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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가을] 내 마음의 시 한 편 - 임권택이라 쓰고 '영화'라 읽는다

2025-09-03
조회수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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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이라 쓰고 '영화'라 읽는다 - 임권택 편

신달자


임권택은 누구인가? 영화라면 온몸이 불꽃으로 타오르는 사람? 영화 하나로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예술의 우위에 다다른 사람? 그것이 빼놓을 수 없는 주제라면 절벽 위라도 목숨 걸고 오르는 사람?


임권택…… 임권택…… 이 이름만 들으면 영화가 떠오른다.

임권택은 영화이고 영화는 임권택이라고 정의를 내릴 것만 같다. 임권택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라는 뜻으로 읽힌다. 〈만다라〉가 떠오르고 〈씨받이〉가 떠오르고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떠오르고 〈장군의 아들〉이 떠오르고 〈서편제〉가 떠오르고 〈달빛 길어올리기〉가 떠오른다. 영화와 임권택은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겹쳐져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다.


겨우 약속된 장소로 가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건강이 염려스러웠고 애써 잡은 약속이 잘 진행될지도 근심이었다. 그러나 근심과 염려는 쓸모없는 일이었다. 감독님의 모습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악수를 하면서 만나 반갑다는 인사도 놓치지 않았다.


“아, 반가워요. 이렇게 또 만나네요.”


이런 평범한 인사가 그 순간 특별하게 들려 나는 마음속으로 참 다행이라고, 오늘은 행운의 날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머, 감독님!” 인사를 드리며 손을 잡았다. 2013년 시인협회 회장을 맡았을 때 만해마을에 임 감독님 부부를 초청했던 일도 잘 기억하고 계셨다. 임 감독님 얼굴에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마음이 순수 그 자체여서 나이 들지 않는 소년이 순간순간 나타나 지나간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934년 11월 2일이 선생님 탄생일인데 호적에는 36년 5월 2일로 되어 있잖아요?”


“아이가 튼튼하지 않았는지 제대로 살까 몰라 출생신고를 미루었던 거예요. 미루고 미루다 이 년이 지난 후에 죽진 않겠구나 생각하고 신고를 한 것이지요.”


그렇다. 그 옛날에는 제 나이를 정확하게 가진 사람도 흔치않았다. 나도 일곱째 딸로 태어났지만 딸 하나가 죽자 일곱째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 5월에 태어났는데 12월에 읍사무소에 불려가서 겨우 출생신고를 했다. 감독님은 두 살이나 어려졌으니 좋으실까……. 그러려니 하고 지나온 세월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 속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따질 일도 아니고 그런 세월이 저 어디쯤에 있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시가 있으신가요?”


“김소월의 「못잊어」를 좋아합니다. 가끔 혼자 읊조리기도 합니다.”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눈을 감은 채 조금은 더듬거리며 한 소절 읊조리시는 모습이 딱 소년 같다. 아이 같은 모습에서 천하를 놀라게 하는 영화를 만드시다니, 저 안에 무슨 철통같은 예술의 마술이 있는지, 아니면 천만 개의 예술적 숨통을 일으키는 만능의 힘이 임감독님을 둘러싸고 있는지......


“영화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아버지가 좌익 운동을 하셨는데 경찰들이 수시로 집에 와서 쑥대밭을 만들었어요. 어머니도 경찰에 불려갈 때가 많았지요. 집안의 그런 분위기가 너무 싫었어요. 결심을 했지요.  부산으로 가출을 했어요. 어쩌다 어쩌다 부산이에요. 피란 때라 그땐 물이 귀했어요. 그때는 물 먹기도 어려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엄청 고생을 했지요. 공장에 들어가 신발을 팔았지요. 근근이 배를 채웠어요. 그러다가 군화 파는 장사꾼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가는데 저도 따라갔지요. 그 신발공장이 결국 서울에서 영화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먹고살기 위해 거기 끼어들었어요. 1955년의 일입니다. 장사꾼들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저도 영화의 현장에서 꿈틀거렸어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길인데 먹고사는 일 하나 때문에 영화라는 걸, 영화라는 길로 가기 시작했어요.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1957년 정창화 감독의 제작팀으로 들어가 〈풍운의 궁전〉 〈비련의 섬〉 〈사랑이 가기 전에〉의 촬영 현장에서 심부름을 했지요. 그 후 1960년 〈햇빛이 쏟아지는 벌판〉 〈지평선〉 〈장희빈〉의 조연출로 일약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어요. 정창화 감독님 밑에서 영화 공부를 한 셈이지요. 제가 주변머리가 없어 옮겨다니지 못하는 꼼생이라 느긋하게 배워서 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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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영화감독. 1936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했다. 1962년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뒤 〈잡초〉 〈만다라〉 〈안개 마을〉 〈길소뜸〉 〈씨받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서편제〉 〈취화선〉 〈화장〉 등 현재까지 총 105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대종상 감독상, 아시아영화제 감독상, 문화훈장 보관장, 프랑스 문화훈장, 제14회 청룡영화상 대상, 제17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제30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제55회 칸영화제 감독상(2002)을 수상했으며 2002년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영화 입문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길〉이라는 영화였습니다.”


“〈길〉에서 길을 찾았군요.”


“한 번 본 영화는 절대 두 번 안 보는데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La Strada, 1957년)은 두 번 봤어요. 뿌리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일이 제 이야기라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뿌리를 잃은 채 흘러 다니는 길의 그림자가 바로 저 자신으로 다가왔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그 영화의 모든 것이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걸, 나를…… 자기 자신을…… 길이라는 영화에서 아프게 바라보게 된 것이 계기라고 볼 수 있어요.”


“감독으로서 첫 데뷔 영화는?”


“〈두만강아 잘 있거라〉였습니다. 스물일곱 살 때였고요. 1962년이었어요. 처음이라 결심이 대단했었어요. ‘이게 안 되면 나도 끝이다’라고 생각했지요. 이것이 안 되면 단칼에 내 인생도 박살 나는 것이다, 그랬는데 히트를 쳤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를 않았어요. 너무 애리애리하게 어렸던 거죠. 하다못해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키면 내 앞에 놓았다가 다른 사람 앞에 먼저 놓았어요. 감독으로 보기 어려웠던 시기죠. 그 영화의 명장면은 스키 타는 장면인데 ‘이 부분을 놓치면 관객이 고개를 돌린다’라고 생각하고 그야말로 죽자 사자 찍었거든요. 성공을 했습니다.”


“예술은 목숨을 내놓고 목숨을 다시 되돌려받는 것인가 봐요.”


“그렇다고 봐야 하나요. 첫 영화가 성공하고 나서 고향을 갔어요. 정말 화려한 귀향이었어요. 한 친척이 절 기생집에 데리고 갔어요. 처음이지요. 그날 밤 장구, 가야금, 판소리…… 거기다 훗날 병신춤으로 유명해지신 공옥진 여사가 한마당 초대공연을 했어요. 여러 가지 경험을 하던 중 가장 내 가슴에 와서 박힌 것이 바로 판소리였어요. 나와 함께 오래 머물며 살았지요. 내 호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결국 여러 영화를 지나온 후에 〈서편제〉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몸과 정신이 기억하는 판소리가 꿈을 이룬 거지요.”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스물일곱의 밤이었네요.”


“소리를 담은 영화를 반드시 만들어야지 하고 마음 안에 다짐 하나를 쿡 찔러 넣고 살았어요. 〈서편제〉로 가기까지 먼 길이었습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흑백영화였고, 〈장희빈〉이 나에게는 첫 컬러 영화였어요. 영화는 영화로 변해가고 있었어요. 액션, 검술, 코미디 다 지나가고 한 사람의 여정을 따라가는 〈잡초〉 같은 영화가 지나가고 반공 영화 〈증언〉이 지나가고, 그러다가 영화로 밥도 먹으며 〈왕십리〉를 기점으로 예술가 임권택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지요. 서서히 영화 주제에 대한 소망과 실천이 뚜렷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적 아름다움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자라는 굳건한 의지가 꿈틀거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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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작가의 소설도 영화화하셨지요?”


“「익명의 섬」을 각색해서 〈안개 마을〉로 만들었어요. 〈만다라〉에서 〈안개 마을〉로 가면서 롱테이크 화면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자연이 가슴속으로 확 들어와요. 미학적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요. 아름다운 길을,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 주기 위해 롱테이크 화면을 만들었습니다.”


“긴 호흡으로 주인공이 걸어가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즐거움이었습니다. 평화로운 논둑길이 옆으로 펼쳐져 있고, 하늘은 평화로운 그 길에서 퍼져 나오고, 겨우겨우 목을 타고 나오는 소리는 지금도 가슴이 저릿합니다. 사실은 저도, 아니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이 그 길을 걷고 싶었을 겁니다. 효과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한 오 분쯤 지나가지 않을까요?”


“네, 네. 그래요?”


감독님은 다시 소년처럼 웃으셨다.


진심으로 바라볼 때, 마음으로 볼 때 영화는 내 안의 세계를 넓혀간다. 도저히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일과 사건과 사랑을 마치 내가 경험한 것처럼 훈련시키는 것이 영화 아닌가. 임 감독님은 그렇게 많은 영화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예술적 경험과 훈련을 자연스럽게 체험하도록 만드신 분이다. 예술적 영화라는 이미지가 몇 개의 잎에 닿을 정도였는데 임 감독님이 잎과 줄기를 거쳐 뿌리까지 완전히 적셔주신 장본인이 아닌가 생각했다.


〈서편제〉는 개인적인 도약이기도 하고 대한민국 영화의 도약이기도 했다. 한국 영화의 흥행 기록을 갱신하는 역할까지 모두 가능했다는 점에서 ‘솟아올랐다’라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딸이 춤추고 소리하며 시골길을 걸어가는 긴 장면은 도저히 잊을 수 없으며, 소리를 소리로 만들기 위해 딸에게 눈이 멀게 되는 약을 먹이는 장면은 끔찍하면서도 한 세계를 열어가는 중독적인 사랑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길은 인생사가…… 그래요, 인생사가 저 길에 묻혀 있는 것 같았어요. 한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눈물의 가슴으로 지나가고 있는 길……. 거기에 우리 〈아리랑〉을 붙이고 춤을 붙이고 민요의 가락을 붙였어요. 그렇게 고단한 인생사가 걸어가는 유랑의 길, 저도 ‘이거다’ 하며 그 길에서 오래 머물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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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편제〉는 상하이 국제영화제 감독상 및 여우주연상을 받는 영광이 주어졌다. 그 뒤에도 헤아릴 수 없는 상을 받으셨다. 금호예술상, 호암예술상, 칸영화제 감독상,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노력한 만큼 받았다고 해야 할까. 세계가 인정해준 상들이 푸짐한 것은 마음 따뜻해지는 이야기이다. 뿐인가, 〈씨받이〉로 맺은 강수연 배우와의 인연도 클 것이다.


뒤이어 〈태백산맥〉 〈축제〉를 찍으시고 〈달빛 길어올리기〉까지 오게 되었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천 년을 가도 그대로 살아 있는 한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당시 나는 『종이』라는 시집을 상재했고 감독님도 알고 계셨다. 전주에서 촬영을 하다가 내게 전화를 하신 적이 있다.


“신 선생, 한지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하고 물으셨다.


“한국의 정신이며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런 내용이 대사에 나오는 걸로 기억된다. 그렇게 섬세하게 대사 하나를 깊이 생각하시는 감독님이다. 그 후 현재로서는 마지막 작품인 〈화장〉이란 영화로 임권택은 영화, 영화는 임권택이란 이미지를 지금도 겹겹이 간직하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만드신 영화가 백 편 가까이 되는데 가장 엄지척을 하고 싶은 영화는?”


“〈만다라〉 찍고 〈씨받이〉 〈서편제〉……. 아유, 제가 만든 영화는 조금 부족해도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것이다. 그럴 것이다. 모든 영화는 임 감독님의 살이며 뼈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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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영화 인생에서 미인들을 많이 만나셨는데 누가 가장 아름다웠나요?”


“바로 저 사람!”


감독님은 바로 앞에 앉아 계신 아내 채령 여사님을 가리켰다. 여사님 앞에서 다른 여자 이름을 입 밖으로 내는 게 어려우신가 보다 생각하다가 다시 채령 여사를 바라보니 아, 정말이다, 여사님은 너무너무 아름다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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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을 통해 데뷔. 

『열애』 『종이』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등 다수의 시집을 냈으며, 

묵상집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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