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불암, 웃으며 걸어오는 사람 - 최불암 편
신달자
저기 웃으며 한 사람이 걸어온다. 아주 자연스럽게……. 지나치게 멋을 부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추陋醜를 보이는 것도 아닌. 자연스럽게 너무 자연스럽게 걸어온다. 최불암이다.
최불암은 암자인가? 사람인가? 센 바람이 부는데도 얼굴에 웃음을 날리며 터덜터덜 걸어오는 저 사람……. 얼굴 주름도 경건해 보이는 인상, 주변에 놓치지 않고 시선을 주며 생각이 깊어 보인다. 고민이 있는 사람은 덥석 끓어오르는 울분이라도 풀어놓고 싶어지는 사람……. 늘 익숙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걸음은 곧게 걸어오는 사람……. 그분은 바로 배우 최불암이다.
약속 장소를 몇 번 바꾸며 여의도 어느 곳에서 만났다. 잠시 병이 다녀가셨다는 소릴 들었지만 웃음과 말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최불암 선생님을 만나기 전 몇몇 분에게 최불암은 어떤 분이냐고 물었다.
“소탈하고 인정 많고 늘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이라고 말했 다. 연기인데 바로 “그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는 배우가 최불암이라는 말이었다.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어주는 사람…….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주거나 차비라도 선뜻 내주는 사람일 거라고도 했다. 이런 배우가 있다는 것은 개인을 떠나 한국적 자산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럼 그렇지, 최불암 배우는 한국의 높은 가치 창출의 자산인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에 그냥 바라만 보아도 위로와 위안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좋아하는 시가 있나요?”
“김광균의 「와사등」을 좋아합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와사등」을 외우는 것이다. 표정은 간절했다. 그리고 혼자 시작하고 혼자 울컥하는 것이다.
“나는 시를 외우면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읊고는 멋쩍게 웃으셨다. 이 또한 최불암이다. 시 한 줄을 외워도 울컥하며 눈물샘이 솟는 사람, 그는 감성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긍정하는 소위 통하는 사람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전원일기>에서도, <수사반장>에서도, 그의 목소리만 들리는 <한국인의 밥상>에서도 최불암의 특수한 감성이 배어나오곤 했던 것이다. 그래 바로 저것이었을 것이다. 촉촉이 젖어오는 정이라는 것.
그는 타고난 예술가의 진면목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던 것이다.
“「와사등」은 한국 광부들이 많이 읊은 시예요.”
선생님은 잘 알고 계셨다. 와사등은 석탄가스를 도관에 흐르게 하여 불을 켜는 등이다. 아마도 광부들은 시 「와사등」을 읊으며 고단함과 마음의 외로움을 견뎠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최불암 배우가 좋아한 시라고 하면 광부들은 더 애정을 가지고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시를 외웠을 거라는……. 그리고 조금이나마 시린 가슴이 데워지기도 했을 거라는 것을.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
김광섭 선생의 세 번째 시집 『해바라기』의 첫 장에는 의미심장한 글이 있다.
시가 시는 아니요 여기 기대어 섰다가 총총히 걸어가는 그 사 람일 뿐이다.
“그 사람”은 시인의 그리운 사람이기도 하고,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광부이기도 하고, 최불암 배우이기도 하고, 어쩌면 우리 모두이기도 할 것이다. 그 말의 여운이 길— 다.
최불암 배우 이야기에서 ‘은성 銀星’을 비켜갈 수는 없다. 그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는 명동에서 ‘은성’이라는 주점을 하셨다. 1953년 문을 연 은성은 밥집이기도, 술집이기도, 예술가들의 말풀이 장소이기도 했다. 그 시절 은성을 모르는 예술인은 없었다. 은성은 절친의 가슴 한복판이기도 하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내는 작업실이기도 했던 곳이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지만 여기 모이는 예술가들은 과도한 멋과 철학, 사상을 토해내면서 그 시대를 앞장서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 시대적 예술 문화를 부흥하고 있었다고 해야 맞다. 은성은 예술인들로 더 활발해졌다. 소설가 이봉구를 비롯해 변영로, 박인환, 전혜린, 임만섭, 김수영 등 그 시대 초월적 사상을 가진 예술가들이 한 공간에서 밥그릇을 비우고 술잔을 기울였다. 빈 술잔을 부딪쳐도 불꽃이 일었다.
김수영은 은성에서 자기의 중심을, 사상을 가다듬었고 작곡가 윤용하는 <보리밭>의 악상을 다듬었다. 박인환의 그 유명한 <세월이 가면>도 은성에서 만들어졌다. 이 시는 후에 이진섭이 작곡해 명동의 노래가 되었고 국민의 노래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최불암은 제아무리 막아도 예술인의 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예술인으로 뼈가 단단해지고 예술인으로 세포가 성장했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최불암 배우. 1940년 6월 15일 인천에서 출생했다. 1959년 연극 <햄릿>을 통해 연 극배우로 데뷔한 후, 1966년 MBC 라디오 드라마를 거쳐 1967년 서울중앙방송(현 KBS) 공채 탤런트에 뽑혀 텔레비전 드라마에 공식 데뷔했다. <수사반장> <전원일기> 등의 장수 드라마를 통해 서민적 이미지로 사랑받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배우가 됐다. <한국인의 밥상> 등 영역을 넓혀가며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후배 양성뿐 아니라, 수십 년간 취약계층 아동 및 위기 청소년 문제에 힘쓰고 있다.
“김수영은 눈썹이 시커멓게 날아갈 듯했고 전혜린은 정말 멋졌어요.”
김수영은 시인의 나라에서 김수영의 나라를 만들었고 전혜린은 당시 모든 연예인을 포함해 최고 인기있는 여성이었다. 미묘한 매력이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그와 차를 마신 적이 있는데 멋진 남자도 아닌데 몸의 세포가 움직였다.
“김수영은 마포에서 살 때도 자주 만났어요. 몸과 의식이 펄 펄 살아 있는 것 같았지요.”
최불암 배우는 이미 어린 시절 예술과 문화의 조립이 단단하게 제작된 사람이었다. 오늘날 그의 빛나는 연기는 폭력적으로 지우려 해도 불가능한 그의 재능이 되었다.
“배우가 된 동기는?”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우연이면서 필연이었죠. 아버지가 《인천일보》의 영화사를 하고 계셨고 어머니의 은성에서 만나는 예술인들이 주는 영감이 배우 쪽으로 몰아가며 만든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중국의 영화인들을 만나기도했고, 호감이 갔고, 그러다가 신상옥 감독의 <마적>에서 말 타는 역을 맡았지요. 이십 대였어요.”
어머나……. 젊은 나이에 시작해서 지금 팔순을 훨씬 넘기셨으니 무대라는, 연기라는, 영화라는 그 어떤 배역을 맡더라도 그 연기 속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일은 자연스럽겠다. 연기 생활이 팔십 년, 아니 백 년이 되어간다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흔에 이승만 역할을 했지만 더 젊어서도 뭔가 안정적인 노인 역할을 자연스럽게 풀어나갔다. <전원일기>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그의 심리적 풍경이 그렇게 순하게 인간의 내면을 이끌어간 것이 아닐까.
“가장 아끼는 작품이 있나요?”
“모든 작품이 다 귀하지요. 작품마다 영혼이 옮겨진 듯 그렇 게 해왔어요. 시극이었는데 김소월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여>는 정말 나 자신으로 타올랐던 것 같아요.”
그렇다. 그는 “연기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분신’이라는 단어를 썼다. 내 의식에서 만들어진 인간, ‘나’가 ‘너’로, ‘나’가 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연기를 그렇게 해온 그 뜨거운 열정이 오늘의 최불암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경험의 성城을 이루며 연기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되어가는 세월 속에서 그는 백 명, 천 명의 생을 살아온 것 아닌가.
문득 우리의 삶 가운데 너무나 중요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뜻이 맞아야죠.”
그의 어조가 강하다. 신뢰, 소통, 이해는 바로 ‘뜻’이니까. 뜻이란 국어사전에서 말이나 글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는 내용이라고 되어 있다. 영어로는 ‘meaning’, ‘message’라고도 볼 수 있으니 내면의 생각이 서로 잘 맞는 것으로 보면 뜻이 맞아야 인간관계는 이루어지고 성사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회적 관계를 떠난 그 모든 인간관계에서 ‘뜻’이 맞아야 하는 일은 너무나 절실하고 당연하다. 뜻은 바로 자신이며 영혼까지 닿는 일이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확신과 의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 자본의 체제를 얻고 소유하기 위해 작아지고 상처받은 것들에 대한 생각이 확고했다. 그 자본주의를 따르느라, 편리 위주를 따르느라 인본사상, 휴머니즘, 특히 ‘문화예술’이 더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나마 예술인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력으로, 손끝이 타들어가는 자력으로 오늘의 한국 예술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투표권만 중시되는 결과를 만들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철컥 가슴이 울려왔다. 그리고 그는 힘주어 강하게 말했다.
“예술의 힘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을 만들지요.”
나는 마음속으로 ‘옳소!’ 하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이런 원천적 예술에 대한 믿음으로 한 생애를 예술인으로서 세상을 바꿔보려는 의지를 가진 채 살아왔을 것이다. 더러 사회는 예술을 반강압적으로 이끄는 사례가 있지만, 이미 그는 ‘예술의 힘’이 의식구조의 뿌리로 뻗어 있으며 줄기나 잎으로 번져 있는, ‘예술의 예술, 그것으로 성장한 예술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역이 있는지 물었다.
“한국인은 누구인가? 어떤 뿌리를 가지고 있나? 어떻게 나라를 안정감 있게 성장시킬 수 있나? 그런 고민을 하는 역이 있다면…….”
그렇다. 너무 잘 어울리는 역이 될 것이다. 정주영 같은 인 물도 잠시 대화에서 나왔지만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내는 사람 들에게서 한국인의 뿌리를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그 는 현실적으로 성실히 이루며 살고 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전국 후원회회장을 오래 하고 계신다. 두터운 지원뿐 아니라 재단을 알리는 홍보대사까지 맡고 소년 수형자들의 교화를 위해 다양한 공연을 탐구하는 ‘제로캠프’를 운영 중이다.

최불암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본명 ‘영한’이었을 때, 가난과 미래에 대한 암담함으로 방황하던 시절, 해선 안 될 생각까지 했었지만, 그를 빗나가지 않게 잡아주었던 것은 어머니와 연극이었다고 한다. 한편의 연 극을 위해 동지들이 모여 문학, 음악, 미술, 무용 등을 이야기 하며 밤을 지새우던 순간은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예술을 향한 타는 목마름에 술을 살 돈이 없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술이었으면 하고 외쳤던 그 시절이 행복이었다고 젖은 눈으로 말한다. 영한은 예술을 알면 행복을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가 시선을 돌린 곳이 김천 교도소의 소년 수형자들이었다. 사회에서 격리된 소년들에게 예술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심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가난한 영한이 조우했던 그 시절의 예술처럼 철창 안에서 만난 예술이 김천소년 교도소 소년 수형자들의 운명을 바꿔주기를 소망했다. 아무것도 없는 0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담아 ‘제로캠프’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십 년 넘게 영한은 묵묵히 일하고 있다.
제로캠프의 사무국장 손영민 씨는 최 선생님과 거의 그림자처럼 같이한다. 감사한 일이다. 모든 방향이 같다. 감사한 일이다. 선생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대뜸 외치듯 말한다.
“최불암은 개똥도 아니다!”
더 하고 싶은 것이 그리 많을까. 더 채우고 싶은 것이 그리 많을까. 스스로에게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자아 의식에서 허전한 것도 있을 것이다. 왜 외롭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선생님! 손을 비벼 더 따뜻한 손으로 자신을 쓰다듬어주세요. 지금까지 선생님이 하신 일은 차고 넘칩니다. 너무 많아요. 너무너무 많아요.
그리고 그는 눈이 젖어왔다.
“혼자 울 때가 있어요. 어머니가 일생 일하시면서 나의 불쏘시개가 되어주신 걸 생각하면…….”
하늘에 있는 어머니가 이 눈물을 알까……. 대한민국이라는 이 지상에 어머니가 볼까 봐 눈물을 삼키는 최불암이라는 선한 배우 아들이 있다. 종이로 치면 한지 같은 사람이다. 천년을 가도 그대로 자신의 체질을 유지하는 사람.

신달자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을 통해 데뷔.
『열애』 『종이』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등 다수의 시집을 냈으며,
묵상집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를 펴냈다.
최불암, 웃으며 걸어오는 사람 - 최불암 편
신달자
저기 웃으며 한 사람이 걸어온다. 아주 자연스럽게……. 지나치게 멋을 부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추陋醜를 보이는 것도 아닌. 자연스럽게 너무 자연스럽게 걸어온다. 최불암이다.
최불암은 암자인가? 사람인가? 센 바람이 부는데도 얼굴에 웃음을 날리며 터덜터덜 걸어오는 저 사람……. 얼굴 주름도 경건해 보이는 인상, 주변에 놓치지 않고 시선을 주며 생각이 깊어 보인다. 고민이 있는 사람은 덥석 끓어오르는 울분이라도 풀어놓고 싶어지는 사람……. 늘 익숙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걸음은 곧게 걸어오는 사람……. 그분은 바로 배우 최불암이다.
약속 장소를 몇 번 바꾸며 여의도 어느 곳에서 만났다. 잠시 병이 다녀가셨다는 소릴 들었지만 웃음과 말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최불암 선생님을 만나기 전 몇몇 분에게 최불암은 어떤 분이냐고 물었다.
“소탈하고 인정 많고 늘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이라고 말했 다. 연기인데 바로 “그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는 배우가 최불암이라는 말이었다.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어주는 사람…….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주거나 차비라도 선뜻 내주는 사람일 거라고도 했다. 이런 배우가 있다는 것은 개인을 떠나 한국적 자산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럼 그렇지, 최불암 배우는 한국의 높은 가치 창출의 자산인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에 그냥 바라만 보아도 위로와 위안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좋아하는 시가 있나요?”
“김광균의 「와사등」을 좋아합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와사등」을 외우는 것이다. 표정은 간절했다. 그리고 혼자 시작하고 혼자 울컥하는 것이다.
“나는 시를 외우면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읊고는 멋쩍게 웃으셨다. 이 또한 최불암이다. 시 한 줄을 외워도 울컥하며 눈물샘이 솟는 사람, 그는 감성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긍정하는 소위 통하는 사람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전원일기>에서도, <수사반장>에서도, 그의 목소리만 들리는 <한국인의 밥상>에서도 최불암의 특수한 감성이 배어나오곤 했던 것이다. 그래 바로 저것이었을 것이다. 촉촉이 젖어오는 정이라는 것.
그는 타고난 예술가의 진면목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던 것이다.
“「와사등」은 한국 광부들이 많이 읊은 시예요.”
선생님은 잘 알고 계셨다. 와사등은 석탄가스를 도관에 흐르게 하여 불을 켜는 등이다. 아마도 광부들은 시 「와사등」을 읊으며 고단함과 마음의 외로움을 견뎠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최불암 배우가 좋아한 시라고 하면 광부들은 더 애정을 가지고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시를 외웠을 거라는……. 그리고 조금이나마 시린 가슴이 데워지기도 했을 거라는 것을.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
김광섭 선생의 세 번째 시집 『해바라기』의 첫 장에는 의미심장한 글이 있다.
시가 시는 아니요 여기 기대어 섰다가 총총히 걸어가는 그 사 람일 뿐이다.
“그 사람”은 시인의 그리운 사람이기도 하고,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광부이기도 하고, 최불암 배우이기도 하고, 어쩌면 우리 모두이기도 할 것이다. 그 말의 여운이 길— 다.
최불암 배우 이야기에서 ‘은성 銀星’을 비켜갈 수는 없다. 그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는 명동에서 ‘은성’이라는 주점을 하셨다. 1953년 문을 연 은성은 밥집이기도, 술집이기도, 예술가들의 말풀이 장소이기도 했다. 그 시절 은성을 모르는 예술인은 없었다. 은성은 절친의 가슴 한복판이기도 하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내는 작업실이기도 했던 곳이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지만 여기 모이는 예술가들은 과도한 멋과 철학, 사상을 토해내면서 그 시대를 앞장서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 시대적 예술 문화를 부흥하고 있었다고 해야 맞다. 은성은 예술인들로 더 활발해졌다. 소설가 이봉구를 비롯해 변영로, 박인환, 전혜린, 임만섭, 김수영 등 그 시대 초월적 사상을 가진 예술가들이 한 공간에서 밥그릇을 비우고 술잔을 기울였다. 빈 술잔을 부딪쳐도 불꽃이 일었다.
김수영은 은성에서 자기의 중심을, 사상을 가다듬었고 작곡가 윤용하는 <보리밭>의 악상을 다듬었다. 박인환의 그 유명한 <세월이 가면>도 은성에서 만들어졌다. 이 시는 후에 이진섭이 작곡해 명동의 노래가 되었고 국민의 노래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최불암은 제아무리 막아도 예술인의 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예술인으로 뼈가 단단해지고 예술인으로 세포가 성장했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최불암 배우. 1940년 6월 15일 인천에서 출생했다. 1959년 연극 <햄릿>을 통해 연 극배우로 데뷔한 후, 1966년 MBC 라디오 드라마를 거쳐 1967년 서울중앙방송(현 KBS) 공채 탤런트에 뽑혀 텔레비전 드라마에 공식 데뷔했다. <수사반장> <전원일기> 등의 장수 드라마를 통해 서민적 이미지로 사랑받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배우가 됐다. <한국인의 밥상> 등 영역을 넓혀가며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후배 양성뿐 아니라, 수십 년간 취약계층 아동 및 위기 청소년 문제에 힘쓰고 있다.
“김수영은 눈썹이 시커멓게 날아갈 듯했고 전혜린은 정말 멋졌어요.”
김수영은 시인의 나라에서 김수영의 나라를 만들었고 전혜린은 당시 모든 연예인을 포함해 최고 인기있는 여성이었다. 미묘한 매력이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그와 차를 마신 적이 있는데 멋진 남자도 아닌데 몸의 세포가 움직였다.
“김수영은 마포에서 살 때도 자주 만났어요. 몸과 의식이 펄 펄 살아 있는 것 같았지요.”
최불암 배우는 이미 어린 시절 예술과 문화의 조립이 단단하게 제작된 사람이었다. 오늘날 그의 빛나는 연기는 폭력적으로 지우려 해도 불가능한 그의 재능이 되었다.
“배우가 된 동기는?”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우연이면서 필연이었죠. 아버지가 《인천일보》의 영화사를 하고 계셨고 어머니의 은성에서 만나는 예술인들이 주는 영감이 배우 쪽으로 몰아가며 만든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중국의 영화인들을 만나기도했고, 호감이 갔고, 그러다가 신상옥 감독의 <마적>에서 말 타는 역을 맡았지요. 이십 대였어요.”
어머나……. 젊은 나이에 시작해서 지금 팔순을 훨씬 넘기셨으니 무대라는, 연기라는, 영화라는 그 어떤 배역을 맡더라도 그 연기 속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일은 자연스럽겠다. 연기 생활이 팔십 년, 아니 백 년이 되어간다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흔에 이승만 역할을 했지만 더 젊어서도 뭔가 안정적인 노인 역할을 자연스럽게 풀어나갔다. <전원일기>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그의 심리적 풍경이 그렇게 순하게 인간의 내면을 이끌어간 것이 아닐까.
“가장 아끼는 작품이 있나요?”
“모든 작품이 다 귀하지요. 작품마다 영혼이 옮겨진 듯 그렇 게 해왔어요. 시극이었는데 김소월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여>는 정말 나 자신으로 타올랐던 것 같아요.”
그렇다. 그는 “연기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분신’이라는 단어를 썼다. 내 의식에서 만들어진 인간, ‘나’가 ‘너’로, ‘나’가 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연기를 그렇게 해온 그 뜨거운 열정이 오늘의 최불암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경험의 성城을 이루며 연기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되어가는 세월 속에서 그는 백 명, 천 명의 생을 살아온 것 아닌가.
문득 우리의 삶 가운데 너무나 중요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뜻이 맞아야죠.”
그의 어조가 강하다. 신뢰, 소통, 이해는 바로 ‘뜻’이니까. 뜻이란 국어사전에서 말이나 글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는 내용이라고 되어 있다. 영어로는 ‘meaning’, ‘message’라고도 볼 수 있으니 내면의 생각이 서로 잘 맞는 것으로 보면 뜻이 맞아야 인간관계는 이루어지고 성사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회적 관계를 떠난 그 모든 인간관계에서 ‘뜻’이 맞아야 하는 일은 너무나 절실하고 당연하다. 뜻은 바로 자신이며 영혼까지 닿는 일이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확신과 의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 자본의 체제를 얻고 소유하기 위해 작아지고 상처받은 것들에 대한 생각이 확고했다. 그 자본주의를 따르느라, 편리 위주를 따르느라 인본사상, 휴머니즘, 특히 ‘문화예술’이 더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나마 예술인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력으로, 손끝이 타들어가는 자력으로 오늘의 한국 예술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투표권만 중시되는 결과를 만들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철컥 가슴이 울려왔다. 그리고 그는 힘주어 강하게 말했다.
“예술의 힘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을 만들지요.”
나는 마음속으로 ‘옳소!’ 하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이런 원천적 예술에 대한 믿음으로 한 생애를 예술인으로서 세상을 바꿔보려는 의지를 가진 채 살아왔을 것이다. 더러 사회는 예술을 반강압적으로 이끄는 사례가 있지만, 이미 그는 ‘예술의 힘’이 의식구조의 뿌리로 뻗어 있으며 줄기나 잎으로 번져 있는, ‘예술의 예술, 그것으로 성장한 예술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역이 있는지 물었다.
“한국인은 누구인가? 어떤 뿌리를 가지고 있나? 어떻게 나라를 안정감 있게 성장시킬 수 있나? 그런 고민을 하는 역이 있다면…….”
그렇다. 너무 잘 어울리는 역이 될 것이다. 정주영 같은 인 물도 잠시 대화에서 나왔지만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내는 사람 들에게서 한국인의 뿌리를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그 는 현실적으로 성실히 이루며 살고 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전국 후원회회장을 오래 하고 계신다. 두터운 지원뿐 아니라 재단을 알리는 홍보대사까지 맡고 소년 수형자들의 교화를 위해 다양한 공연을 탐구하는 ‘제로캠프’를 운영 중이다.
최불암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본명 ‘영한’이었을 때, 가난과 미래에 대한 암담함으로 방황하던 시절, 해선 안 될 생각까지 했었지만, 그를 빗나가지 않게 잡아주었던 것은 어머니와 연극이었다고 한다. 한편의 연 극을 위해 동지들이 모여 문학, 음악, 미술, 무용 등을 이야기 하며 밤을 지새우던 순간은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예술을 향한 타는 목마름에 술을 살 돈이 없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술이었으면 하고 외쳤던 그 시절이 행복이었다고 젖은 눈으로 말한다. 영한은 예술을 알면 행복을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가 시선을 돌린 곳이 김천 교도소의 소년 수형자들이었다. 사회에서 격리된 소년들에게 예술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심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가난한 영한이 조우했던 그 시절의 예술처럼 철창 안에서 만난 예술이 김천소년 교도소 소년 수형자들의 운명을 바꿔주기를 소망했다. 아무것도 없는 0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담아 ‘제로캠프’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십 년 넘게 영한은 묵묵히 일하고 있다.
제로캠프의 사무국장 손영민 씨는 최 선생님과 거의 그림자처럼 같이한다. 감사한 일이다. 모든 방향이 같다. 감사한 일이다. 선생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대뜸 외치듯 말한다.
“최불암은 개똥도 아니다!”
더 하고 싶은 것이 그리 많을까. 더 채우고 싶은 것이 그리 많을까. 스스로에게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자아 의식에서 허전한 것도 있을 것이다. 왜 외롭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선생님! 손을 비벼 더 따뜻한 손으로 자신을 쓰다듬어주세요. 지금까지 선생님이 하신 일은 차고 넘칩니다. 너무 많아요. 너무너무 많아요.
그리고 그는 눈이 젖어왔다.
“혼자 울 때가 있어요. 어머니가 일생 일하시면서 나의 불쏘시개가 되어주신 걸 생각하면…….”
하늘에 있는 어머니가 이 눈물을 알까……. 대한민국이라는 이 지상에 어머니가 볼까 봐 눈물을 삼키는 최불암이라는 선한 배우 아들이 있다. 종이로 치면 한지 같은 사람이다. 천년을 가도 그대로 자신의 체질을 유지하는 사람.
신달자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을 통해 데뷔.
『열애』 『종이』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등 다수의 시집을 냈으며,
묵상집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