기도 했지만 시인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관의 관장이 되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판단에 관장직을 수락했다. 세계적인 대문호인 괴테와 앙드레 말로, 보르헤스가 걸어간 길이라는 생각도 했고, 특히 여성 시인에게 다시없을 기회이자 새로운 도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으로서 의미 있는 성과로, 윤동주의 삶에 대한 엄격한 고증을 최초로 시도했으며 윤동주 문학을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오무라 마쓰오의 서재를 문학관 내에 따로 방을 마련해 옮긴 것을 꼽았다. 생전에 오무라 마쓰오를 직접 뵙고 4천여 권의 장서를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 그의 사후 부인에게 정중하고도 간곡한 부탁을 드려 그것을 문학관으로 옮겨왔다. 중복된 자료도 꽤 되기는 하지만 그중에는 남한에서는 구하기 힘든 북한과 연변, 중앙아시아 등에 흩어져 있던 귀중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인 학자가 한국문학의 소중한 자산을 모으고 그 의미를 깊게 파고든 점에서 소장 자료의 가치뿐만 아니라 그 정신의 고귀함을 모셔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올해 초 아침달에서 『그 끝은 몰라도 돼』라는 시집을 펴냈다. 젊은 독자와의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싶다는 뜻에서였다. 그녀는 최근에 생물학적인 나이가 아니라 문학에서의 노년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을 탐독하면서 서양 지성사의 한 획을 그은 여성들의 삶과 글쓰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의 진정한 나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부대끼면서 가시밭길을 얼마나 헤쳐나가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체감했다. 현실의 고통과 문학적 모험에서 물러서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자신의 젊음을 젊은 독자들과 나눌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에 아침달에서의 시집 출판은 의미 있는 ‘외출’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얼마 전에 열렸던 도서전에 참가해 젊은 시인들 및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새로운 감각과 감수성을 가진 낯선 인류를 목도했다고 한다. 윗세대와의 동반과 계승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던 예년과 달리 급격한 단절을 맞닥뜨리게 되었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당대의 요구와 시류가 일시적으로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 지속되는가는 다른 문제다. 문학의 본질인 시대와 인간의 내면에 맺히는 언어의 깊이와 폭은 시간을 이겨낸다는 확고한 믿음을 그녀는 버리지 않고 있다.


올해 3월 말에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점에 있는 ‘말하는 돌의 정원’에 그녀의 시비가 세워졌다. 아시아의 시인으로는 유일하고 여성 시인으로도 유일하다. 나선형으로 나열된 시비들 중 아일랜드 시인인 셰이머스 히니 다음인 세 번째에 자리잡고 있다.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나뿐인가/ 하늘 아래 가득한질문 하나.” 


그녀는 몇 번의 굵직한 문학상의 수상 소감의 말미에 항상 이런 말을 덧붙인다. ‘나는 이제 또 책상에 앉아야 한다.’ 그녀에게는 기발표작과 미발표작을 포함해 서랍 속에 넣어둔 원고가 이미 시집 두 권 분량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 출판사 나남에서 나올 예정인 문학선집의 막바지 작업에 여념이 없다. 그녀는 여전히 현역이다. 늙을 시간이 없다. 




문정희 

전남 보성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랐다. 1969년 데뷔 이후 시집 『오라, 거짓사랑아』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 등을 썼으며, 장시·시극·산문을 비롯하여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창작프로그램, 프랑스 ‘시인들의 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아바나 국제도서전 등에 참가했고, 11개 언어로 옮겨진 15권의 번역 시집이 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수상했다.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심장보다 높이』를 냈다. 신동엽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유심상 등 수상.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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