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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여름] 시인의 뿌리를 찾아서 - 고형렬 편

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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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과 동해를 오가는 연어의 꿈, 고형렬 편

신철규


등대는 어둠과 안개 속에서 제 역할을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등대는 땅과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면서 지치고 고단한 바다 위의 배들을 부른다. 등대는 땅의 손톱이며 바다의 현관이다. 그 빛과 소리는 어서 오라는 간절한 손짓이고 이제는 쉬어도 된다는, 고생했다고 두드리는 따스한 손바닥이다. 빛이 닿는 곳이 지나가면 그곳에 어둠이 더 깊이 들어찬다. 높낮이가 불규칙한 그 울음소리는 깊은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듯하다. 해저에서 울리는 고래의 울음소리처럼 낮게 깔리면서 멀리까지 퍼져 나간다. 뿔은 지상에서, 평면에서 돋아난 뾰족한 것이다. 그것은 밖을 향해 치받는 무기이기도 하고 존재의 위엄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안에서 치받쳐 오르면 몸 전체를 관통하면서 나를 풀어버리고 흩어지게 한다. 뿔이 뿔을 낳고 뿔이 뿔을 부른다. 쌍비읍의 형상과 아래의 리을, 그리고 그 사이를 매개하면서 누르는 모음 ‘ㅜ’는 지상에 단단한 발을 뻗댄 수사슴의 형상처럼 보인다. 뿔은 솟구쳐 오르고 뿌리는 아래로 파고든다. 그 방향은 반대이지만 그 둘은 뻗어 나간다는 속성을 공유한다. 뿔은 끊임없이 뿌리로부터 이탈하고 뿌리를 끊어내고 떠오르려 한다. 등대에서 뻗어 나오는 빛은 때로는 땅끝에서 돋아난 뿔의 형상을 띠기도 한다. 고형렬의 시와 삶은 등대의, 등대로 향하는 꿈이면서 제 안의 뿔을 날카롭게 하는 담금질이면서 그 뿔을 안으로 삭이는 고투의 과정이기도 하다.*


* 이후에 나오는 시인의 생애와 문학적 이력은 『등대와 뿔』(도서출판 b, 2014)에서 발췌 및 축약한 것들이며, 시인의 구술로 일정 정도 보완한 것이다. 이하 인용은 쪽수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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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시인을 만나기 위해 그가 거처하고 있는 양평역으로 향했다. 그는 2008년 4월 서울을 떠나 양평읍 지평면 송현리에 터를 잡고 살다가 지금은 양평 읍내에 있는 작업실에서 주로 기거한다. 4월 초의 겨울과 봄을 오가는 변덕스러운 날씨여서 걱정을 했는데 양평에 도착하니 하늘이 개고 따뜻했다. 사진작가와 양평읍의 시장에서 해장국을 먹고 양평역 근처에서 시인을 만났다. 근작 시집의 프로필을 보고 갈기처럼 뻗은 머리와 깎지 않은 수

염 때문에 산악인이나 화가 같은 풍모를 예상했지만 단정하게 자른 머리와 다듬은 수염 때문에 이지적인 풍모가 두드러졌다. 양평역에서 우리는 시인의 고향인 속초로 향했다.

대관령터널을 빠져나오자 비와 눈이 섞여서 내리고 바람도 꽤 세게 불었다. 영동과 영서의 날씨는 천차만별이었다. 양양의 초입에서 북으로 거슬러 속초로 올라가던 중 미시령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미시령으로 올라가는 국도는 막혀 있어 잠깐 차를 세우고 운무로 덮인 설악산을 마주했다. 울산바위가 눈앞에 있는데도 보이지 않을 만큼 운무가 짙게 드리웠다. 울산바위 쪽에는 눈이 꽤 흩날리는 듯했다. 설악산이 큰 산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시인의 유년 시절, 영동에 위치해 있는 속초에는 눈이 많이 왔다. 신작로 양쪽으로 치운 눈이 사람 키만큼 높이 쌓일 정도로 대설이 오기도 했다. 1969년의 대설 때는 설악산 계곡에서 큰 인명 피해가 있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이 담긴 작품이 『사진리 대설』이다. 시인에게 설악산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위용 때문에 위압감을 주었다고 한다. “산은 늘 험상궂고 어둡고 멀고 높고 두렵다.”(31쪽) 설악의 본래 이름은 ‘흰뫼’이다. 속초에서 바라보면 5월 초까지 눈이 쌓여 있어 흰빛을 띠고 있었다. 꽤 높은 봉우리가 몇 개나 늘어서 있는 산이기에 설악 산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속초束草는 풀을 묶다, 풀에 묶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묶은 풀인 풀단이나 한 단의 풀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장대한 길이와 우뚝 솟은 높이를 가진 설악의 지형이 소처럼 보였기에 그 소가 뜯어먹을 풀단이 너르게 펼쳐져 있는 것이 속초라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지명인지도 모른다. 속초의 지형 또한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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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령 중턱에서


고형렬 시인은 1954년 11월 8일,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620번지(그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양양군 토성면)에서 태어났다. 실제로 그가 태어난 곳은 사진리인데 그 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장천과 사진리가 합해져 장사동이 되었으며 1998년부터 영랑동이 되었다.  그의 본적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175번지. 이렇게 실제 출생지와 본적지의 차이가 큰 것은 그의 가계의 내력과 출생 이력의 복잡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등단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할 무렵부터, 그리고 오랫동안 약력에 1954년 해남 출생이라고 적었지만 실제로는 속초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2006년에 나온 시집 『밤 미시령』에는 속초 출생이라고 되어 있다). 그가 해남에서 시간을 보낸 것은 이 년 남짓. 아버지 고남석은 해남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해방 전에는 서울에서 중학을 다녔고 해방 후 목포에 내려와 사회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을 맞아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기구한 아버지의 삶의 내력은 아들인 시인의  삶에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시인이 태어난 사진리(모래기)는 해방 당시만 해도 삼팔선 이북에 위치해 있었다. 한국전쟁 휴전 뒤에는 남한으로 편입된 수복지구였다(북측의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땅이지만).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남향의 큰 마을은 동서로 나뉘어서 바닷말(마을)은 토박이들이 많이 살았고 산말은 외지에서 흘러온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길가에는 초가집들이 즐비하고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북쪽 끝머리에 형제섬이 있었다. 오른쪽 작은 섬(째복섬)이 바다로 더 나가 있고 왼쪽 큰 섬(섭바위)이 뭍에 좀 더 가깝다. 마을 한가운데로는 풀둑 사이로 도랑이 흘렀고 영랑호 동쪽에는 버덩 위에 형성된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거기로 신작로가 이어졌다. 신작로 건너편에는 은모래톱이 있었고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신작로 끝에 바다와 잇닿는 영랑호 끄트머리를 가로지르는 나무 갯다리(지금의 영랑교)가 있었고 공동묘지 너머 갯다리를 지나면 속초였다. 시인의 초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전쟁의 포화와 탱크의 무한궤도 때문에 야산은 민둥산이었다. 물론 그 당시 겨울을 나고 취식을 위한 땔감 때문에 나무는 제대로 크기도 전에 다시 베여 나갔다. 봄이면 마을 사람들이 그 산에 나무를 심었다.


시인의 생가는 사진리의 모랫불 안쪽 마을 한가운데쯤에 위치해 있었는데, 부엌 하나에 방 두 개를 갖춘 서향집이었다. 작은 마당에는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바람이 불면 스산한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마당 문 옆에는 디딜방앗간이 있었다. 마당 너머로 바다까지 가리는 것 없이 트여 있었다. 한여름 마당에서 먹던 째복칼국수를 그는 잊지 못한다. 겨울이 다가오면 지붕에 이엉을 새로 얹었다. 마당에서는 남쪽 능선 끄트머리에 있는 속초등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유년 시절부터 있어온 가장 오래된 것들 중에서 유일한 존재가 그 등대이다.”(17쪽) 그의 집은 오징어를 말려서 팔기도 했지만 주업은 명태 덕장이었다. 동네에서 제일 큰 덕장을 가진 집이었다. 시인은 고씨네 덕장집 장남이었다. 집 앞 신작로로는 그때만 해도 군사 작전 때문인지 탱크 부대가 자주 지나가기도 했다. 탱크가 지나가면 모래 구름이 자욱하게 신작로를 덮었다. 속초항은 사계절 내내 오징어로 가득했다.


아버지 고남석은 해남 구림리가 고향이었으며 1974년 43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지금으로 보면 요절에 가까울 만큼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한때 소설가를 꿈꾸었으며 장서가였다. 성년이 될 무렵 한국전쟁을 맞고 고향을 떠나 동해안으로 피란을 왔으며 처가인 삼척에서 잠깐 지내기도 했지만 작고할 때까지 속초에 정착해서 살았다. 삼척 태생인 어머니 이동녀는 피란 중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해 속초 사진리에서 장남인 고형렬을 낳는다. 외갓집은 뎅구리배(원양어선)가 여러 척 있는 부유한 집안이었다. 두 분은 시인이 일곱 살 되던 해인 1960년, 본인 밑으로 여동생 둘을 더 낳고 나서 정식 혼례를 올렸다. 혼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살림을 살아야 했을 만큼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언제라도 고향인 해남에 내려가서 살려고 했던 마음이 컸는지도 모른다.


아명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금의 시인 고형렬이라는 이름자는 초등학교 입학 무렵 해남의 친척 어른이 지어서 속초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낸 것이다. 부모님은 1961년 9월 20일에 혼인신고를 하고 닷새 뒤인 25일에 뒤늦은 출생신고를 한다.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행정적 절차를 더 미룰 수 없었던 탓일 것이다.


1950년대 후반 속초에 가뭄이 크게 들어 온 마을에 쌀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흉년을 맞게 된다. 이때 아버지는 집안의 전답이 많은 해남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큰아들인 시인을 해남으로 먼저 내려보낸다. 1962년 9월, 시인은 강원도 속초 영랑초등학교에서 해남군 삼산면 북삼산초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북삼산초등학교는 아버지의 모교이기도 하다. 속초를 떠나기 직전 찍은 가족 사진 속의 시인은 눈이 동그랗고 귀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두상이 둥글다. 조금은 놀란 듯도 한 큰 눈은 총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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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리 등대에서


시인은 삼산면 신활리 할머니 댁에서 이 년여를 지냈다. 대흥사가 지척에 있는 마을이었다. 할머니 김곡녀는 할아버지를 잃고 외양간의 소와 함께 적막하게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들의 행방을 찾는 지서의 순경들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방 안 벽장에는 금서가 있었다. 1949년 4월에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나온 『조선문학전집』. 그 열 번째가 『시집』이었는데 거기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보았다. 홍명희의 『임꺽정』, 김동인의 『광화사』, 이효석의 『황제』, 이용악의 『오랑캐꽃』, 서정주의 『귀촉도』 등 한국문학의 보물 같은 책들이 벽장 속에 있었다. 어린 나이라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이 책들은 시인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긴다. 책 속에는 온갖 사람들의 불행한 삶이 그려져 있었는데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에 매혹을 느낀다. 이는 속초에 있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문학의 첫 경험이 된다.


증조부는 석전 박한영 선생과 가까운 사이였다. 할아버지는 대흥사의 재정이 어려워 스님들이 공부를 하러 오지 않는다는 사정을 듣고 거의 전 재산을 대흥사에 시주했다. 지금의 대흥사가 큰 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시주의 힘이 컸던 것이다. 대흥사에는 지금도 석전 스님이 비문을 새긴 할아버지의 공적비가 있다. 두륜산월초당화상공적비. 이 공적비에서는 할아버지를 월초당月初堂 또는 월초 화상和尙이라고 칭한다. 전쟁 초반 해남 또한 인민군 점령지였는데 엎치락뒤치락하는 전황의 와중에 할아버지는 남한의 군경에 의해 총살된다. 마침 그 당시 귀가하던 아버지는 동네 어귀에 나와 있던 친척으로부터 몸을 피하라는 말을 듣고 급히 대흥사로 피신했다가 해남을 떠나게 된다.


시인은 이 년 남짓 해남에서 살다가 1964년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 해남에서 속초로 다시 전학을 온다. 어머니가 큰아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방학을 맞아 속초로 돌아왔다가 눌러앉게 된 것이다.  여름에는 느지막한 저녁에 아버지와 영랑호의 고바우 근처에서 멱을 감았고 겨울이면 연을 날리고 영랑호에서 방구(썰매)를 타고 얼음을 지쳤다. 고바우 반대편에 있는 웅장한 범바우가 어린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한여름엔 혼자 불가(백사장)에 담요 하나만 들고 가서 밤하늘의 별을 보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그리고 아버지가 선물로 《소년한국일보》를 구독해주었다. 동네에서 유일한 구독자였다. 연재만화인 「홍길동」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실제로 소설을 쓰지는 않았지만 속초의 동아서점에서 『현대문학』을 꾸준히 사보고 소설을 낭독해주는 라디오 프로 〈라디오 극장〉을 즐겨 들으셨다. 기분이 좋거나 술로 거나해지면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겄네」를 소리 높여 외우셨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 따른 좌절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덕장 앞에 서 있는 아버지를 본 적이 많았다. 그는 가지가 부러진 한 그루의 나무 같았고 나는 그 나무 곁에 있는 한 그루의 작은 나무 같았다.”(280쪽) 아버지의 좌절된 꿈은 시인 자신의 운명의 한계로 작동하기는 했지만, 한편 또 다른 돌파구가 된 듯하다.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자기가 받아 안고 나가야만 하는 것은 글을 쓰는 추동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운명처럼 후에 시인은 아버지가 애독하던 문예지인 『현대문학』으로 등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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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호 범바우를 배경으로


영랑호 가까이에 있는 산이 달마봉이고 그것을 따라가는 달마봉 줄기가 있어요. 그 뒤에 울산바위가 자리 잡고 있고요. 오른쪽에 뾰족뾰족 솟아 있는 것이 공룡능선이에요. 그 너머가 마등령이고요. 마등령 넘어가는 곳에 오세암이 있고 오세암 너머에 봉정암이 있어요. 가운데 제일 낮은 고개가 인제로 넘어가는 미시령이에요. 오른쪽 끄트머리 봉우리가 신선봉이고요. 그 밑 마을이 성대리인데 이성선 시인의 고향 마을이에요. 시비도 세워져 있지요. 신선봉 너머 쭉 더 가면 고성군 진부령이 나와요. 왼쪽 끄트머리의 대청봉을 넘어가면 양양의 한계령이에요. 속초에서 보면 설악산의 맞은 편 중앙에 영랑호가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산세와 지세만 보면 큰 인물이 날 만한 곳이 바로 속초예요.


1966년 집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속초중학교(그 당시 교동에 있었다)에 입학한다. 학교를 오가는 거리가 멀었지만 길 중간쯤에 서점이 있어 세계문학을 접하는 중요한 근거지가 된다. 니체나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카프카, 카뮈 등 실존주의 철학책들과 소설들에 깊이 빠진다. 그리고 불교 서적을 읽었다. 진지하게 출가를 고민한 것은 아니었으나 불교 공부를 위해 신흥사에 계신 오현 스님을 찾아간 적도 있다. 뵙지 못하고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 후에 인연이 닿는다. 그에게 조금씩 가난으로 점철된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허무주의적 운명과 고독에 대한 사유, 그리고 우울이 싹 트기 시작한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삶을 고통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교과 공부는 멀리했다. 영어 공부를 하더라도 교과서나 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시기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영어로 된 문법책을 고서점에서 구해 공부했다. 학과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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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호에서 바라본 설악산


여름이면 오징어를 말리느라 바빴고 겨울이면 명태 덕장에서 살아야 했다. 살아 있는 명태는 생태, 말린 것은 황태, 크기에 따라 소태, 중태, 대태로 불렸다. 완전히 말린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말린 건태를 이른 겨울이면 관태를 했다. 짚사리로 건태의 머리를 묶은 다음 뾰족하게 날을 세운 싸리나무 가지로 그 끝을 꿴다. 그것을 관태貫太라고 한다. 열 마리 묶음이 두 개면 1두름, 100두름이면 1바리(발이)라고 했다. 어황이 좋을 때면 수십 바리가 들어올 때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엄동설한에 동네 아낙들과 밤 늦게까지 그 많은 명태의 배를 땄다. 명태는 머리에 있는 이석耳石 빼고는 버릴 것이 없었다.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내장, 껍질, 지느러미까지도 맛과 영양분을 가지고 있다.


1972년 2월에 속초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집을 나간다. 행선지로 결정한 것은 제주도였다. 이 년 반 정도의 방랑기의 시작이다. 가방 하나를 메고 강릉,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들어간다. 절간에 들어가 불목하니로 일하기도 하고 공사장에서도 일했다. 그해 봄 제주도 중문에 있는 제주 제2횡단도로 공사장인 쇄석장에 들어가 돌을 나르는 일을 했다. 제주도를 나와 남도의 여러 도시를 전전한다. 구례에서는 제빵공장에서 화부火夫로 일하기도 하고 대흥사의 불목하니가 되기도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귀향한다. 시인은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방랑의 끝에 결국 중이 되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는 오랫동안 설악산의 중이 되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만이 유전遺傳의 단절을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덕장을 헐값에 넘기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1974년 겨울, 시인은 짧은 준비 기간을 거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면서기가 된다. 그의 첫 발령지는 고성의 대진 현내 면사무소. 대진은 남한의 최북단인 고성에서도 끝자락에 있어서 그 당시만 해도 군사적 긴장이 팽팽했고 미개발 지역이라 속초 사람들은 가기 꺼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직장을 얻으면서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독서와 사색,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나는 니체와 장자를 읽으며 당대적인 것을 찾기에 고심했다.” (216쪽)


면서기는 중심인 행정부의 손가락 끝과 같은 것이다. 서류상으로 남는 모든 기록과 정보들은 면서기의 손발과 땀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는 자신이 담당한 마을의 대소사와 각 가정의 형편을 훤히 들여다볼 만큼 열심히 돌아다녔다. 한 해만 지나도 사무실의 캐비닛이 꽉 찰 정도로 서류가 가득 쌓였다. 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삶의 애환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알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그의 소중한 문학적 자양분이 된다. 단절과 고립 그리고 변방이라는 지역적 환경이 시를 쓰는 촉발점이 되기도 했다. 그는 처음 시를 끄적거리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그의 등단작인 「장자」 외 여러 시편을 집필한다. 현내면은 휴전선이 걸친 곳이기도 했다. 그의 초기 시에 나타난 분단 의식은 그 당시의 고민을 담고 있다.


시인은 고성군 현내면에서 속초시청으로 발령받는다. 그는 이때부터 속초의 문인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는데 그중 한 분이 소설가 윤흥렬 선생이다. 윤흥렬 선생은 1969년에 사랑 문우회를 만들고 1970년대 초반에 동인지이며 문학지인 『갈뫼』 창간호를 낸다. 『갈뫼』 동인으로 시인 이성선, 이상국, 소설가 최명길 등이 참여한다. 시인은 그 당시 영북의 시단을 알리는 시로 이성선의 「시인의 병풍」, 이상국의 「동해별곡」 그리고 자신의 「대청봉 수박밭」을 꼽는다. 『갈뫼』 동인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습작이 이어지고 합평 모임에도 참여한다. 그는 퇴고를 거듭한 시 몇 편을 윤흥렬 선생께 드렸는데, 그것을 그 당시 『현대문학』 추천위원이었던 자신의 친구 이원섭 시인께 보냈다. 한 달 뒤, 그는 현대문학으로부터 추천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莊子」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장자」는 장자의 탄생과 출분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시인 자신의 출사표와 같은 시이다. 이 시에는 몽환적인 이미지를 동반한 현실로부터의 초탈과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지상의 삶 사이의 길항이 그려져 있다. “솔쟁이꽃 환한 연봉蓮峯으로 달은 지고/ 꽃 창포菖蒲 터진 아침 물결로 흘러가고/ 떠나던 서산西山 어깨로 노을이 피어오른다.” 시인에 따르면, 이 시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달리 고개의 밤길에서 착상하였다고 한다. 초탈과 속박의 대립은 이후 그의 시의 주조(leitmotif)를 이룬다.


시인은 1981년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오성희와 결혼한다. 결혼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늦여름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이사한다. 공무원 생활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도 있었고 문학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처음 정착한 곳은 영등포구 신길5동이었다. 오랜 구직 끝에 분재수석사에 입사한다. 분재와 수석에 관한 잡지(격월간지)를 내는 곳이었다. 회사는 종로의 세운상가 바로 앞이었고 면서기보다는 나은 월급이 나왔다. 서울에서 취직한 것을 기뻐한 아내는 자신과 함께 집을 나와 회사 건물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 돌아갔다. 1983년 고운기의 주도하에 안도현, 최영철 시인 등과 함께 ‘시힘’ 동인을 결성한다. 이후에 김경미, 강태형, 오태환, 김백겸, 양애경 시인 등이 합류한다. 그는 1985년 창비에 입사하여 2005년에 퇴직한다. 정확하게 이십 년을 창비의 시선을 꾸리는 데 바친다. 200권 넘는 시집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문학에는 여러 장르가 있지만 저는 시와 편집(일)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상대적으로 시장경제에 따른 장시간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반면, 시는 시간의 간격을 두고 순간순간 찾아오는 것이에요. 시는 상대적으로 노동과는 조금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시는 많지 않은 언술들을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편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 창작은 편집 기능 또는 기술과 가까울 수밖에 없지요. 시는 떨어

져 있는 것들을 때로는 정합적으로, 때로는 비정합적으로 묶고 연결하는 거예요. 그 연결 고리의 의외성과 여백이 좋은 시가 되게 하는 것이지요. 저는 편집자를 부를 때 면서기란 말을 살짝 뒤틀어서 ‘시서기’라고 하는 것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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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입사 전에 시인은 문지 무크지 『우리 세대의 문학』에 「백두산 안 간다」를 발표한다. 이 시는 시인의 분단과 월경의 의식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계기가 된다. “신인 시절 그리고 1980년대 나의 문학적 과제는 여하히 경계를 넘는 일이었다. 어떤 사유를 거치든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명분과 진실성이 있어야 했다.”(235쪽) 문단의 지형상 그는 리얼리즘 계열 또는 참여 시인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시인은 자신을 문학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한 근원과 초월에 대한 탐구가 그의 시적 화두였기 때문이다. 다만, 한반도의 정치적·역사적 상황에서 그것을 고민했기 때문에 내용적으로는 정치의식과 역사의식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지만, 방법론적으로는 언어의 자기 초월성을 밀고 나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1985년 『80년대 민족시인 신작선 1』에 실린 「사리원길」에서도 정치적 금기와 벽을 일상의 상상력을 통해 넘나든다. 그의 시는 한편으로는 과감함과 결단성을 내장한 정치 시로 읽히기도 했지만, 시인 자신은 그의 오랜 삶의 내력에 따른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시로 생각한다. 지워지고 사라진, 또는 막혀 버린 회로를 뚫기 위한 자신만의 시적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창비, 2020)에 실린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슬픔으로—어느 날 평양에서」는 양평을 평양으로 뒤집는 순간 바뀌는,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현재인 분단 현실의 막막한 벽 또는 인식의 막을 맞닥뜨리는 것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의 중요한 문학적 실천 중 하나는 과거와 역사의 재생산이며 복기 또는 현재화라고 할 수 있다. 정작 그는 북한에 가본 적이 없다. 2000년대 초중반 남북 교류가 활발해진 시기에 여러 번 갈 기회가 생기기도 했지만 가지 않았다. “나는 늘 그립기 위해북에 가지 않았다.”(300쪽)


시인은 국가기관에 의해 두 번이나 연행 및 구금되는 경험을 한다. 첫 번째는 1985년 첫 시집 『대청봉 수박밭』이 국가체제 전복 혐의로 정보기관에 사찰되어 치안본부 산하에 있는 대공분실로 연행된 것이다. 사흘 동안 『대청봉 수박밭』 전체에 대한 창작 동기와 주제를 쓰고 나왔다. 다른 하나는 전국적인(?) 대규모 사건에 연루된 사람으로 지목되어 안기부에 끌려가 취재를 받고 나온 일이다. KBS 〈9시 뉴스〉에 간첩단 중 하나로 안기부에 연행되었다는 속보가 나온 것이다. 그는 남산 안기부 대공수사실로 연행되었다. 속초의 박영희 시인이 입북하면서 그와 관련된 문인들이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가 그 당시 탄광촌 취재를 다닌 것이 정보기관에 의해 은밀히 추적을 당하고 있었던 데 있다.


1960년대 초중반 사진리에는 고한, 사북에서 광부로 일하면 출세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당시는 가정과 공장에서 화력으로 쓰인 석탄이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부터 시인의 머릿속에 각인된 고한, 사북은 휘황찬란한 불야성의 아름다운 환상 세계의 이미지였다. 깜깜한 산속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는 않았지만 한번 가보고 싶다는 선망을 불러일으켰다. 1980년대 후반 토요일이면 오전 근무를 마친 뒤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은 채 청량리역에서 태백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근 이 년 동안을 주말마다 태백을 찾아 탄광촌도 돌아보고 갱도에 들어가서 광부들이 작업하는 장면도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막걸리집은 일을 마친 광부들의 욕망과 회한으로 들끓고 있었다. 나누는 대화만 기록해도 장편소설 하나는 너끈히 쓸 수 있을 만한 폭발력을 내장하고 있었다. 그는 탄광촌에 대한 기념비적인 르포를 남기고 싶었다. 서사가 사라져가는 시대의 마지막 보루를 사북, 고한으로 생각했고 조금만 옷을 입히면 금방이라도 문학이, 시가 될 것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시인 자신의 말로 그는 그때 탄광촌에 미쳐 있었다. 그때의 메모와 녹음테이프가 한가득인데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두 달 동안 그의 주변, 속초뿐만 아니라 고성, 해남까지 그의 행적이 닿은 곳들은 모두 합동수사본부의 기관원들에게 털렸다. 군경뿐만 아니라 문체부까지 들어간 합동수사본부의 위력과 무서움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뒤져도 운동권이나 북쪽과의 끈(접선 경로)이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혐의를 벗었다. 그는 안기부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주저앉으면서 쓰러졌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귀가했다. 그는 그 후부터 사북, 고한에 가지 못했다. 그쪽으로는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정치적 자기 검열의 힘이 이렇게 세다.


마지막으로 시도해본 태백선 열차에서 우연찮게 신문에 실린 연어에 관한 토막 기사를 읽게 된다. ‘올해부터 양양 내수면에서 연어 치어를 방류한다.’ 그에게 다시 활로가 열린 것이다. 그는 그길로 양양에 있는 연어연구소로 향한다. 그는 미친 듯이 연어의 생태를 공부하고 연어의 회귀 경로를 속속들이 찾아다닌다. 십 년을 연어에 매달려서 나온 결과물인 『은빛 물고기』는 20세기의 끝자락인 1999년에 출간된다. “가장 오래 취재하고 상상했던 연어에 대한 장편 산문 『은빛 물고기』는 정신적 단절의 불구를 극복하고자 한 창작이었다. 우리 문학에 새로운 내용의 가지 하나를 북쪽으로 뻗고 싶었다.”(235쪽) 그에게 이 책은 단순히 연어의 생태에 대한 문학적 보고서가 아니라 우리의 분단 체제, 환경 문제, 자본주의적 인간의 욕망, 근원으로부터의 소외 등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문명과 역사에 관한 진단과 비판이라는 의미가 있다 . 


시인은 2008년 4월 서울을 떠나 양평군 지평면의 갈지산 남향 기슭 송현리에 정착한다. 여기서 그는 아시아 시 전문지를 표방한 『시평』을 2011년 통권 54호까지 꾸린다. 별다른 후원도 없이 자력으로 낸 잡지였다. “『시평』의 아시아적 비전은 울란바토르에서도 하노이에서도 베이징과 도쿄에서도 『시평』과 같은 잡지를 만들고 인터넷망을 가지는 교차 교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322쪽) 그사이 한·아세안 시인 문학 축전을 두 차례 꾸리기도 했다. 


양평에 정착하고 나서 낸 시집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와 『유리체를 통과하다』에는 유리 또는 유리체(유리알)의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그것은 폐쇄와 분리를 만들어내는 인공물이며 그곳에서는 불구와 훼손된 삶을 보지 못하게 하는 조작된 꿈과 희망만이 남는다. 그것은 빛남과 고귀함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인간의 생명성을 파먹으면서 인간을 대지로부터 유리시킨다. 유리체는 때로 얼음의 이미지로 전환되는데 그만큼 차갑고 비정하며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 도시를 떠나 자연과 접한 한적한곳에서 살면서 이러한 시선이 더욱 깊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얼마 전부터는 양평 읍내에서 주방이 딸린 조그만 집필실을 얻어 독서와 사색과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매일 남한강을 걷는다. 남한강은 독특하게도 북쪽으로 흐른다. 그는 강을 거슬러서 남쪽으로 한참 내려가다가 되돌아온다. 남한강의 물은 북한의 금강산에서 흘러온 것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양수리에 모여 한강이 되어 서쪽으로 빠져나가는데 그 끄트머리에서 임진강의 물과 다시 만난다. 그는 남한강을 걸으면서 남북의 분단된 상황에 대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특히 겨울의 여린 해가 남쪽 산에 걸쳐서 빛살이 되어 강의 표면에 비늘 같은 은빛 물결을 만들어낼 때 걷는 것을 좋아한다. 산책 중에 내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닌 이상한 첫 문장이 문득 떠오를 때 여전히 환희로 들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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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문장이 만들어내는, 그것을 따라가는 낯선 길이 시의 근원을 찾아가는 회귀로 이어지고 생각이 따라가지 못하는 시적 직관의 속도에 몸을 맡긴다. 그는 앞으로 쓸 시에서 또 다른 낯선 전환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시인은 2024년 12월에 『칠일이혼돈사』라는 시집을 냈다. 남해와 북해가 중앙이라는 땅에 와서 일곱 개의 구멍을 내어 살리려고 하다가 죽는 이야기를 장시의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고형렬 

1979년에 시 「장자莊子」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대청봉大靑峯 수박밭』 『밤 미시령』 『유리체를 통과하다』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 등을 냈다. 그 외 연어의 일생일란을 그린 장편 산문 『은빛 물고기』와 ‘고형렬 에세이 장자’ 시리즈 등을 펴내면서 자기 언어를 갱신하고 중심 아닌 주변과 현실 너머의 메타포를 형상하는 데 주력해왔다. 시선집 『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와 함께 첫 번째 소리 시집을 출시하기도 했다. 2024년에 ‘아시아 포엠 주스’ 1호 『몇 개의 문답과 서른여섯 명의 시인과 서른여섯 편의 시』를 기획했다. 유심상, 현대문학상, 백석문학상 수상.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심장보다 높이』를 냈다. 신동엽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유심상 등 수상.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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