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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을] 다시 읽는 만해 한용운 - 백승호

202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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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불교 유신維新에 뜻을 두어 얼마간 가슴속에 대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당장 세상에 거행할 수 없었습니다. 형체 없는 불교의 신세계를 구구한 문자로 세워보며 적막한 신세를 스스로 위로할 뿐이었습니다. 

무릇 매화나무를 바라보면서 갈증을 멈추는 것도 양생養生의 한 방법입니다. 이 논설論說은 진실로 매화나무의 그림자에 불과 합니다. 나의 목마름의 불꽃이 전신을 이렇게 태운다면, 부득불 한 그루 매화나무의 그림자로 만곡萬斛의 맑은 샘 역할을 하게끔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불가佛家에서는 가뭄이 매우 심한데, 우리 승려들도 목마름을 느끼는 자가 있는지. 과연 있다면 이 매화나무 그림자를 비춰보기 바랍니다. 듣자 하니 육도六度 가운데 보시布施가 제일이라 합니다. 나도 이 매화나무 그림자를 보시한 공덕으로 지옥쯤은 면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1910년 12월 8일 밤 

저자 씀

 



서론(緖論)


천하天下에 어찌 성공과 실패가 정해져 있겠습니까, 사람을 기 다릴 뿐입니다. 유유히 모든 일은 한결같이 사람의 명을 들은 이 후에야 소위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일은 스 스로 성립하는 힘이 없고, 오직 사람을 따를 뿐이라면, 일의 성패 는 또한 사람의 책임일 뿐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일을 계획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따져서 말해 보면, 사람에게 성공하기에 족한 계획이 있어도 하늘이 이를 실 패하게 할 수도 있고, 사람에게 실패할 만한 계획밖에 없는데도 하늘은 이를 성공시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 사람으로 하여금 흥이 깨지고 낙담케 할 일이 무엇이 이것보다 더하겠습니까. 

과연 하늘이 이같이 사람이 계획하는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하면,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유를 잃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 으로 그 자유를 잃게 한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습니다. 

저 소위 ‘하늘’이란 형태가 있는 하늘입니까, 아니면 형태가 없 는 하늘입니까. 만약 형태가 있는 하늘이라면, 어찌 저 위에 모습 이 있어 그 푸르고 푸른 모습이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그것이 아 닙니까. 이미 형태가 있다는 것은 하늘도 이기理氣 중의 한 사물 입니다. 자유의 법칙을 따라 다른 것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이 다 른 사물과 털끝만치도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감히 단언하는 바입니 다. 생명을 지닌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거 늘, 어찌 모든 것이 구구한 형체가 있는 한 사물에게 성공과 실패 의 명을 듣겠습니까. 

만약 형태 없는 하늘이라면, 이는 천리天理이지 하늘은 아닙니 다. 천리란 곧 진리眞理입니다. 성공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성공 하고, 실패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실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리 입니다. 그렇다면 성공은 진실로 스스로 성공하는 것이며, 실패 는 진실로 스스로 실패하는 것이니, 어찌 다시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등의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형태가 있는 하늘이든 형태가 없는 하늘이든 모두 해당 이 없습니다. 그렇게 운운하는 사람은 다만 하늘이 있는 것만 알 고 사람이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자마자 그 이 름이 벌써 노예 명단에 들어가는 셈이니 어찌 그리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만약 문명인文明人으로 하여금 이렇 게 운운하는 사람을 천 년 된 무덤 속에서 일으켜 세워 자유를 방 기한 죄를 문책하게 한다면 비록 변호하고 싶더라도 어디에서부 터 변호할 거리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진실로 하늘이 일의 성공과 실패를 구제함 없음이 이와 같다면 만물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이러한 이치를 알면 될 뿐입니다. 차 라리 ‘일을 계획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일을 이루는 것도 또한 나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의를 아는 사람은 자기를 책망하지 남을 책망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를 믿지 다른 사물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일 을 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땅히 이러한 법을 종지宗旨로 삼는 것이 옳겠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과거의 세계가 아니고 미래의 세계가 아니고 바 로 현재의 세계입니다. 어찌하여 천만 년 전의 일을 연구하는 사 람이 있고 천만 년 후의 일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무릇 천 지간의 형이상, 형이하의 것을 연구하고 유신하지 않음이 없습 니다. 학술의 유신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정치의 유신을 말하 는 사람이 있으며, 종교의 유신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 외에 도 유신하자 유신하자 하는 소리가 세상에 두루 가득합니다. 이 미 유신을 했으며 지금 유신을 하고 있으며 마땅히 유신해야 할 것들이 연달아 이어집니다. 그런데 조선의 불교는 적막하게 유신 하자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모르겠습니다. 과연 무슨 징조일 까요? 조선의 불교는 과연 유신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유신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한번 생각해보고 다시금 생 각해보아도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아! 이것도 또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나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불교 유신에 뜻을 든 사람이 없을 리 없겠으나 지금까지 알려 지지 않은 것은 유독 어째서일까요? 한편으로는 천운에 맡기고, 한편으로는 타인에게 책임 지운 것이 그 원인일 것입니다. 나는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설에 의혹을 가지게 된 이 후에 비로소 조선 불교 유신의 책임이 천운이나 타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릇 그러한 연후에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유신의 이유를 전념하여 생각하여 이 논論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 하고, 겸하여 승려 동포들에게 알립니다. 이 논은 문명국가 사람 이 본다면 실로 천한 것 가운데 천한 것일 것입니다. 비록 그렇겠 지만 조선 승려의 앞길에 조금도 취할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릇 가짜 유신 이후에 진짜 유신이 비로소 출현하나니, 이 논의가 훗날에 가짜 유신이 된다면 매우 큰 영광이겠습니다.


불교佛敎의 성질性質


 오늘 불교의 유신維新을 논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불 교의 성질이 어떠한지 살펴 이것을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정도에 비춘 연후에야 비로소 논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앞 으로의 세계는 끊임없이 진보하여 문명의 피안에 도달하지 않고 서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불교가 장래 문명에 합당하지 않을 경우에는 비록 기사회생의 재주를 배워 마르틴 루터나 크롬 웰 같은 이를 무덤 속에서 불러일으켜 세워서 불교를 유신시킨다 고 하더라도 필경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우수 한지 열등한지 적합할지 부적합할지를 생각하고 거듭 생각해보 았더니 불교가 문명에 있어서 모자라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특색이 있었습니다. 


불교의 성질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첫째는 종교적 성질입니다. 무릇 사람이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 까? 우리들의 가장 큰 희망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이라 는 것은 생존과 진화의 밑천입니다. 진실로 희망이 아니면 제멋대로 게으르게 살며 구차하게 시절에 안주하며 만족할 것이니, 어떤 사람이 기꺼이 마음을 쓰고 수고롭게 힘을 들여가며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희망이 없으면 이 공간에 있는 사람과 사 물이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황폐하고 음 악淫惡하여 전날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지옥 같은 생애와 야만 스러운 행위가 참으로 참담하고 추악할 것이니 그렇다면 이른바 문명인은 사람 없는 외진 곳에 머리를 파묻고 숨을 죽이고 있으 며 살아갈 의욕이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희망이 두텁고 장기적이지 못할까 두려워 무형의 세계 속에 지제전止啼錢1 을 임시로 설치하여 하소연할 데 없는 중생 으로 하여금 믿게 하고 희망하게 하는 것이 여러 종교가 생긴 유 래입니다. 예수교의 천당과 유대교의 봉신奉神과 이슬람교의 영 생 등이 이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걱정한 것이 또한 깊다고 하 겠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다만 미혹된 말로 시작하여 미혹된 말 로 끝이 나 천당의 유무와 봉신의 허실과 영생의 옳고 그름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어둑하게 미신을 끌어안고 예로부터 내려오 니, 이것은 사람을 이끌어 우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백성의 지 혜를 속박한 책임이 이미 철학자들의 입을 통해 끊이지 않고 있 으니, 또한 심히 분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제전止啼錢: 우는 아기에게 노란 나뭇잎을 돈이라 하고 주어 울음을 그치 게 한다는 뜻으로, 방편으로 설하는 가르침을 비유한다.

어떤 이는 한 가지 회피하는 말을 꾸며 미신을 변호하기도 합 니다. “비록 미신이지만 중생의 정신을 하나로 통일하게 하니, 11 세기 이래로 구미 각국에서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난 것을 보지않았습니까? 이것은 반이나마 미신 종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 다면 미신이 이 세상에 끼친 공로가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는 진실로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그러하 나 사업가로서 역사상에 시끌벅적한 업적을 남겨 지금에 이르도 록 미담의 재료가 되는 자들 가운데 누군들 무수한 사람의 피를 흘려 자기의 공으로 거두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 사업가 라는 사람들이 진실로 미신으로 여러 사람의 뇌를 세뇌하지 않았 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빼앗아 감히 사지로 가게 하기에 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신을 백방으로 설계하여 사람 의 생명을 낚는 달콤한 미끼를 만들고 다시 사람의 생명으로 적 을 죽이는 화살과 돌을 만들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몇천만 의 사람들이 한두 가지 미신에 속아서 다시는 돌릴 수 없는 목숨 을 자욱한 천지간에 끊어 보낸 것이 이루 다 셀 수 있겠습니까. 무 릇 사람에게 털끝 한 오라기 같은 미신이었을 뿐인데 슬퍼도 참 으로 슬플 뿐입니다. 미신은 설사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폐단은 벌써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중생이 미신에 빠질까 두려워 하는 까닭에 경전에서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는다”라고 하고, 또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 지혜의 바다에 들게 하라”고 하셨습니 다. 정각正覺, 정변正徧2 의 설이 모두 다 그러하니 부처님은 지극 하다고 하겠습니다. 몸을 나투신 후 육 년 고행하시고, 사십구 년 설법하시고, 관곽 속에서 두 발등을 내보이셨으니3 , 일거수일투 족, 한 마디 말씀, 한 마디 침묵이 어찌 하나하나가 중생의 미혹함 을 돌려 깨닫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변각正遍覺: 또는 正徧覺. samyak-sambodhi,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뜻 한다. 

곽시쌍부槨示雙趺: 석가모니가 입적하자 관에 안치하였다. 가섭이 다른 지 방에서 그 소식을 듣고 나중에 와서 슬피 우니, 석가모니가 두 발을 관 밖으 로 내보임으로써 도를 전했다는 고사이다.

또 천당과 지옥의 설과 불생불멸이라는 말이 있기는 있지만, 그 취지가 다른 종교와는 같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경전에 이르기를 지옥과 천당이 모두 정토淨土라 하셨고, 또 중생의 마음 이 보살의 정토라고 하셨습니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천당은 천당 의 천당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의 천당이며, 지옥은 정지井地의 지옥이 아니라 바로 마음으로부터의 지옥인 것입니다. 무릇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은 세계와 그 속의 삼라만상이 모두 중생의 마음 속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4만 8천 법 문이 마음을 떠나서 다른 것은 없는 것이니, 위에서 말한 미신이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천당, 봉신 등의 일을 말하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그리고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여타 종교에서 말하는 영생의 부류가 아닙니다. 실로 원만한 깨달음의 주인공이 며 불교를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죽은 자를 모 두 살린다는 것은 다만 어둑하고 불령한 사람들의 성대한 밥주머니 일 뿐입니다. 세로로 삼제三際를 다한 것을 오래다 하지 않고, 가 로로 시방十方 세계를 크다고 여기지 않아 육근과 육진4 을 아득 히 벗어나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추고 있는 것을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진여는 불변을 이르니, 이것이 어찌 생과 사가 있겠습니까? 

중생이 이런 더없는 보배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스 스로 미혹迷惑하여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 부처님께서 대자대 비한 마음으로 설법하셨습니다. 다만 중생의 근기根器가 각기 다 르므로 백천 방편이 비록 갖가지이나 궁극의 목표는 오직 진여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는 것이요, 달 을 보면 손가락을 잊는 것이라, 통발과 손가락이 어찌 미신이겠 습니까. 다만 방편일 뿐입니다. 이에 중생이 칠 척 육신으로 수십 년 동안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모두 허환虛幻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아 진미래盡未來의 참된 자아에서 불생불멸을 찾게 됩니다. 그런 희망이 과연 끝이 있겠습니까? 끝이 없겠습니까? 어찌 다만 미신이라야만 희망을 이야기하겠습니까? 불교는 지혜로 믿는 종교입니다. 미신의 종교가 아닙니다. 

근진根塵: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6근根이라 하고, 그 대상물 인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6진塵이라고 한다.

둘째는 철학적 성질입니다. 철학자와 종교가가 왕왕 서로 충돌 하여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미신과 진리가 서로 물과 불 같 기 때문입니다. 종교가들이 한결같이 미신에 얽매여 돌아올 줄 모른다면, 철학자들이 반드시 전력으로 이에 대항하여 이른바 미 신이 1세기 내로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무릇 불교가 어찌 미신 종교와 동일한 전철을 밟겠습니까? 불경 에 이르기를, “복과 지혜를 둘 다 갖추었다”라고 하셨고, 또 이르 기를 “일체 종지一切種智”라고 하셨습니다. 일체 종지는 자기 마 음을 깨달아 작은 것도 환하게 막힘 없어 모르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진리를 궁구하여 모르는 것이 없는 경지를 기약하는 것이 철학자들의 궁극의 경지가 아닙니까? 철학자들은 스스로 어렵게 여깁니다만 우리 부처님께는 무슨 어 려움이 있겠습니까? 철학의 대가를 알고자 하면 석가모니를 제 외하고는 없을 것입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동양, 서양의 철학과 불교와 합치되는 점들로 대략 질정해보겠습니다. 


중국인 양계초梁啓超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 두 가지가 모두 외래 종교로 중국에 유입되었 는데, 불교는 대성하고 기독교는 대성할 수 없었던 것은 무슨 이 유일까요. 기독교는 오직 미신을 위주로 하고, 그 철학적 이치가 천박하여 중국 사군자의 마음에 들기에 부족합니다. 불교의 교리는 종교와 철학 양 방면을 갖추고 있어서 그 증도證道의 궁극적 경지는 깨달음에 달려 있고, 그 도에 들어가는 법문은 지혜에 달 려 있고, 그 수도하여 힘을 얻는 것은 스스로의 힘에 달려 있으니, 불교는 예사 종교와 동일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가 동방으 로 유입된 이후로 그것과 더불어 함께 갖추어진 연후에 중국 철학이 이채로움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보자면 중국 철학이 빛을 더하게 된 것은 실로 불교 덕분입니다. 아! 불교가 조선에 유입된 것이 지금 천오백 년입니다. 천오백 년 동안 조선 사람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형성시킨 것을 조선 철학의 이채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릇 똑같은 손트임방지약인데, 한 사람은 그것을 써서 장수가 되고, 한 사람 은 솜 빨래에 쓰는 데 불과했습니다. 다만 그것을 쓴 사람 때문이 지, 손트임방지약을 어찌 탓하겠습니까?5 

원문은 불균수不龜手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의 고사이다. 송 나라 사람 가운데, 손이 얼어 터지지 않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어 이것 을 솜 빨래하는 데에 쓰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백금을 주고 이를 사가서 월나라와의 겨울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는 내용의 고사.


독일의 학자 칸트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일생의 행위는 다 내 도덕상의 성질이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간성이 자유에 합치하는가 아닌가를 알 고자 하면 공연히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으로 논해서는 안 되며, 응당 본성本性의 도덕에 입각하여 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도덕적 성질에 있어서야 누가 조금이라도 자유롭지 않은 것이 있 겠습니까. 도덕적 성질은 불생불멸하여 공겁지간에 제한받거나 구속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 뿐인 것입니다. 사람이 각자 이 공간 시간을 초월한 자유권에 의 지하여 스스로 도덕적 성질을 만들어내니, 그러므로 나의 진정한 자아自我는 비록 나의 육안肉眼으로 스스로 볼 수 없지만, 그러나 도덕의 이치로 미루어보면 엄연히 아득히 현상 위에 벗어나 그 밖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이 진정한 자아는 필경 항상 활발한 자유로서 육체가 언제나 불가피한 이치에 늘 범주화되어 있는 것과는 같지 않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른바 활발한 자유란 무엇입니까. 내가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고 악한 사람이 되고자 함은 다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미 선 택하여 정하고 나면 육체가 그 명령을 따라 선한 사람과 악한 사 람의 자격을 주조해내는 것이니 이것으로 보자면 우리 몸에 소위 자유성自由性과 부자유성不自由性 두 가지가 동시에 병존竝存하 고 있음이 그 이치가 분명하다.”


 양계초는 설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소위 진여眞如라는 것이 있습니다. 진여란 곧 칸트가 말한 진정한 자아여서 자유성을 지닌 것입니다. 또 소위 무명無明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명이란 칸트의 현상적 자아이 니 불가피한 이치에 속박되어 자유성이 없습니다. 또 부처님의 말씀에 ‘우리가 무시無始 이래로 진여・무명의 두 종자種子를 지 니고 있어서 그것이 성해性海6 와 식장識藏7 속에 포함되어 서로 훈습薰習8 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무명으로 진여를 훈습하기 때문 에 미혹된 지혜를 식識으로 삼고, 도를 배우는 사람은 다시 진여 로 무명을 훈습하기 때문에 식을 전환시켜 지혜를 이룹니다”라 고 하였습니다. 송대宋代의 유학자는 이 의례義例를 따라 중국의 철학을 구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주자朱子가 의리義理의 성性 과 기질氣質의 성을 나누어서 《대학大學》에 주석을 달았습니다. 《대학》에 이르기를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품 부 받아 허령불매虛靈不昧해서 모든 이치를 구비具備하여 만사萬 事에 응하는 것이라. 다만 품부 받은 기질에 구애받고 인욕人慾에 가려짐으로 인해 때로 어두워지는 수가 있노라”라고 했습니다.9 

6 성해性海: 변하지 않는 진리나 청정한 본성을 바다에 비유한 말, 진리의 세 계,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한다. 

7 식장識藏: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속에 내장되어 있는 여래가 될 가능성을 의 미한다. 

8 훈습薰習: 어떤 성질에 물듦. 마치 향내가 옷에 스며들듯, 몸과 말과 뜻으로 일으킨 행위의 기운과 생각이 아뢰야식에 잠재력으로 이식되는 현상을 지칭 하는 말.

9 해당 구절은 《대학》의 경문 “대학大學의 도道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으 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至善에 그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 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에 관한 주희의 주석이다. 주희는 해당 경문에 대 해 “명덕明德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온갖 이 치를 갖추고 있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氣稟에 구애되고 인 욕人欲에 가리면 때로 어두워진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以 具衆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라고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 이 진여眞如라는 것은 일체一切 중생이 공통적으로 가진 본체本體요, 한 사람이 각자 진여를 가진 것은 아니라 했고, 칸트는 사람이 모두 한 진정한 자아自我를 가지고 있다 했습니다. 이것이 그 차이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부처 님 말씀에 “한 중생이라도 성불成佛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도 성불하지 못한다”라고 하셨으니, 모든 사람의 본체本體가 하나이 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중생을 널리 구제하자는 정신에 있어서 비교적 넓고 깊으며 절실하게 밝은 것입니다. 칸트는 “내가 진실 로 선인善人이 되고자 한다면 이에 선인이 된다”라고 했으니, 그 본체가 자유롭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수양이라는 의 義에서 볼 때 또한 비교적 절실하고 쉽게 입문하는 것입니다. 주 자朱子의 명덕明德 같은 것은 그 동일한 본체本體를 지적하지 못 했으니, 이것이 부처님께 미치지 못하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또 말하기를 품부稟賦 받은 기질에 구애받고 인욕人慾에 가려진다고 하여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유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 에 있어서 한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칸트에 미치지 못 하는 점입니다. 칸트의 본의本意는 진정한 자아는 결코 다른 사물 에 의해 구애되든지 가리어지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구애를 받고 가릴 수 있다면 이것은 부자유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양계초가 부처님과 칸트의 다른 점으로 언급한 것은 반드시 모두가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처님은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것은 사람 사람마다 각각 하나의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 사람마다 공통 적으로 지니고 있는 진정한 자아와 각자 지니고 있는 진정한 자 아에 대해 남김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칸트의 경우는 다만 모두에 게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자아에 관해서는 미처 언급하 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부처님의 철리哲理가 훨씬 더 넓 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이미 성불하셨습니다만, 중생 때문에 또 성불하시지 못한다면 중생이 또한 이미 중생이 되었으면서 부처님 때문에 또 중생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셋이 차별이 없으니, 누가 부처고 누가 중생이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상즉상리相卽相離하고 부즉불리不即不離하여 하나가 만萬이고 만이 하나인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 사이에 한계를 긋는 것은 다만 허공 중의 꽃이나 제2의 달과 같을 뿐입니다. 


영국인 베이컨은 말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요철이 있는 거울과 같아서 외물外物이 와서 비치는 경우, 혹은 뾰족 나온 곳에 비치기도 하고, 혹은 움푹 들 어간 곳에 비치기도 합니다. 이에 비록 동일한 사물일지라도 비 치는 곳이 같지 않기 때문에 나의 관찰觀察에 오류誤謬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류에 이르게 되는 첫 번째 원인입니다. 또 오관五官10이 접하는 것은 사물의 본색本色이 아니라 사물의 가상假相입니다. 이것이 오류에 이르게 되는 두 번째 원인입니다. 또 우 리의 체질體質이 각각 상이합니다. 이것이 오류에 이르게 되는 세 번째 원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베이컨의 이 설은 고심하여 생각하고 지극히 사색하여 실험을 통해 얻은 바가 있은 연후에 드러낸 논의이니 《능엄경楞嚴經》의 경의經義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능엄경》에 이르되, “비 유하자면 만약 어떤 사람이 맑고 깨끗한 눈으로 맑고 깨끗한 하 늘을 바라본다면, 오직 한 청허淸虛11만이 있을 뿐이요, 아득히 아 무것도 없다. 그 사람이 아무런 이유 없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 고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가 피로해지면 하늘에 별도로 광화狂華12 가 보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청허함과 피로함은 베이 컨의 요철(凹凸, 뾰족 나온 면과 움푹 들어간 곳)과 같습니다. 혹은 뾰 족 나오고 혹은 움푹 들어가서 그 비치는 것이 같지 않음이 마치 맑고 깨끗한 눈에는 하늘이 되고 피로한 눈에는 안화眼花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능엄경》에 또 말하기를, “몸과 감각이 둘 다 모두 허망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감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과 감각하 는 육근六根13이 모두 가상假相이기 때문에 “둘 다 모두 허망하다”라고 한 것입니다. 베이컨은 다만 감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 본 색本色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감각하는 육근도 아울러 본색이 아 니라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베이컨이 부처님에게 미치 지 못하는 것입니다. 《능엄경》에 또 이렇게 말하기를, “한 물속에 해그림자가 비쳤는데, 두 사람이 똑같이 물속의 해를 보고는 동 쪽과 서쪽으로 각각 길을 갔다. 그렇다면 각자에게 해가 있어 두 사람을 따라가며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가며, 빛에 기준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베이컨의 세 번째 원인이 바로 이 러한 뜻입니다.

10 오관五官: 다섯 가지 감각 기관. 눈, 귀, 코, 혀, 피부를 이른다. 

11 청허淸虛: 잡된 생각이 없어 마음이 맑고 깨끗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12 광화狂華: 안화眼花와 같은 뜻으로, 눈앞에 불똥 같은 것이 어른어른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13 육근六根: 6식識을 낳는 여섯 개의 뿌리, 즉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 의意를 말한다.


프랑스의 학자 데카르트가 생각하기를, ‘진실로 각각 자기가 믿는 진리가 있다면 스스로 그것을 굳게 지키며 일가를 이룬다. 서로 차이나는 점이 있어 용납하지 못하는 자가 있거든 대치하고 공격하여 왕복하며 서로 변론하다 보면 오랜 후에 완전한 진리가 장차 그사이에 나올 것이다. 왜 그러한가? 지혜가 비록 높고 낮고 크고 작고 하는 차이가 있겠으나, 그 본성은 서로 같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또 순일하여 잡스러운 것이 없는 것이다. 무릇 동일한 본성의 지혜로 순일하여 잡스러움이 없는 진리를 추구하며 부지 런히 그 일에 종사하면 어찌 그 길은 달라도 동일한 귀결을 맞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 처음에는 비록 사람 사람마다 이론이 있 다 하더라도, 반드시 서로 웃을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 다. 데카르트의 이 의론이 《원각경圓覺經》의 경의와 구절구절 서 로 부합합니다. 데카르트가 “각각 자기가 믿는 진리” 운운한 것 은 바로 《원각경》의 “견해見解가 가로막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치하고 공격한다” 운운한 것은 바로 《원각경》의 “여러 환幻을 일으켜 환을 제거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 운운한 것은 《원각경》의 “구경究竟14을 얻는다”라고 한 것입니다. “본성 은 서로 같다” 운운한 것은 《원각경》의 “중생 국토가 동일한 법성 法性15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길은 다르나 동일한 귀결을 맞는 다”라고 운운한 것은 “지혜와 어리석음이 통틀어 반야般若가 된 다”라고 한 것입니다. 무릇 본성에 어찌 둘이 있겠으며 이치에 어 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둘이 없는 본성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 이 치를 찾는다면 반드시 한 곳에서 손을 맞잡을 것임은 틀림없습니 다. 무릇 사 더하기 사가 팔이 됨은 바꿀 수 없는 산수입니다. 산학算學에 아주 몽매한 어린아이가 혹 일곱이라고 하고 혹 아홉이 라고 합니다만, 일곱과 아홉은 곧 견해가 장애가 된 환幻입니다. 점차 환을 제거하는 데 이른다면 이 세상 어린아이들이 한 명도 팔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니, 진리라는 것은 사 더 하기 사가 팔이 된다는 부류입니다. 아마도 데카르트는 전생에 《원각경》을 많이 읽은 사람인가 봅니다. 

14 구경究竟: 최고의 경지, 극치, 결과를 뜻한다. 

15 법성法性: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 것 또는 존재의 진실로서 불변하는 본성 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밖에 플라톤의 대동설大同說, 루소의 평등안平等案, 육상산陸 象山과 왕양명王陽明의 선학禪學이 다 부처님의 뜻에 부합합니다. 이상이 동양과 서양의 철학이 불교와 서로 부합하는 대략입니다. 나는 서양 철학자의 저서 가운데 한 권도 읽은 바 없고, 왕왕 주워 얻은 것은 여러 사람의 책에서 번역되어서 전해오는 그 새벽 별 같은 자잘한 편린片鱗에 그쳤을 뿐입니다. 아직 그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동서고금의 철학에서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온 것이 또한 불경의 주석 역할을 하고 있음은 논의를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상에서 인용한 몇몇 학자들은 모두 철학계에서 두께가 없는 칼을 그 틈 사이에 밀어 넣어 널찍하게 여유가 있는 분들이시니16 그들이 참 된 철학자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치에 차이가 있다 면 그렇거니와 차이가 없다면 이 참된 철학이 다른 참된 철학과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치가 변하거니 와 변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참된 철학과 옛날의 참된 철학이 털 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몇몇 철학자들의 학 설이 부처님 말씀과 밀접하게 계합契合함을 알았으니 몇몇 철학 자가 아닌 또 다른 몇몇 철학자들 또한 어찌 그 학설이 부처님 말 씀과 계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억지로 다른 일을 갖다 가 진실로 같은 이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불성이며 동일한 진리이기 때문에 비록 길은 다르지만 동일한 귀결을 맞는 것이요, 만 개의 일파가 일종一宗으로 되는 것이니 불교는 철리哲理의 큰 나라입니다. 

무릇 중생계衆生界가 끝이 없기 때문에 종교계宗教界가 끝이 없고, 철학계哲學界가 끝이 없습니다. 다만 문명의 정도가 날로 진전되면 종교와 철학이 점차 고상한 영역에 나아갈 것이니, 그 릇된 견해나 미혹된 신앙을 어찌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 무릇 종 교이며 철학인 불교는 장래 도덕 문명의 원료품原料品입니다. 

16 원문은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편의 구절인 “以無厚로 入有間하여 恢恢乎有餘地者也”이다. 《장자》의 해당 구절은 “지금 내가 칼을 잡은 지 십구 년이나 되고 잡은 소도 수천 마리를 헤아리는데, 칼날이 지금 숫돌에 서 금방 꺼낸 것처럼 시퍼렇다. 소의 마디와 마디 사이에는 틈이 있는 공간 이 있고 나의 칼날에는 두께가 없으니, 두께가 없는 것을 그 틈 사이에 밀어 넣으면 그 공간이 널찍해서 칼을 놀릴 적에 반드시 여유가 있게 마련이다” 라고 되어 있다.


불교佛敎의 주의主義를 논함 


천하에 주의主義가 없는 일은 없으니, 만약에 어떤 일에 주의가 수립되어 있지 않다면 어지럽고 망령되고 허황하며 제멋대로여 서 비록 성인의 지혜로도 일을 처리해 효험을 내지 못할 것입니 다. 주의가 일단 정립定立되면 취향을 파악하기 쉬움이 마치 수레 가득 실은 땔감17과 같아서 앞길의 길흉吉凶과 성패成敗가 앉은 자리에서 대개 정해집니다. 일을 논하는 사람은 마땅히 그 주의 를 먼저 알고서 의혹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의 주의는 크 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평등주의平等主義이고 둘은 구 세주의救世主義입니다. 

17 수레 가득 실은 땔감: 원문에는 여신輿薪으로 되어 있다. 《맹자孟子》 〈양혜 왕 상梁惠王上〉에 나오는 구절을 점화한 것이다. “시력이 추호의 끝은 살필 수 있으나 수레에 실은 나뭇단은 볼 수 없다(明足以察秋毫之末 而不見輿 薪)”라고 하였다.


평등주의라는 것은 불평등의 반대입니다. 고금 천하에 불평등 한 것은 어찌 그리도 많이 보입니다만 평등한 것은 자주 보이지 않습니다. 동일한 현인賢人인데도 안연顔淵은 요절夭折하고 자로 子路는 형을 받았습니다. 동일한 미인인데도 달기妲己는 요녀였 고 초선貂蟬은 충성스러웠습니다. 동일한 영웅인데도 워싱턴은 성공하였고, 나폴레옹은 유배되었습니다. 동일한 만물萬物이지 만 어떤 것은 살고 어떤 것은 죽으며 어떤 것은 강하고 어떤 것은 약합니다. 불평등이 불평등으로 서로 이어져 무수한 불평등을 생 성해내니 매번 불평등의 연유에 관해 한번 생각이 미칠 때마다 일찍이 마음이 근심스럽고 눈물이 흐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평등의 도리란 무엇입니까? 장수長壽와 요절夭折, 선善 과 악惡, 성공과 실패, 강함과 약함을 똑같게 하여 동일하게 하나 로 만드는 것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니 이러이러 합니다. 만약 불평등한 것에서 바라본다면, 세상 모든 것이 불평등 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며, 만약 평등한 것에서 바라본다면 세 상 모든 것이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불평등한 것이 란 무엇입니까? 사물과 현상이 이른바 부득불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공례公例 제한받는 것이 이것입니다. 평등한 것이란 무엇입니까? 공겁空劫18을 초월하여 얽매임이 없는 자유와 진리가 이것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안연의 요절과 자로의 형벌 받음, 달기의 요 사스러움과 초선의 충성됨, 워싱턴의 성공과 나폴레옹의 실패, 만 물의 삶과 죽음, 강함과 약함 등이 다만 그 제한받는 현상일 뿐입 니다. 무릇 공겁을 초월한 진리라면 애초부터 요절과 형벌, 요사스러움과 충성됨,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강함과 약함 등이 없습니 다. 소식蘇軾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 면 하늘과 땅이 한순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겠고, 변하지 않는 다는 관점에서 보면 만물과 나는 모두 무궁무진하다”19라고 했습 니다. 이것은 현상과 진리의 연유에 관해서 참으로 빛나는 견해 라고 하겠습니다. 이른바 평등이라는 것은 진리요, 현상이 아닙 니다. 

18 공겁空劫: 사겁四劫 가운데 네 번째 겁. 세상이 생겨나는 시기를 성겁成劫, 존재하는 시기를 주겁住劫, 파괴되는 시기를 괴겁壞劫,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시기를 공겁空劫이라 한다. 

19 소식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는 〈적벽부〉에서 “강물은 이 처럼 흘러가지만 다시 계속 흘러가고 둥근달은 기울어졌다가 다시 둥글어 지니,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온 천지에 한순간이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큰 안목으로 보면 만물과 나 자신은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불평등이라는 가상假相에 미혹되어 해탈하지 못함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에 평등한 진리를 들어 보이셨으니 경전에 말하기를 “몸과 마음이 필경 평등하여, 여러 중생과 체體가 같고 다름이 없다”라고 하셨고, 또 말하기를 “유성 有性과 무성無性이 나란히 불도를 이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평등한 진리에 관해 매우 깊고 매우 넓어 통하지 않은 곳이 없으 니, 불평등한 것과 다름이 어찌 이처럼 지극하게 다릅니까? 

근세의 자유주의自由主義와 세계주의世界主義는 실로 평등한 진리의 후예입니다. 자유의 공례 가운데 “자유란 남의 자유를 침 범하지 않는 것으로 한계를 삼는다”라고 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각자 자유를 보유하여 남의 자유를 침범치 않는다면, 나 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와 동일하게 됩니다. 저 사람의 자유가 이 사람의 자유와 동일해서, 자유가 모두 수평선과 같은 형세 같아서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다면 무엇이 이 평등보다 더하겠습니까? 

또 세계주의라는 것은 자국과 타국, 이 주洲와 저 주洲, 이 인종 과 저 인종을 물론하고 동일하게 일가一家로 보고 동일하게 형제로 여겨, 서로 경쟁함이 없고 침탈侵奪함이 없어서 세계 다스리기 를 한 집안을 다스리는 것같이 함을 이릅니다. 이와 같다면 평등 합니까, 아닙니까? 

이런 논의論議가 오늘날에 비록 좌상의 공론空論으로 귀결될 것이라 해도 이후 문명의 정도가 극단에 이르면 장차 천하에 시 행될 것임은 새삼 논의를 기다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 니까? 그 원인이 있으면 그 결과가 있고, 그 이치가 있으면 그 사 실이 있는 것이니, 사물에 그림자가 따르고 소리에 메아리가 응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이르면, 비록 거부하고자 하나, 솥을 들어 올리는 힘과 산을 쪼개는 대포를 가지고도 이미 감당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금후의 세계는 불교의 세계 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인연으로 불교의 세계라고 명명합니까? 평등하기 때문이며 자유롭기 때문이며 세계가 대동 大同하게 되기 때문에 이런 까닭으로 불교의 세계라고 명명한 것 입니다. 부처님의 평등이 어찌 이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무수한 항하恒河의 모래알20 같은 화장세계華藏世界21와, 이런 세계 속에 있는 하나하나의 사물, 하나하나의 일을 하나도 빠뜨림이 없이 모두 평등을 이루십니다.

20 항하의 모래알: 인도 항하의 모래로, 곧 무량無量의 수를 이른다. 

21 화장세계華藏世界: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보살행菩薩行을 닦으며 발 원해서 성취한 청정 장엄淸淨莊嚴 세계를 말한다.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라고도 한다.

 구세주의救世主義란 무엇입니까? 독리주의獨利主義의 반대입 니다. 불교를 논하는 사람들이 다들 불교는 자기 한 몸만을 선하 게 하는 독선기신獨善其身22의 종교라고들 합니다. 이것은 불교 를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기 한 몸만 을 선하게 하는 것은 정말로 불교와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화엄 경華嚴經》에 이르기를, “나는 마땅히 널리 일체 중생을 위하여 일 체 세계와 일체 악취惡趣 중에 미래 세계가 다하도록 일체의 고통 을 받겠노라”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기를, “나는 마땅히 저 지 옥地獄, 축생畜生, 염라왕閻羅王 등의 처소에 이 몸을 인질로 삼아 일체 악취 중생을 구속救贖23하여 그들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 겠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밖의 천 마디 말씀과 만 개의 게偈가 중생을 구제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으셨으니, 이것이 과연 자기 한 몸만을 선하게 하는 것입니까? 아! 부처님의 지극함을 중생이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무릇 요堯 임금은 순舜을 얻지 못한 것을 근심으로 여겼고, 순 임금은 우禹를 얻지 못한 것을 근심으로 여 겼습니다. 우 임금은 밖으로 치수治水하러 감에 세 번이나 자기 집 문 앞을 지나갔으나 집에 들어가보지 않았습니다.24 공자는 진陳·채蔡25 사이에서 곤액困厄을 겪었고 예수는 거리에서 형을 당 하셨습니다. 모두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지극함에서 나온 것입 니다. 어찌 세상을 구제하지 않고서 천추에 걸쳐 아름다운 향기를 누리겠습니까? 비록 그러합니다만, 그 원력願力의 크고 많음 과 자비慈悲의 넓고 깊음이 불교만 한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자 기 한 몸만을 선하게 하고자 하는 죄를 논하자면, 소부巢父와 허 유許由26, 장저長沮와 걸닉桀溺27, 하조장인荷蓧丈人28, 양주楊朱29의 무리와 선도仙道를 배우는 부류들이 이 죄에 해당할 것입니다. 부 처님 같으신 분은 실로 유일무이한 구세주救世主이십니다. 

22 독선기신獨善其身: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궁해지면 자기의 몸 하나만이라도 선하게 하고, 뜻을 펴게 되면 온 천하 사 람들과 그 선을 함께 나눈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23 구속救贖: 대속代贖하여 구원함. 

24 해당 구절은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禹와 후직 后稷이 각각 범람한 홍수를 다스리고,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 느라 “세 차례나 자신의 집 문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공 자가 훌륭하게 여겼다(三過其門而不入, 孔子賢之)”라고 하였다. 

25 《논어》 〈선진先進〉 편에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나를 따르던 제자들이 지금 은 모두 문하에 있지 않다(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라는 구절이 있고,  《장자》 〈양왕讓王〉 편에 “공자가 진陳과 채蔡 사이에서 곤궁하여 7일 동안 밥을 지어 먹지 못하고 명아주 국에 쌀가루를 타지 못했다(孔子窮於陳蔡 之間 七日不火食 藜羹不糝)”라는 구절이 있다. 

26 소부巢父와 허유許由: 요堯 임금이 왕위王位를 물려주는 것도 뿌리친 채 기산箕山의 아래 영수潁水의 북쪽에서 숨어 살았다고 한다. 

27 장저長沮와 걸닉桀溺: 춘추시대 초나라 은자隱者이다. 《논어》 〈미자微子〉 편에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데리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다가 초나라에 들렀 을 때 장저와 걸닉이 짝을 지어 밭을 갈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로子路에게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게 했던 전고가 있다. 

28 하조장인荷蓧丈人: 《논어》 〈미자微子〉 편에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하조 장인荷蓧丈人을 만나 공자의 행방을 묻자, 하조장인이 공자를 조롱하는 말 을 하고는 ‘지팡이를 꽂고서 계속 김을 맸다(植其杖而芸)’는 전고가 있다. 

29 양주楊朱: 주周나라 말기의 학자로 위아설爲我說을 주창主唱했다. 


불교佛敎의 유신維新은 의당 파괴破壞를 먼저 해야 함을 논함 


유신維新이란 무엇입니까? 파괴의 자손입니다. 파괴란 무엇입 니까? 유신의 어머니입니다. 천하에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개 말들을 할 줄 알지만,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것은 혹 여라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찌 비례比例의 배움에 미루어 앎 이 이리도 심원하지 못합니까. 

무릇 파괴라고 하는 것은 헐어버리고 멸망시키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습舊習 가운데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변혁하여 이를 새롭게 할 뿐입니다. 이름은 비록 파괴지만, 실로 파괴는 아닙니다. 유신을 더욱 잘하는 사람이 파괴를 더욱 잘합 니다. 파괴가 더딘 사람은 유신이 더디고, 파괴가 신속한 사람은 유신이 신속합니다. 파괴가 작은 사람은 유신이 작고, 파괴가 큰 사람은 유신이 큽니다. 유신의 정도는 마땅히 파괴와 비례합니 다. 유신 가운데 가장 먼저 착수해야 할 것이 바로 이 파괴입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바야흐로 큰 종기를 앓아 여러 의사에게 치 료를 받는데, 그 종기가 저절로 터져서 낫기를 기다리며, 어둑하 니 손을 쓰지 않는 것은 의술의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우선 차 치해둡시다. 대략 침과 뜸을 놓아 겉으로 그 피부를 아물게 하고 그 근원을 제거하지 않아 임시방편에 힘쓰는 사람은 용렬한 의사 입니다. 치료하지 않는 며칠 사이에 그 남아 있는 피와 독이 피부 안에서 더욱더 어지럽게 터지고 들떠서 환자의 고통이 치료받기 전보다 더욱 심하고 죽음이 장차 다가올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무릇 국가적인 명의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군살을 갈라 엉 긴 피를 빼내 그 독을 제거하고 병의 근원을 뽑아낸 다음에, 증세 에 따라 약을 주어 점차 완전히 아물게 하여 환자로 하여금 완연 히 애초부터 종기를 앓지 않은 것처럼 만듭니다. 저 용렬한 의사가, 명의가 만약 살을 갈라 피를 빼내는 데 조금도 동정하지 않는 그 모습을 한번 보았다면 매우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며 ‘장차 사 람을 죽이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완치한 후에 비교해본다면,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는가 와 누가 우수하고 누가 열등했는지를 똑똑한 사람이나 멍청한 사람이나 모두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파괴란 살을 가르고 피를 빼내는 것과 같은 부류입니다. 유신에 있어서 의당 파괴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은 의사가 살을 가르고 피를 빼내는 것을 먼 저 하는 것입니다. 유신을 말하면서 파괴를 원하지 않는 것은 남 쪽의 월越나라로 가는데 북쪽으로 마차를 모는 것이니 할 수 있 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수구파守舊派 승려들을 알 만합니다. 


무릇 누군들 일이 유구하게 진행되면서도 폐단이 없기를 바라 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점점 깊어지면 어디서부터인가 폐단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여 차츰차츰 다시는 예전의 모 습이 아니게 됩니다. 조선朝鮮에 불교가 있은 지 천오백여 년이 되 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폐단이 생겨나고 폐단이 다시 폐 단을 낳아 오늘에 이르러서는 폐단이 이에 극에 달했습니다. 이른 바 폐단이라는 것은 실로 파괴의 자료입니다. 이러한 파괴의 자료 가 있는데도 피상적인 개량을 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 니다. 무릇 불교의 유신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유신하지 못할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파괴하지 못함을 근심해야 합니다. 


승려僧侶의 교육敎育을 논함 


교육이 많으면 문명이 융성하고, 교육이 적으면 문명은 쇠퇴합 니다. 교육이 없다는 것은 야만, 금수禽獸가 되는 길입니다. 옛날에 상庠, 서序, 학교學校를 설치하여30 사람을 가르친 것은 사람을 야 만, 금수로 만들지 않고자 해서입니다. 맹자孟子는 “편안하게 살 면서 교육이 없으면 금수에 가까워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스 스로 선택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교육에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무릇 문명은 교육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교육은 문명의 꽃이 요, 문명은 교육의 열매입니다. 문명은 온도계의 수은주와 비슷 하며 교육은 기후와 비슷합니다. 기후의 정도에 따라 오르고 내 리는 것은 온도계의 수은주이며, 교육의 정도에 따라 융성하고 쇠퇴하는 것은 문명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는다면 배움이 귀중 하고 잃을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입고 먹고 자고 깨고 하는 것 외 에 별도로 목적이 존재합니다. 목적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의무 의 피안彼岸이 이것입니다. 목적에 도달하는 데에는 스스로 방법 이 있어서 엎어지거나 낭패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방법을 알고 자 한다면 대개 그 요령을 배워야 합니다. 이이즈미 기쿠조飯泉規 矩三31가 말하기를 “뜻을 세우고 나서 이 목적을 달성코자 하는데 달성하는 방법은 스스로 배움에서 도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배움에도 요령이 있습니 까? 있습니다. 지혜를 자본資本으로 삼고, 사상의 자유를 공례公 例로 삼고, 진리를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배우는 이는 이 세 가 지 중에서 어느 하나도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비록 그렇지만 지 혜가 없고, 자유가 없는 것은 그래도 괜찮을 수 있겠으나 사상의 자유가 없는 것은 불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혜가 없고 자유 가 없는 사람이 진실로 사상의 자유가 있다면, 비록 배울 수 없는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수는 있겠으나 그래도 자유로운 인격을 상실하지는 않은 것이라 우직愚直한 사람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 상의 자유가 없는 사람은 그 학문의 정밀함과 정밀하지 않음을 물 을 것도 없이 한마디로 “노예의 학문”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30 중국 고대의 교육기관. 상은 주周나라, 서는 상商나라, 교는 하夏나라, 학은 삼대三代가 모두 동일했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관련 전고가 나 온다. 

31 이이즈미 기쿠조飯泉規矩三: 《학술자수법学術自修法》(日本, 博文館, 1895)이라는 저술이 있다.

노예란 무엇입니까? 이름 붙일 것이 없겠습니다만, 굳이 이름 을 붙이자면 살아 있는데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 있는데 죽은 사 람이라는 것은 비록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무 릇 진짜로 죽어서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사람들은 그 슬픔 을 견디지 못하거늘, 살아 있는데 죽은 사람은 비록 그의 죽음을 조문하고자 하지만 이미 그 비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장자》에 말하기를32, “슬픔은 마음의 죽음보다 큰 것이 없고 몸이 죽는 것 이 그다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어찌 나를 속였겠습니까? 육신의 부림을 받는 노예는 금전金錢의 노예요, 학리學理의 노예는 정신의 노예입니다. 금전의 노예는 일시적인 노예이고, 정신 의 노예는 영겁永劫의 노예입니다. 무릇 사람이 또한 어떤 마음으 로 기꺼이 영겁의 노예가 되려 하겠습니까? 

32 《장자》 〈전자방田子方〉 편에 “무릇 슬픔은 마음이 죽는 것보다 큰 것이 없 고, 사람이 죽는 것이 또한 그다음이다(夫哀 莫大於心死 而人死亦次之)” 라고 하였다.

배우는 사람은 책을 대함에 깊이와 아름다움을 논할 것이 아 니라 마땅히 하나하나 나의 지혜로 그것을 점검하여 나의 마음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비록 대성인 대철학자의 논의더라도 헌 짚신짝처럼 내다 버리십시오. 내 마음에 부합하거든 비록 지 극히 어리석고 아주 미미한 사람의 말이더라도 기이한 꽃처럼 완 상하고 또한 여러 변화를 연구하여 이치에 부합하도록 힘쓰십시 오. 진실로 그것이 진리에 부합하거든 진실로 철안鐵案33을 이루 어 천고의 학설에 반대되더라도 자립自立하며, 온 세상의 미움을 받더라도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자유는 사람의 생명이며 학문의 핵심인 것입 니다. 아! 어찌하면 조선의 승려 학인들을 이끌어 노예의 경지로 들어가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노예의 길로 들어서면 비록 어 찌하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33 철안鐵案: 증거가 확실하여 번복할 수 없는 사건이나 사안이라는 뜻이다. 바꿀 수 없는 확정된 옥안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학계學界의 사상적 자유가 승려만 한 것이 없고, 사상적 부자유 가 또한 승려만 한 것이 없음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승려가 입학하는 경우, 그 정도에 따라 각기 학급이 정해지고 그것에 상당하는 과정을 공부합니다. 매일 정해진 과정 을 공부함에 학생이 먼저 하루 동안의 능력으로 정해진 과정의 문의文義를 스스로 연구하여 마음에 얻은 바가 있은 연후에, 동급 생이 모여 논하고 토의하며 반복하여 논변하고 득실得失을 대략 정한 뒤에야 비로소 스승에게 물어 가부可否를 결정합니다. 이것 은 승려 학계의 특색입니다. 다른 학계의 학인들이 하나도 스스 로 연구하지 않고 오직 스승만을 따르는 것에 비교하면 그 사상 의 자유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이런 법도가 오래되자 폐단이 생겨서 규칙과 실 제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배우는 사람들이 연구하고 논하는 것이 장구章句의 뜻을 따지는 짧은 주석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변론하 고 다투는 것이 오직 남을 꺾고 내 사견私見을 수립하는 것뿐입니 다. 큰 의리와 깊은 취지에 있어서는 들어서 묻는 바가 없습니다. 종일 연구하고 종일 논강論講하면서도 연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논강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아득하게 얻는 것이 없는 사람이 열 명 가운데 일고여덟입니다. 만약 한번 자기 의견을 수 립하여 선배의 설을 반박하면 반드시 사견私見을 지닌 외도外道 로 지목하여 그로 하여금 감히 한 마디도 그 자리에서 못하게 합 니다. 앞서 말한 설에 따르면 어찌나 자유로운데, 뒤에 말한 설에 따르면 어찌나 부자유스럽습니까. 

사상의 자유가 어찌 구구한 장구章句의 훈고訓詁와 남과 나의 사견에 그치겠습니까. 이것이 학계의 사상적 자유가 승려만 한 것이 없고, 사상의 부자유가 또한 승려만 한 것이 없는 까닭입니 다. 만약 이같이 끝내 노예의 학문으로 귀결된다면 감히 승려라 고 이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상이 한번 자유롭지 않게 되면 비 록 아무리 지혜가 있고 아무리 박학하다고 해도 다 모두 노예 노 릇을 잘하는 도구가 많아지는 것뿐입니다. 그 지혜와 박학을 아울 렀지만 사상의 자유가 없는 것이 승려의 학문이 오늘날 땅에 떨어 지고 만 까닭입니다. 배우는 사람들은 어찌 반성하지 않습니까? 


승려 교육의 급선무急先務가 셋이 있습니다. 첫째는 보통학普 通學입니다. 보통학이란 사람의 옷과 음식과 같습니다. 동양과 서 양, 황인종과 백인종을 물론하고 옷 입고, 음식 먹고 살 줄 아니, 옷 입지 않고 음식 먹지 않는 사람은 며칠 지나지 않아 이 세상과 영원히 하직할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보통학도 또한 그렇습 니다. 진실로 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행동과 일상의 온 갖 일에 있어 담장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것 같아서34 경쟁시대競爭 時代에 생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명국文明國의 무릇 사지四肢와 육근六根35을 갖추고 능히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 면 보통학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보통학은 전문학專門學 의 예비과預備科입니다. 종교학자는 마땅히 이에 대해 재삼 생각 해야 합니다. 승려 학생이 자기 능력의 우열을 불문하고 모두 불 교 전문학에 종사하여 보통학 보기를 원수처럼 여겨서 비단 배우 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험담을 하니 그 역량을 알지 못함을 크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34 담장을 마주 보고 있는: 원문은 면장面墻으로 되어 있다. 면장은 이치를 몰 라 담장을 마주하고 선 것처럼 앞이 캄캄한 것을 가리킨다. 《논어》 〈양화陽 貨〉 편에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는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 南〉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바로 담장 을 마주하고 선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전고가 있다. 

35 육근六根: 6식識을 낳는 여섯 개의 뿌리, 즉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 의意를 말한다.


또 불교 교과서와 교수하는 절차가 모두 적당하지 않기에 왕왕 일은 배를 들이고도 성과는 반도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학문이 쇠미해지매 흩어지되 거두지 못하여 점차 안목이 고루해 지고 흉금이 부패해져 더럽고 기괴하고 허랑한 말로 세상을 놀라 게 하여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승려를 폐기된 물건처럼 지 목하게 하고 사람 무리에 끼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저 한 몸을 스 스로 해치는 것만도 이미 슬픈 일이건만 불교에 손상을 주는 점 이 또한 심하지 않습니까? 진실로 그러하다면 불교 교과서를 혹 새로 편찬하거나 산정하여 그 차례를 정하여 우리 생활 주변에 익숙하여 이해하기 쉬운 것을 보통과에 넣어서 배워 익혀 졸업하 게 한 뒤 그 택할 바를 알게 한 연후에 불교 전문학에 점점 들어간 다면 그 일이 아주 순하게 돌아가며 그 이치가 쉽게 천명될 것이 니 보통학을 그만둘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둘째는 사범학師範學입니다. 무릇 거푸집模이 거푸집 노릇을 못 하고 본範이 본 노릇을 못 한다면, 그 그릇이 움푹 패거나 삐뚜 름하지 않게 하려 한들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번 네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고, 높고 낮고, 비스듬하고 똑바른 것이 거푸집 과 본에 있어서 마땅함을 얻는다면 그 그릇 자체를 새삼 칭찬하 기에는 부족합니다. 사람을 교육하는 것도 또한 그러합니다. 스승의 도를 얻는다면 배움 역시 반은 넘어섰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범師範, 즉 스승의 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천연 天演의 사범이니, 우리의 육근六根과 육식六識에 외부 세계가 저 절로 감촉되어 얻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사人事의 사범이니, 가르치고 인도하며 감화시켜 익히게 하여 그 폐단을 바로잡고 구제 해주는 부류입니다. 옛것을 미루어 지금에 미쳐볼 때, 이 두 가지 스 승의 본에 힘입지 않고 배운 사람은 없었습니다. 복희씨伏羲氏의 팔 괘八卦는 하도河圖에서 배운 것이고, 대우大禹의 구주九疇는 낙서 洛書에서 배운 것입니다.36 콜롬버스의 지구학地球學은 물에 뜨는 풀에서 배운 것이고, 뉴턴의 중력에 관한 학문 〔重學〕은 사과 열 매에서 배운 것이고, 와트의 증기기관학蒸氣機關學은 끓는 물에 서 배운 것이고, 다윈의 진화학進化學은 여울의 돌에서 배운 것이 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천연의 사범에서 배운 것입니다. 우서虞書 의 교관敎官과 예기禮記의 임사任師, 태임太姙과 태사太姒37의 태 교胎敎와 맹모孟母의 삼천三遷은 모두 인사의 사범입니다. 철인哲人, 군자君子・영웅英雄・호걸豪傑과 구류백가九流百家38로서 후대 에 이름이 전해지는 탁월한 사람들이 어찌 어진 스승을 얻은 다 음에 대성하지 않은 이가 있겠습니까? 사범의 도道가 갖추어지 지 않으면 글 읽는 소리가 거리에 흘러넘치고 길에 가득하다 하 더라도 나는 그것이 장차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36 복희씨伏羲氏의 팔괘八卦와 대우大禹의 구주九疇: 복희씨가 황하黃河에 출현한 용마龍馬의 무늬를 숫자로 환치하여 하도를 만든 뒤 팔괘八卦를 그 었다 하며, 하우夏禹가 치수治水할 때 낙수洛水에 출현한 신귀神龜의 반 점을 본받아 《상서尙書》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를 만들었다고 한다. 

37 태임太姙과 태사太姒: 태임은 주 문왕周文王의 어머니이고, 태사는 주 문왕의 아내이다. 

38 구류백가九流百家: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 家・묵가墨家・종횡가縱橫家・잡가雜家・농가農家 아홉 개 학파와 그 사상을 설파한 학자들을 말한다.

오늘의 스승은 전일의 학생이니, 오늘날 사범師範의 좋고 나쁨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옛날 교육의 득실을 살펴보면 충분합니다. 승려 교학敎學의 일을 대개 이미 말하였으니, 이른바 사범의 자격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요행히 스승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육대주六大洲를 구 분하지 못하고 오곡五穀을 알지 못하여 생존 경쟁설을 들으면 때 로는 귀머거리가 음악을 듣는 것처럼 하고 만국 지도萬國地圖를 대하면 어느 곳이나 소경이 그림을 보는 듯이 합니다. 무릇 이와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아! 천지가 크고 학문 세계 가 광활하거늘 후생後生이 무슨 죄로 이렇게 어리숙하게 부끄러 움도 모르는 자들의 지도를 받고서 그 전철前轍을 밟아 제2의 뽕 나무벌레39가 되는 것을 감수한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일이 서 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다면 후생에게 해를 끼침이 어찌 그 끝 이 있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니라 사범師範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도를 반대로 돌리고 싶다면 마땅히 먼저 사범학교를 설립하여야 합니다. 승려 가운데 15세 이상부터 40 세 이하까지 조금 재주와 덕망이 있는 자들을 모두 응당 선발하 여 수업을 받게 합니다. 그 과정은 보통학, 사범학, 불교학을 조화 롭게 합하여 가감하여 마땅함을 얻기를 도모한다면 수업을 시작 한 지 사오 년 안에 소학교小學校 교사가 진실로 사람이 모자라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이전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불교를 한번 보기만 해도 곧 구역질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새 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여 진전만 있고 후퇴는 없으면 장래 불교 가 세계에 큰 광명을 발하게 될 것이 이 일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교육 운운하면서 사범학을 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섭공葉公이 용을 좋아한 것40과 같은 경우입니다. 

39 뽕나무벌레: 원문에는 명령螟蛉이라고 되어 있다. 명령은 학생, 생도를 비 유하는 말이다. 그 전고는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 시에서 유래한다. 해당 시에 “언덕 가운데의 콩을 서민들이 거두어 가는 것처럼, 명령의 새끼 를 과라가 업어 데리고 가서 키우니, 그대도 아들을 잘 가르쳐서, 좋은 방향 으로 닮도록 하라(中原有菽 庶民采之 螟蛉有子 蜾蠃負之 敎誨爾子 式穀 似之)”라고 하였다. 옛사람들은 과라蜾蠃, 즉 나나니벌이 명령, 즉 뽕나무벌 레를 데려다가 자기의 양자로 삼아 길러서 과라로 만든다고 믿었다. 

40 섭공이 용을 좋아함: 섭공호룡葉公好龍 고사이다. 초楚나라 섭공 자고葉 公子高가 용을 좋아해서 손이 닿는 곳마다 용 그림을 새겼는데, 진짜 용이 소문을 듣고 그 집에 내려오자 섭공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고 한다. 


셋째는 외국外國 유학留學입니다. 인도印度에 유학해서 부처 님과 조사祖師들의 참다운 발자취를 찾게 하며, 경經・논論 가운 데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은 것을 널리 구하여 그 중요한 것을 선택하여 번역해 세계에 배포합니다. 또 중국中國에 유학해서 불 교가 동쪽으로 전해온 이후의 역사와 조사들의 기문이적奇聞異 蹟, 그 외 불교에 관계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여 참고자료 로 구비해둡니다. 구미 문명 각국에 유학하여 그들 종교의 연혁沿 革, 현황現况, 그 외 여러 사항을 문의하여 그 좋은 점을 선택하여 우리의 결점을 보완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유학의 취지가 대략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무릇 지식을 교환하여 서로 학문을 소통하는 것이 이치를 밝게 통달하는 길이고 유구하고 심원해지 는 대책입니다. 외국 유학이 진실로 그 도를 얻는다면 불가사의 한 이익이 예사로 많은 일 밖에 있을 것입니다. 뜻 있는 사람은 응 당히 심사숙고深思熟考하기 바랍니다.

 오늘날 교육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상황이 이같이 그 극에 달했거늘 저 늙고 썩은 완고하고 비열한 무리들이 백방으로 막고 장난질하여 구습을 따르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청년으로 하여 금 나와 같이 머물러주지 않는 시간을 무위無爲 속에서 허송케 합 니다. 아! 저들은 이미 배우지 못하여 자기 몸을 망치고 그 종교 를 쇠퇴하게 하고도 남습니다만, 청년이 저들에게 무슨 잘못과 원한이 있기에 그들로 하여금 배움 없게 하여 함께 망하는 길로 들어가려고 한답니까. 좋지 않은 마음가짐이 무엇이 이것보다 더 하겠습니까? 

문명의 조류는 그 힘이 매우 커서 결코 이 무리가 저항하여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이 장차 널리 퍼져 향 상될 것임은 손바닥 보듯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그러 하나 지금 문명이 날로달로 매우 빨리 발전하여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로도 쫓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완급에 차이가 있으면 그 차이가 현격해지니 비록 급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 어찌 급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승려 동포들에게 “교육을 방해하는 자는 반드시 지옥에 가고 교 육을 진흥進興시키는 자는 마땅히 불도佛道를 이룰 것이다”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참선參禪을 논함 


음양陰陽의 천변만화는 태극太極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회화繪畵의 여러 모습은 흰 바탕이 있은 후에 있는 것입니다.41 크고 작은 만 가지 법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을 밝히는 도를 참 선參禪이라고 합니다. 본래 참선이 아닙니다만 이름하기를 참선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41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그림을 그려 문체를 이루는 일은 하얀 바탕의 비 단이 마련된 뒤에야 가능한 것이다(繪事後素)”라는 전고에서 온 말이다.

마음 밖에는 사물이 없습니다. 어찌 마음 밖에 사물이 있겠습 니까? 시간 속 역사와 공간 속 만물이 모두 마음에 의거하여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 어떤 사물도 능히 마음 밖에 홀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뿔이 있는 것은 소가 되고 갈기가 있는 것은 말이 되고, 나는 것은 새가 되며 달리는 것은 짐승이 됩니다. 비늘이 있는 것 은 수족水族이 되며, 무성하고 시드는 것은 초목이 되는 것은 육 안으로 범범하게 보면 모두 실제로 있는 것이고 거짓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이 소, 이 말, 이 새, 이 짐승, 이 수족, 이 초목 이 본디 소가 아니고, 말이 아니고, 새가 아니고, 짐승이 아니고 수족이 아니고 초목이 아닌데 마음이 거짓으로 정해짐에 따라 비 로소 소가 되고 말이 되고, 새가 되고 짐승이 되고 수족이 되고 초 목이 되었음을 알겠습니까? 

무릇 환상이 혹 있기도 하고 혹 없기도 하며, 혹 공중에 있기도 하고 혹 지하에 있기도 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저 환상이 본디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공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 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것을 본 사람이 마음으로 그 거짓 된 상을 정하고서는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고, 공중에 있다고 하 고 지하에 있다고 합니다. 진실로 그 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면 이른바 있고 없고 공중, 지하라는 것이 스스로 성립될 수 없어, 환 상술사의 재주가 이에 끝이 납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만리장성 萬里長城과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영국의 런던과 미국의 뉴욕, 태 평양의 산호섬과 시베리아의 대철도, 월남인의 아직도 남아 있는 눈물과 폴란드인의 밀어密語, 이와 같은 항하의 모래알같이 많은 사물이 어찌 무엇 하나 마음의 거짓 정한 것이요 본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일체유심조一切惟心造” 42라고 하였습니 다. 아! 한번 눈이 가려지면 헛꽃空華43이 어지러이 떨어지니 만물 은 마음의 헛꽃이고, 마음은 만물에 의해 가려진 것입니다. 진실 로 마음에 가려짐이 없으면 만물이 와서 비침에 진상眞相의 털끝 만큼이라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한번 밝아지면 만 가지 이치를 깨치니 이것이 참선이 생겨난 연유입니다. 

42 일체유심조一切惟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43 헛꽃(공화, 空華): “일체의 세간世間은 허공에 아른거리는 꽃과 같다” 하였 는데, 그것은 눈에 병이 있는 사람이 허공을 쳐다보면 꽃 같은 것이 아른거 리나 실제로는 꽃이 없다는 뜻이다. 


시험 삼아 세계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인연 으로 이 세상에 나투셨습니까?”라고 하면 그들은 대답할 것이 없 을 것입니다. 또 물어봅니다. “인간을 조직하는 것은 대개 심리心理와 몸뚱어리 〔軀殼〕입니다. 몸에 관해서는 물리학자와 의학자 의 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심리의 조직이 과연 어떻게 이루 어진 것이겠습니까? 심리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원자原子입니 까? 또는 두 개 이상의 원자가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입니까? 별 개의 사물이 위에서 조성한 것입니까? 아니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라고 하면 그들은 대답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 물 어봅니다. “인생 백 년 안에 반드시 죽는 날이 있습니다. 그 죽을 때에 마음과 몸이 동시에 소멸됩니까? 아니면 죽지 않은 것 하나가 초연히 무궁하게 홀로 존재하고 있습니까?”라고 하면 그들은 대답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 예로부터 지금까지 동서의 철학자와 이학자理學者가 끊임 없이 나타났는데도 이처럼 나 자신에 가까운 나의 심리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것은 유독 어째서일까요? 이학자들은 다 만 뇌 속에 갖추어진 지혜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혹은 추측 하기도 하고 혹은 실험하기도 할 뿐입니다. 무릇 세상 사물의 이 치라는 것은 무궁한 것이고 지혜라는 것은 유한한 것입니다. 유 한한 지혜로 무궁한 이치를 연구한다면 공겁空劫의 인간들을 다 모아서 전적으로 이 일에 종사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다 마 치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리불舍利弗44과 항하 의 모래알 같은 보살의 사고 역량을 다 해도 조금도 알 수 없다” 라는 것이 정말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매우 복잡하고 미묘 한 이치는 생각과 계교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마음은 지혜 보다 위에 있으면서 지혜를 명령하고 좌지우지하는 것이니 명령 받는 지혜로 어찌 월권하여 도리어 그 마음을 연구할 수 있겠습 니까? 그러므로 마음은 지혜로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어떤 사물도 마음 위에 있는 것이 없으므로 이 마음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부득불 스스로 자기 마음의 본체를 고요히 길러 스스로 밝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과 생각을 끊고 단번 에 일체 인연과 단절하여 이 일대사 공안公案을 끝까지 궁구하여 하루아침에 활연豁然히 개오開悟한다면 마음의 크고 완전한 체體 와 용用이 밝혀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고 근본적인 심리의 문 제가 이에 얼음 녹듯이 풀릴 것입니다. 질정하여 말하자면 참선 은 체이고, 철학은 용입니다. 참선은 스스로 밝히는 것이고, 철학 은 연구입니다. 참선은 돈오頓悟요, 철학은 점오漸悟입니다. 

44 원문은 추자鶖子로 되어 있다. 이것은 팔리어語 ‘샤리푸타(Sāriputta)’의 음 역音譯으로, 석가釋迦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사리불舍利佛・사리자 舍利子라고도 칭하는데, 전하여 승려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참선의 요점을 정리하자면 적적성성寂寂惺惺45이라 고 하겠습니다. 적적寂寂하면 움직이지 않고, 성성惺惺하면 어둑 하지 아니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분란 일어남이 없고 어둑하지 않으면 혼타昏惰함이 없으니 분란 일어남이 없고 혼타함이 없으 면 마음의 본체가 밝아집니다.


 이상합니다. 오늘날 참선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옛사람은 그 마음을 고요하게 하였는데, 오늘날 사람은 그 처소를 고요하게 합니다. 옛사람은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오늘날 사람은 그 몸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처소를 고요하게 하면 염세厭世가 될 뿐이고 그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독선獨善일 뿐입니다. 불교는 구세救世의 종교이고 중생을 제도하는 종교이거늘 불제자가 되어 서는 염세와 독선일 뿐이라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래 조선 사찰은 외로운 암자나 쇠락한 절을 제외하고는 선실禪室이 없는 곳이 거의 없으니, 어찌나 선풍禪風이 진작된 것이겠 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자세히 그 내용을 고찰해보면 반드시 모 두가 선의 본의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혹은 선실 을 절의 영예를 누리기 위한 도구로 삼기도 하고, 혹은 선실을 이 익을 추구하는 도구로 삼아서 어지럽게 막 생겨났으니, 선실이 점점 많아지지만 진정한 선승禪僧은 봉황의 깃털과 기린의 뿔처 럼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형세상 부득불 항산恒産 없는 사람들을 인수만 충당해두니 그 폐단이 점점 쌓여가서 오늘날에 이르니 선 승 총인원 수 10푼分 가운데 진정한 선승은 1푼에 불과하고 다만 먹고살기 위한 자들이 2푼, 우매하고 게으른 데다가 먹고살기를 겸하는 자들이 7푼입니다. 선지禪旨의 단서조차 알지 못하고 어 영부영 세월을 보내며 다만 옛 조사祖師들이 뽑아놓으신 몇 구절 로 구두선口頭禪을 삼고서 차츰차츰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과 마귀같이 몰려오는 졸음의 정다운 벗이 되어 혼침惛沈46과 도거掉擧47 사이에서 청춘을 보내고 백발을 맞이하니 과연 뭐 하는 짓입니까? 

46 혼침惛沈: 범어 styana에 해당하는 말, 마음이 어둑하고 침울하여 진취적이 고 적극적인 의지와 활동을 상실하게 하는 정신작용을 의미한다. 

47 도거掉擧: 생각이 어지럽게 일어나 정신이 산란한 모양.

이처럼 조선의 참선은 겨우 이름만의 참선일 따름입니다. 요약 해서 말하자면 선실이라는 것은 영리榮利의 산아産兒요, 선승은 쌀로 사온 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감히 전부를 같은 궤에 귀결시키지는 못하겠으나, 십중팔구는 불행히도 내 말에 딱 들어 맞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 말에 의심이 간다면 시험 삼아 오늘날 선실에 하루아침에 그 희료餼料를 모두 폐하면 선승들 가운데 다수가 과연 전일보다 민멸됨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생 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큰 선승은 비록 상근上根을 지닌 대지大智 라도 참선하기를 진실로 쉽지 않게 여깁니다. 과연 이같이 노닥 거려서 혹여나 그 효과를 보겠습니까? 부득불 시들고 쇠퇴한 적 폐를 단번에 쓸어버리고 별도로 올바르고 올바른 규정과 제도를 수립하여 장래 완전해지기를 도모할 뿐입니다.


 참선을 새롭게 함에 그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조선 각 절의 선실의 재산을 합하여 한두 곳 대규모의 선학관禪學館을 적당한 장소에 세우고 선리禪理에 밝은 몇몇 사람을 초빙하여 스승으로 삼습니다. 참선하고자 하는 사람은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다 수 용합니다. 그 모집할 때 일정한 방법으로 그들을 시험하고 그 선 에 들 때에는 모두 일정한 시간이 있어서 감히 산만하게 하지 못 하게 하고 매달 혹 청강聽講을 하거나 혹 토론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참선의 정도를 시험하고 한편으로는 그 지식을 교환하게 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얻은 바가 많거든 응당 저서를 세상에 공표 하여 중생을 제도하면 여래의 경지에 한번 뛰어드는 것은 비록 조만간 그런 경우를 만날 것을 기약할 수 없겠으나 형식상으로 정진하는 규정과 제도가 어찌 반듯하지 않겠습니까? 

각 절에서 직무를 맡아 전문 도량에 들어갈 수 없는 승려라면 마땅히 자기 절에서 조그만 참선 모임을 두어 매일 그 직무를 집 행하는 여가 한두 시간 동안 참선하면 되겠습니다. 어찌 유독 선 실을 설치해둔 이후에야 참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 긷고 땔감하고 하는 것이 묘용妙用 아님이 없고48 시냇물 소리 산 풍경이 똑같이 진상眞相입니다.49 이얏〔咄〕! 

48 불법佛法의 수행은 물 긷고 땔감 하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말 이다. 당나라 때 선종의 유명한 거사居士인 방온龐蘊의 게송偈頌 중에 “신 통과 묘용은 물 긷고 땔나무를 하는 데에 있다(神通併妙用, 運水及搬柴)” 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49 소동파는 평소에 선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황주黃州에 유배 갔을 때 임 제종臨濟宗의 고승 동림 상총東林常總을 뵈었다. 그에게서 무정설법無情 說法의 이치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示人”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다. 본문에서 시 냇물 소리, 산 풍경을 이야기한 전고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역자의 말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을 요즘 말로 다시 번역했습니다. 번역 과정에서 여러 선학의 연구와 번역의 성과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문 원문은 1913년 회동서관 판본을 기준으로 교감을 하였습니다. 만해는 낙후된 불교의 쇄신을 위해 이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그가 근대의 길목에서 불교의 문제를 논하였기에, 불교의 쇄신이 민족의 운명과 긴밀한 연관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질정을 바라며 부족한 번역본 을 공개합니다. 원문은 설악불교문학관 아카이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http://www.manhaemusan.org/archive/a1/book-index/b14)


국민대학교 교수(조교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조시대 정치적 글쓰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저술로 《정조의 문치》, 《정조의 신하들》이 있다. 전통 시대 문학과 정치라는 주제로 정조 연간 한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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