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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겨울] 다시 읽는 만해 한용운 - 새 번역, 조선불교유신론 2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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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불교 유신維新에 뜻을 두어 얼마간 가슴속에 대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당장 세상에 거행할 수 없었습니다. 형체 없는 불교의 신세계를 구구한 문자로 세워보며 적막한 신세를 스스로 위로할 뿐이었습니다. 

무릇 매화나무를 바라보면서 갈증을 멈추는 것도 양생養生의 한 방법입니다. 이 논설論說은 진실로 매화나무의 그림자에 불과 합니다. 나의 목마름의 불꽃이 전신을 이렇게 태운다면, 부득불 한 그루 매화나무의 그림자로 만곡萬斛의 맑은 샘 역할을 하게끔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불가佛家에서는 가뭄이 매우 심한데, 우리 승려들도 목마름을 느끼는 자가 있는지. 과연 있다면 이 매화나무 그림자를 비춰보기 바랍니다. 듣자 하니 육도六度 가운데 보시布施가 제일이라 합니다. 나도 이 매화나무 그림자를 보시한 공덕으로 지옥쯤은 면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1910년 12월 8일 밤 

저자 씀




염불당念佛堂의 철폐를 논함

 

조선의 이른바 염불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부르는〔呼佛〕 것이지 진정한 염불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부르는 것은 어째서입니가? 아미타불阿彌陀佛1이 극락국極樂國에 있어서입니까? 서방에 십만억이 넘는 국토를 지나 한 나라가 있으니 이름이 극락국2입니다. 얼마나 멉니까? 전화가 없다면 비록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 부른다고 해도 십만억 국토 너머에서는 들을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불신佛身이 법계法界에 충만해서 부르는 것입니까? 원근遠近 내외가 불신이 아님이 없으니 다시 어째서 부른단 말입니까? 자기 마음이 아미타불1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그러면 그것은 항상 내 몸속에 있기에 손을 저어도 떠나지 않고 불러도 오지 않아 떠남도 옴도 없는 주인옹입니다. 다른 사람의 부름을 받는 것은 가능하지만 스스로 부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은 가능하지만 스스로를 부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미타불로서 아미타불을 부른다면 누가 부르고 누가 답하는 것이겠습니까? 무릇 지극한 도는 말이 없거늘 어찌 그리 말이 많습니까? 유마거사維摩居士3는 한 번 침묵했을 뿐인데 어찌 침묵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도를 불러서 구할 수 있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부르는 것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만 불러도 구할 수 없다면 부른다고 하더라도 쓸데없는 말이 될 것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

극락국極樂國: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말한다. 지극히 안락하고 행복한 세계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살았다고 한다.

유마거사維摩居士 : 원문은 정명淨名으로 되어 있다. 정명은 인도印度 비야리국毘耶離國의 장자長者로서 석존釋尊의 속제자俗弟子였다는 유마거사維摩居士를 가리킨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유마거사를 찾아와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유마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문수가 탄식하며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으로 들어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유마경維摩經 』에 전하는 고사이다.


내가 듣기로는 염불의 궁극적인 목적이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어찌 그렇겠습니까? 성불成佛하고 나서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들어봤지만 부처님을 불러서〔呼佛〕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예토穢土가 곧 정토라는 것은 들어봤지만 예토4 말고 그밖에 별도로 정토가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흙은 본디 더럽고 깨끗함이 없건마는 다만 마음에 더럽고 깨끗함이 있습니다. 동일한 세상일이건만 나폴레옹이 보면 어려움이 없고 나약한 사내가 보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동일한 한신韓信이었지만 백정이 그를 보고서는 거지라고 여겼고, 소하蕭何가 그를 보고서는 영웅이라 여겼습니다. 동일한 국토입니다만 문병 온 대중5은 보고 예토라고 하고 유마거사는 보고 정토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동일한 지경인데 본 바가 전혀 다른 것은 각기 그 업식業識을 따랐을 뿐이니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부처의 처지로 보면 정토가 아닌 곳이 없으며, 중생의 처지로 보면 예토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가 곧 연화상품蓮華上品이건만 중생이 스스로 보지 못할 뿐입니다. 무슨 인연으로 부처님은 보고 정토라 하시고 중생은 보고 예토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법안法眼으로 보셨기 때문에 정토라 하신 것이고 중생은 육안肉眼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토라고 하는 것입니다. 법안이란 무엇입니까? 가림이 없을 뿐입니다. 육안이란 무엇입니까? 가림이 있을 뿐입니다. 가림이 있고 가림이 없는 것은 마음이 밝으냐 밝지 않으냐에 달려 있습니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자기 마음이 정토일 뿐입니다. 경에 이르기를 “중생의 마음이 보살의 정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자기 마음이 정토인데 정토를 구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구한다면 이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이고 거북이 등에서 털을 찾는 격입니다. 일생토록 이 일에 몰두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예토穢土 : 청정한 국토인 정토淨土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부정한 것이 가득찼다는 더러운 국토를 예토穢土라고 한다.

문병 온 대중 :원문은 문질대중問疾大衆으로 『유마경維摩經 』 의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의 고사를 전용한 것이다. 유마힐이 중생의 병이 다 낫기 전에는 자신의 병도 나을 수 없다면서 드러눕자, 석가모니가 문수보살文殊菩薩 등을 보내 문병하게 하였는데, 문수가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서 물었을 때 유마힐이 묵묵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문수가 탄식하며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으로 들어간 것이다.〔是眞入不二法門也〕”라고 하였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부처님께서 그 정성에 감동하시고 그 뜻을 불쌍하게 여겨 극락으로 인도하신다”라고 합니다. 어찌, 어찌 그렇겠습니까. 이것은 인과因果의 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인과란 무엇입니까? 선한 원인을 지은 자는 선한 결과를 받고 나쁜 원인을 지은 자는 나쁜 결과를 거두게 되니, 오늘날 세상에서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옥에 갇히거나 징역을 살고 선한 일을 한 사람은 표창을 받거나 대대로 녹을 받는 부류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애초부터 원인 없는 결과, 결과 없는 원인이 없으니, 어찌 일조일석에 요행이 면하기도 하고 우연히 얻기도 하겠습니까? 정토에 왕생할 원인이 없는 경우 왕생할 수 없음이 환하게 분명합니다. 자기가 지은 원인의 선악은 불문하고 다만 염불의 정성만을 불쌍히 여겨 정토로 갈 길을 인도한다면, 이는 부처님이 인과를 없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비록 어떤 악업을 지은 인간이라도 부처님께 아첨을 잘 하여 정토에 가기에 충분하다면 이것은 범죄자가 법관과 사사로이 친하여 요행이 형을 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법을 남용한다고 하니, 법을 남용한 죄는 법을 어긴 죄보다 더하여 형률이 이보다 더 엄한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나쁜 원인을 짓고서 선한 결과를 얻도록 하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선한 업을 짓는 것, 이것을 힘쓰기를 원하십니다. 무릇 봄바람은 사적으로 편애함이 없어서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합니다. 다만 복숭아 꽃이 핀 곳에 복숭아가 열리고 오얏 꽃이 핀 곳에는 오얏이 열립니다. 오이를 심으면 오이가 열리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을 뿐입니다. 꽃은 장미 꽃이 핀 곳에 열매가 감귤이 열리거나, 뿌리는 저령猪苓6인데 잎은 파초芭蕉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봄바람의 도덕적 책임일 뿐인 것입니다. 부처님도 어찌 여기서 벗어나시겠습니까? 설사 부처님께서 나쁜 업을 지은 중생을 정토에 인도하고자 한다면 어찌 유독 염불하는 사람만 인도하고 다른 사람을 인도하지 않으시어 차별을 만들겠습니까?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별도로 증오와 애정의 마음을 일으키면 청정한 깨달음의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대상을 대함에 저와 피아彼我 의식을 일으키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평등하고 차별 없고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설사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인도한다 하시더라도 마음이 곧 부처이니 나에게 성불할 만한 도가 있으면 내가 스스로 성불하여 스스로 정토에 가면 뭐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아주 멀고 아주 소원한 다른 곳의 부처님께 기꺼이 동정을 구걸하고 있으니 어찌하여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였으며 스스로를 노예로 여기고 타자를 주인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사람이 자유가 없으면 그때에는 곧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면 그 때에는 혹 불필요한 군더더기입니다. 무릇 두개골이 똑같이 둥글고 발꿈치가 똑같이 네모나고 팔다리가 똑같이 네 개이고 감각기관이 똑같이 다섯인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으로 스스로 군더더기가 될 뿐이라면 참으로 슬프지 않습니까? 중국의 옛말에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령猪苓: 약용으로 쓰는 식물인데 흔한 약초이다.


지금까지 말한 바는 중생이 거짓된 염불을 그만두고 참된 염불을 하게 하고자 한 취지였습니다. 거짓 염불은 무엇입니까? 오늘날의 이른바 염불이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이것입니다. 참된 염불이란 무엇입니까? 부처님을 마음을 생각하여〔念〕 나도 이것을 내 마음으로 삼고, 부처님의 배움을 생각하여 나도 그것을 배우고, 부처님의 행적을 생각하여 나도 그것을 행하여, 비록 한번 말하고 한번 침묵하고, 한번 고요히 있고 한번 움직이더라도 매번 반드시 그것을 생각하여 그 참됨과 거짓됨, 권교權敎와 실교實敎7를 가려서 내가 실로 그것을 소유한다면 이것이 참된 염불입니다. 남들이 참된 염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폐지 운운하는 것은 거짓된 염불 모임일 뿐입니다. 동일한 불성佛性을 지닌 엄연한 칠척七尺의 몸으로 백주 대낮이나 맑은 밤에 모여 앉아 찢어진 북의 가죽을 치고 굳은 쇳조각을 두들기며 의미 없는 목소리로 불러도 대답 없는 명호를 구십 프로 잠든 상태에서 부르고 있으니 과연 무엇하는 것입니까? 이 짓을 지목하여 염불이라고 하다니 얼마나 잘못되었습니까? 어떤 일을 막론하고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만 천하에 어찌 소리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진실로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사농공상士農工商 가운데 어떻게 복무하든 어떻게 일을 하든 모두 그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꼭 당상에 모여 앉아 소리내는 기계처럼 한 연후에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를 폐지하여 사람과 재물에 있어 백 번 이익이고 한 번도 해가 없는 상태로 하는 것과 어느 쪽이 더 낫겠습니까? 범인과 성인이 뒤섞이고 용과 뱀이 섞여 있습니다. 불문이 광대하여 이들을 진실로 포용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권도權道가 중도를 얻지 못하면 도라고 할 수 없고, 가설도 시의적절하지 않으면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군왕이 허리가 가는 여인을 좋아하니 궁중에 굶어 죽는 이가 많았고,8 장안 사람들이 높은 상투 틀기를 좋아하니 먼 곳에서는 혹 상투가 한 자 높이가 되었습니다. 불문에 방편이 많아 말류의 폐단에 이어 그 폐단이 극에 달했습니다. 아! 의원의 집에는 환자가 많고9 도편수의 침대는 다리가 부러진 격입니다.10 나는 중생이지만 그래도 근심이 매우 크거늘,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신 분인데 어찌 정으로 봐주고 계시는고.

권교權敎와 실교實敎 : 원문에는 “권실權實로 되어 있다. 근기에 알맞도록 가설한 방편을 권교라 하고, 구경 불변하는 진실을 실교라 한다.

군왕이 허리가 가는 여인을 좋아하니 :『한비자韓非子』 「이병二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이 허리가 가는 미인을 좋아하자, 밥을 먹지 않다가 굶어 죽은 궁녀가 많았다는 전고를 활용하였다.

의원의 집에는 : 해당 구절은 『장자』 「인간세人間世」 편의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들어가라. 의원의 집에는 환자가 많이 모이는 법이다.〔治國去之 亂國就之 醫門多疾〕”라는 구절을 전고로 활용하였다.

10 도편수의 침대는 : 해당 구절은 유종원柳宗元의 「재인전梓人轉」의 “후일에 그의 집에 들어가보니, 탁자에 발이 없는데도 수리하지 못하고, 다른 목공을 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他日 入其室 其牀闕足 而不能理 曰將求他工)”라는 구절을 전고로 활용하였다.

 


포교를 논함布敎

 

서양 말에 “공법公法 천 마디가 대포 일문一門만 못하다”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진리가 힘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적에 나도 모르게 그 너무 속되서 문명의 말에 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세도가 오늘날처럼 경쟁한다는 것을 보고 난 뒤에 비로소 이 말이 속되지 않을뿐더러 오늘날 세상의 이른바 문명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이 되기에 충분함을 알았습니다. 무릇 사물의 존망성쇠存亡盛衰를 겪으니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세상없이 참담한 것들은 어찌 그리도 공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포를 통해서 이루어졌는지, 진리에서 나오지 않고 세력에서 나온 것인지를 누차 보았습니다. 한 번만 본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서양인의 이 말이 전 세계의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되고도 남았으니 이와 같은 것을 일러 야만문명野蠻文明이라고 합니다. 도덕과 종교인들과는 걸맞지 않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오늘날 조선 승려처럼 세력이 업신여김받는 자로서는 한 번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릇 갑甲의 세력이 을乙의 세력을 능가하는데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죄는 갑에 있지, 을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례公例로 보자면 죄가 을에게 있지 갑에게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단순한 도덕으로 보자면 천하 만물이 감히 세력 때문에 서로 뺏고 서로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판단을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승열패優勝劣敗11, 약육강식弱肉强食12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등한 까닭, 열등한 까닭, 강한 까닭, 약한 까닭의 이치가 한 가지로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우 길어서 다 말할 수 없습니다만13 종합하여 말하자면 세력일 뿐입니다. 비유하자면 갑의 세력은 물과 같고 을의 세력은 땅과 같으니 지금 한 번 여기 물이 있는데 땅의 높이가 같지 않으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겠습니까? 낮은 곳으로 내려가겠습니까? 장차 낮은 곳으로 내려갈 것임은 비록 오척 동자라도 모두 알 것입니다. 무릇 동일한 땅이로되 물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고 낮은 곳으로 내려감은 어째서입니까? 물이 높은 곳에 있고 땅이 아래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땅이 높아지지 않으면 그 누구가 능히 물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땅이 아래 낮은 곳에 있어서 물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도록 보호할 수 없다면, 스스로 땅을 높여서 물이 역시 이 때문에 떠나가도록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이에 이르면 갑의 세력이 애초에 죄가 있고 없고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을의 세력이 스스로 높고 낮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을에게 죄가 있다고 여기지 않고 갑에게 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스스로 돌이켜 보는 도에 있어서14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릇 천하에 을이 된 자들은 마땅히 이러한 관점으로 정관正觀을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다른 종교의 “대포”가 우르릉 땅을 울리고 다른 종교의 세력이 도도히 하늘에 닿았습니다. 다른 종교의 물이 기세등등하게 이마 끝까지 올라왔습니다만 조선 불교에 어떻습니까?

11 우승열패優勝劣敗 : 나은 자는 이기고 못한 자는 패함. 또는 강한 자는 번성하고 약한 자는 쇠멸함.

12 약육강식弱肉强食 :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먹힌다는 뜻으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희생시켜서 번영하거나,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끝내는 멸망됨을 이르는 말.

13 매우 길어서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원문은 “경복난진更僕難盡”으로 되어 있다. 옆에서 모시고 있는 사람이 지루함을 느껴서 교대할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기』 「유행儒行」 편에 애공哀公이 유행儒行에 대해 묻자 공자孔子가 대답하기를 “갑작스레 헤아려 말해서는 다 얘기할 수 없고, 자세히 다 얘기하려면 오래 머물러야 하니, 피곤하여 보좌하는 사람을 번갈아 세우더라도 다 말할 수 없습니다.〔遽數之 不能終其物 悉數之乃留 更僕未可終也〕”라는 전고를 활용하였다.

14 스스로 돌이켜 보는 : 원문은 “반구지도反求之道”로 되어 있다. 『맹자孟子』 「이루상」에 “행하여 얻지 못한 것이 있거든 모두 반성하여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을지니, 제 몸이 올바르게 되고 천하 사람이 귀의할 것이다.〔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 其身正而天下歸之〕”라고 한 전고를 활용하였다.

조선 불교가 유린된 원인은 세력이 부진한 탓이고, 세력이 부진한 것은 가르침이 포교되지 않은데 달려 있습니다. 가르침은 종교의무선宗教義務線과 세력선勢力線이 병진해 가는 원천입니다. 조선에 들어온 외국 종교는 모두들 포교에 급급해하며 일로 삼으니 누군들 종교인의 의무가 이와 같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어찌 그 사이에 한 번 의문을 품고서 무릇 의무 외에도 별도 경쟁자가 있으니 세력이라고 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습니까? 한 사람에게 전교하면 한 사람의 세력이 늘어나고 두 사람에게 전교하면 두 사람의 세력이 늘어나니, 포교가 더욱 많아질수록 세력이 더욱 증가합니다. 세력이 더욱 증가하면 사람들이 복종하기 쉬워집니다. 사람들이 복종하기 쉬워지면 포교의 정도가 분에 넘치게 진척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포교를 통해 세력을 이루고 마지막에는 세력을 통해 포교가 이루어지니 날로 달로 세월이 흘러 그 축적됨이 더욱 두터워지리니 예수교가 동서양에 거의 두루 펴진 것은 이 때문일 뿐입니다.

조선 불교 중에 이른바 설법說法이라는 것이 약간 포교의 성질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법이 절간 밖을 넘어가지 못하고 그 취미가 야비하고 잡박하여 하나도 사람을 감동시킬만 한 가치가 없습니다. 이밖에는 별로 포교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진실로 지금 승려 총수가 조선 사람들의 3000분의 1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3000명의 사람 가운데 승려가 되는 사람이 겨우 1명이라는 말입니다. 승려가 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가난에 시달리거나 미신에 미혹되어서 나태하고 어리석어 산만한 정신을 거둘 줄 몰라 애초부터 불교의 진상眞相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인류 가운데 하등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3000명 가운데 가장 하등에 속한 사람을 모아서 불교 전체 사회를 삼았고, 이른바 신도들은 소수의 여인 뿐이고 남자는 봉황의 깃털, 용의 뿔처럼 매우 드뭅니다. 아! 귀머거리들을 모아놓았지만 한 명의 사광師曠15 이뤄내지 못하고 찡그리는 못난이들을 모아 놓았지만 한 명의 서시西施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승려가 적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미 그 수가 많아서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조선의 승려가 수천 명이 그 마음을 수천 가지로 하여 한 가지도 서로 이루지 못하니 많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슬픕니다. 만약 불교인으로 하여금 일찌감치 포교를 하게 했다면 오늘날 승려가 모두 삼천 명 가운데 말류이고 신도가 모두 소수의 여인들 뿐이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결과를 알고 싶거든 어제의 원인이 바로 이것입니다. 미래의 결과를 알고 싶거든 오늘날의 원인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난날은 이미 지나갔으니 동으로 흘러가는 물에 부쳐버립시다. 미래는 따라갈 수 있으니 의당 좋은 원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봄날에 흩날리는 꽃향기는 비록 무정한 것에 속하지만 가을철 연꽃은 실로 주인이 없습니다. 한 번 그때를 잃으면 사마駟馬로도 쫓아갈 수 없으니 부처님 혜명慧命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 이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포교를 그만둘 수 없음이 이처럼 시급합니다.

15 사광師曠 : 사광은 춘추 시대 진 평공晉平公의 악사로,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으며 악성樂聲을 잘 분간했다고 한다. 진晉나라가 제齊나라를 공격하자 제나라 군대가 밤에 도망쳤는데, 이때 사광이 “새들의 소리가 즐거우니, 제나라 군대가 도망쳤을 것이다.〔鳥烏之聲樂 齊師其遁〕”라고 말한 전고가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18년 기사 참조.

16 서시西施 :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녀. 범려范蠡가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그녀를 보내 오나라를 패망케 하였다 한다.


사람이 포교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격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열성熱誠, 둘째는 인내忍耐, 셋째는 자애慈愛입니다.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빠지면 완전한 포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의 포교인을 보지 못했습니까? 날씨가 춥든 덥든 길이 멀든 가깝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 가서 포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어느 곳, 어느 사람이라도 모두 포교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성공하지 못하거든 또 다른 사람에게 포교하고 오늘 성공하지 못하면 또 내일 포교하여 성공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욱더 포교합니다. 이것이 열성이 아니겠습니까? 포교한 다음에는 비록 어떠한 비방과 모욕이라도 혹여라도 맞서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내가 아니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 천한 사람, 교만한 사람, 완고하고 미욱한 사람 등 비록 어떠한 완악한 교화되기 어려운 무리라도 모두 환영하고 어루만지고 타이르니 이것이 자애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포교하고도 포교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이 오늘날 이렇게 융성한 것이 공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님을 나는 알겠습니다.

스페인 사람에 마달가지馬達可期라는 사람이 있어서 전도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한 신도를 얻었고, 길림덕吉林德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미얀마에서 전도한 지 5년 만에 처음으로 한 신도를 얻었고, 또 나리림拿利林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중국에서 전도한 지 7년 만에 처음으로 한 신도를 얻었습니다. 아!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아득히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만약 조선의 승려들이 외국에 전교하러 감에 한 명의 신도도 얻지 못한 몇 개월 만에 실망하고 또 몇 개월 만에 귀국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5년, 7년, 10년이 지나도 처음 마음을 바꾸지 않을 사람을 내가 어찌 구가謳歌하고 몽상夢想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교에 교리가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는 종교도 오히려 입 벌리고 손톱 펴고 그 뜻을 펴고 있거늘 불교처럼 현묘玄妙하고 광대廣大한 종교가 어깨 쳐지고 머리 움츠려져 감히 누구라고 하지도 못하니 누구 탓입니까? 오늘날의 황량함은 그 죄가 이전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고 훗날의 부흥은 그 책임이 오늘날의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세력이란 자유를 보호하는 신장神將이니 세력이 한 번 상실되면 살아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아! 뒤집혀진 둥지 아래에 완전한 알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가죽이 남아 있지 않으면 털을 장차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가 망하였는데 승려 홀로 남아 있겠습니까? 불교가 쇠퇴하였는데 승려 홀로 융성하겠습니까? 불교의 흥망이 실로 승려 흥망의 사전 선고입니다. 그렇다면 승려가 불교를 흥성시키고자 하는 것이 또한 간접적으로 나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무릇 세력과 나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 이외에 분골쇄신17하는 것도 사양하지 않는 자는 오직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까닭이니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둘 다 포교에 있는 것입니다.

포교 방법은 진실로 한 가지가 아닙니다. 혹은 연설로 혹은 신문 잡지로 혹은 경을 번역해서 널리 배포하고 혹은 자선 사업을 합니다. 백방으로 소개하여 하나라도 빠질까 두려워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조선의 불교는 혹여 이런 것이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밖에 따로 도리가 있겠습니까? 듣고 싶습니다.

17 분골쇄신粉骨碎身: 원문은 “마기정방기종磨其頂放其踵”으로 되어 있다. 정수리에서부터 갈아서 발꿈치에 이른다[磨頂放踵]는 말이다. 온몸을 가루로 만든다는 말이니 분골쇄신粉骨碎身이란 뜻이다.

 

사원寺院의 위치位置를 논함

 

나는 일찍이 불교를 확장하는 데 뜻이 있었으되 늘 승려의 사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파급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똑같은 불성을 타고났고 똑같은 육체를 가졌건만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만능인 경우도 있고 남아도는 경우도 하나도 졸렬함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찌 그리도 한결같이 이와 같고 저 같지는 못한 것일까요? 입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교육이 없어서다”라고 하니 대개 그것을 믿을 만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교육이 없는 사람이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그렇겠지만 똑같은 무교육자인데 그 천연의 사고 역량이 아득히 남들보다 못한 것은 또한 기이하지 않습니까? 그 원인은 장소를 택함에 그 도를 얻지 못한 데 있습니다. 『논어』에 이르기를 “가려서 인후한 곳에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18라고 하였습니다.

18 가려서~ : 『논어』 「이인里仁」편의 “마을의 풍속이 인후함이 아름다우니, 가려서 인후한 곳에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라고 한 구절을 전고로 활용하였다.


땅을 가리는 것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아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사는 땅이 이것입니다. 승려가 살고 있는 작은 세상을 사원寺院이라고 합니다. 산수가 수려하고 속세와 영원히 끊어진 곳에 흩어져 있어 안개와 노을을 호흡하고 바람과 달을 마시고 토하며 공기가 신선하고 꿈이 청정하니 참으로 이른바 별천지요 인간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19 아! 수려한 산수가 변화하여 검수도산劒樹刀山 지옥이 되고 안개 노을 바람과 달이 변화하여 삼독오탁三毒五濁20이 되고 이른바 별천지가 그대로 흑산귀굴黑山鬼窟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로부터 지금까지 몇 명의 달인達人과 명사名士가 이 형식적인 별천지이자 정신적 흑산귀굴에 잘못 들어가서 쓸쓸하게 초목과 함께 썩어가서 한 번 가서 다시는 그 소식이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까? 시절에 느낌이 있어 옛날을 회고하면서 능히 슬픔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앞 수레가 뒤집힌 바퀴 자국을 뒤에 따라오는 수레가 마땅히 경계해야 합니다. 독일 철학자 헤겔이 말하기를 “물의 성질은 사람을 통달하게 하고 산의 성질은 사람을 막히게 한다. 물의 형세는 사람을 합하게 하고 산의 형식은 사람을 떠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그렇다면 내가 풍수지리에 관해 비록 배운 바는 없지만 이제 사원의 위치와 사상 사업 간의 길흉 관계를 하나하나 결정해 보겠습니다.

19 이른바 별천지요 인간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원문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다. 이백李白의 <산중답인山中答人>의 시구를 전고로 사용한 것이다. 시 원문은 “나더러 무슨 일로 청산에 사느냐고 묻기에, 웃고 대답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네. 복사꽃 그림자 잠긴 물이 아득히 흘러가니, 새로운 세계가 있어 인간 세상이 아니로세.[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이다.

20 삼독오탁三毒五濁: 탐貪, 진嗔, 치痴를 삼독이라 하고, 나쁜 세상의 다섯 가지 더러움인 겁탁劫濁⋅견탁見濁⋅번뇌탁煩惱濁⋅중생탁衆生濁⋅명탁命濁을 오탁이라고 한다.


(갑) 진보 사상이 없습니다. 진보라는 것은 계속 나아가고 물러남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앞으로 가질 만한 것을 예상하는 것을 희망이라고 합니다. 희망이 발생하는 조건이 매우 복잡하여 헤아리기 곤란하지만 모두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의미라는 것은 동일합니다. 즐거움을 향해 가고 싶은 희망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크고 작고, 장기, 단기 차이가 있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외물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령 한 사람이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태어나면 다만 죽지 않는 것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풍성한 음식21, 비단옷, 큰 집, 네 필 말이 끄는 마차 등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어떤 다른 사물도 내가 죽지 않고자 하는 것보다는 위에 있을 수도 없으므로 부득불 죽지 않겠다는 지점에서 그쳐서 다시는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사람과 사물이 서로 번성하여 끝없이 세상에 가득하니 지혜와 기교가 날로 불어나 정화精華가 급증하여 육근六根에 접촉하는 것이 윗급으로 올라갈 줄만 알고 아랫급으로 내려갈 줄은 모르기 때문에 인간 욕망의 범위가 점점 커져서 그 크기가 바깥이 없고 그 길이는 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욕망이 밖이 없고 끝이 없고 나면 진보 사상도 밖도 없고 끝도 없을 것이니, 이것이 사람과 사물이 서로 피차지간에 계제階梯가 되어 진화하는 방법입니다. 대도시의 진보가 깊은 산골짜기와 비해 비상한 속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승려는 사는 곳이 산이 아니면 큰 일 날 듯이 여겨 보고 듣는 것이라고는 물 흐르고 꽃 피고 새 지저귀고 구름 텅 빈 모습뿐입니다. 내가 그것을 얻고 나면 누가 나의 처소를 다투겠습니까? 이 때문에 자만하여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진보 사상이 위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니 첫 번째입니다.

21 풍성한 음식 : 원문은 “방장지식方丈之食”으로 되어 있다.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밥상에 음식을 한 장이나 늘어놓고 시첩 수백 명이 있는 것은 내가 뜻을 얻더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食前方丈, 侍妾數百人, 我得志, 弗爲也.〕”라고 한 구절에서 전고를 사용하였다.


(을) 모험적冒險的인 사상이 없습니다. 나는 다윈과 나폴레옹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아득하여 한 털끝만 한 땅도 없었습니다. 서로 바라보며 말하면서 하백河伯22이 스스로 크다고 자랑했던 것을 비웃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사나운 바람 불고 거센 비가 내리며 커다랗고 사나운 파도가 몰려와 하늘과 태양을 삼켜버리니, 상앗대 부러지고 키는 잃어 배가 의지할 곳을 잃고 점점 흔들리며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대경실색大驚失色하고 말과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베겟자리 밑에 하늘과 물이 서로 맞닥뜨리어 물고기와의 사이가 겨우 두어 촌 판자뿐이었으니 어찌 두려움이 없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때 나폴레옹은 조용히 가만있으며 조금도 어지러워하지 않았고, 다윈은 마음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였습니다. 나는 당시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한 번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이윽고 바람이 지나가고 물결이 잔잔해지고 하늘이 개고 바다가 고요해졌습니다. 살금살금 일어나 그 까닭을 물어보았습니다. 다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항해하여 지구를 한 바퀴 빙 둘러 일주하여 지금 오 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처음에 내가 당신과 어찌 달랐겠습니까? 풍랑 속에서 만 번 죽을 뻔하다가 한 번 살아나는 경험을 몇 차례 겪은 이후에 크게 놀라거나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물고기가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하기를 수십 차례 겪은 이후에 풍랑이 무슨 물건인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단 풍랑이 무슨 물건인지 모르겠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바다도 무슨 물건인지 모르겠습니다. 비단 바다가 무슨 물건인지 모르겠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배도 무슨 물건인지 모르겠습니다. 비단 배가 무슨 물건인지 모르겠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나도 무슨 물건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가 풍랑을 모르고 바다를 모르고 배를 모르고 나를 모르는 것이 모두 무형의 진화입니다. 아까 생각한 것 또한 진화의 이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2 하백河伯: 본문은 󰡔장자󰡕, 「추수」편의 고사를 활용한 것이다. 하백이 강물이 엄청나게 불어나자 자기가 최고라고 으스대었는데, 바다를 보고는 자신의 왜소함을 깨달은 나머지 북해의 신인 약若을 보고 탄식을 했다.〔望洋向若而歎〕는 구절이 있다.


나폴레옹이 말했습니다. “기이하도다! 나는 항해할 일이 별로 없었으니, 전쟁에 비유하여 말해보겠습니다. 나는 스페인 들판에 처음 싸우러 나갔습니다. 번개처럼 빛나는 칼들과 비오듯이 쏟아지는 총알 사이에 이 몸을 두었습니다. 잠깐 사이에 생사를 걸어 귀신과 털끝 만큼의 차이밖에 없었으니 두려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몸소 백여 번의 전투를 겪고 나니 스스로를 삶과 죽음이 무용한 경지에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천하에 이른바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풍랑이 비록 두려우나 화살과 바위와 비할 때에는 차이가 있으니 내가 다시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비록 이것보다 열 배, 백 배 되는 것이라도 장차 담소하며 물리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자 정신이 삐쭉 솟아 날개도 없는데 날 듯 하였습니다. 내가 한 번 하품하고 기지개 켜고 일어나 공경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두 분이 겪으신 바가 이처럼 기이하고 장한 것입니까? 의당 후인들이 절하며 다투어 이야기할 만하군요.”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천하의 모험사상이 견문과 경력에서 생기는 것이요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고 없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강산과 설악산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여! 험한 개울, 깎아지른 절벽을 촌사람들이 벌벌 떨며 기어가며 감히 경솔하게 가지 못하는 곳을 날듯이 지나가며 조금도 의심이 없는 것이 어찌 모험이라 하겠습니까? 또한 경력이라 할 수도 없을 뿐입니다. 우연히 당한 일은 그렇지 않으니, 비록 노예 취급하고 소와 말 취급한다고 하더라도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파리처럼 애걸복걸하며 감히 한 번 저항하지도 못합니다. 아! 세상일이 또한 험한 개울, 깎아지른 절벽과 같은 부류입니다만 저들은 용감하고 이들은 겁먹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경험해 보고, 경험해 보지 않은 차이일 뿐입니다. 궁벽한 곳에 숨어 살면서 견문과 경력이 없으면, 모험 사상이 소멸되는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양계초가 말하였습니다. “육지에 사는 사람은 땅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얽매임이 생기니, 시험 삼아 한 번 바다를 보고 나면 문득 초연하게 온갖 얽매임 너머를 깨달아 행위와 사상이 모두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바닷가에 오래 산 사람은 능히 그 정신을 날로 용맹하게, 날로 고상하게 하니, 이는 예로부터 바닷가 백성들이 육지 거주 백성들보다 활기가 더 승하고 진취성이 더 예리한 까닭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다만 육지 거주자의 사상이 바닷가 거주자의 사상보다 못한 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아주 궁벽지고 아주 깊은 곳이어서 하늘의 태양 외에는 다시 볼 것이 없는 사원은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모험 사상이 위치와 관련있다는 것이니, 두 번째입니다.

(병), 구세救世 사상이 없습니다. 석가, 공자, 예수, 묵자는 모두 이 세상을 구제하는 데 지극하신 분들입니다. 여러 사람들과 섞여 살았고, 혼자 살지 않았습니다. 소부, 허유, 상산사호商山四皓23⋅엄자릉嚴子陵24은 모두 지극히 염세적인 사람입니다. 산에서 살고 저잣거리에 살지 않았습니다. 혼자 산다는 것은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미워하는 바입니다. 산이라고 하는 것은 염세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그러했습니다.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분들이 여러 사람들과 섞여 살고 혼자 살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 실정의 좋고 나쁨을 두루 살펴 그 폐단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염세주의자가 산에 살고 저잣거리에 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속세의 고락苦樂을 외면하여 그 정을 막고자 함입니다.

23 상산사호商山四皓: 진秦나라 말기에 폭정暴政을 피해 상산商山에 숨어 살았던 네 명의 노인. 한 고조漢高祖가 태자를 폐위廢位하고, 척부인戚夫人 소생인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태자로 세우려 하다가, 장량張良이 계책을 내어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불러들여 태자를 시위侍衛하게 하자, 고조가 뜻을 바꾸었다.

24 엄자릉嚴子陵: 자릉子陵은 동한東漢의 은자隱者인 엄광嚴光의 자字이다. 엄광은 한나라 광무제光武帝와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였다. 친구가 황제가 된 뒤에는 오히려 자취를 숨겨 은자로 지냈다.

무릇 갓난아이가 기어서 우물로 가려고 함에 그 아이 부모와의 친소 관계, 은원 관계를 가리지 않고 모두 가서 건져냅니다. 그 건져내려고 시작할 적에 건져내고 안 건지고 하는 것의 득실을 다 알고 나서 건져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경우를 대함에 마침내 마음에 그만둘 수 없는 마음이 일어 건져낼 줄 모르면서도 스스로 건져내는 것입니다. 형수가 물에 빠짐에 모두들 그녀를 끌어내니 처음에 형수를 끌어낼 적에 예를 지켜 끌어내지 않는 것과 끌어내는 것 사이의 경중을 다 알고서 끌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경우를 대함에 마침내 마음에 그만둘 수 없는 마음이 일어 끌어당기는 줄도 모르고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무릇 마음은 경우에서 생겨나고 일은 마음에서 생겨나니, 비록 무심한 마음이 되고자 하나 경우를 대하면 어찌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행동하지 않으려고 하나 마음이 있으면 어찌 행동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군자가 땅을 선택함을 급선무로 삼은 이유입니다. 땅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 길흉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경우를 가리는 것일 뿐입니다. 옛날 은자들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까닭이 때를 기다려 절개를 보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실로 염세주의자들이 그 경우를 가린 것 뿐인데 그 명성을 아름답게 여겨 때를 기다려 절개를 보전했다고 하니, 다만 영웅이 사람을 속였을 뿐입니다. 만약 숨으려고 했다면 저잣거리에 숨는 것이면 충분할 텐데, 어찌 반드시 은거한 이후에야 비로소 숨어 사는 것이 되겠습니까? 사원의 위치가 모두 염세에 접합하고 구세에는 부적합합니다. 그 지경이 이미 세상을 싫어하는 것인데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생겨나겠습니까? 염세주의적인 마음이 한 마디 전진하면 불교의 취지가 한 자 후퇴하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구세사상이 위치와 관련 있다는 것이니, 세 번째입니다.

(정) 경쟁하는 사상이 없습니다. 승려는 원래 세상 너머의 세상과 인류 너머의 인류를 스스로 구성하여 여타 사회와 확연히 구분되는 세계를 이루어 왔고 이해득실에 있어서 서로 상관이 없어 마침내 독신인 사람〔獨夫〕이 되었습니다. 세상 너머의 세상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사원이 이것입니다. 인류 너머의 인류는 무엇입니까? 세상일을 불문하고 자기 자신만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전의 정치와 풍속이 매우 심하게 압박하여 그러지 않으려 해도 부득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점이 있으니, 전적으로 승려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만약 승려들을 도회지에서 섞여 살면서 사람들과 점점 소통하고 교섭하게 한다면 그 압박의 굴레가 점점 풀어져서 경쟁력이 오히려 지금처럼 죽어서 재가 되어서는 다시는 불타오르지 못할 기세보다는 나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산속 깊고 으슥한 골짜기에 살면 천지가 무너져도 알 바 아닙니다. 종교가 서로 대척하는 북소리 나팔 소리가 대지大地를 진동하는데 불교는 비록 종을 울린다고 하더라도 수습하기에 부족합니다. 종교의 진지에 깃발이 수풀 같은데 불교는 비록 항복 깃발이라도 세우기에 부족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저 종교의 경쟁이 비록 극렬하나, 일단 우리 강토를 침범하지 않은 까닭에 그 승패와 유리, 불리함이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고 하며 무릇 저들이 거둔 승패와 유리, 불리함의 영향이 하나하나 우리 종교에 떨어짐을 절대로 알지 못합니다. 지금 여기 두 사물이 있습니다. 하나가 이기면 다른 하나가 진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가 융성하면 우리 종교는 쇠퇴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만 지금 저들 종교의 병기가 우선 내게 피를 흘리게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 칼날이 무관하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성문에 불이 난 것을 보고, 우선 연못을 태우지 않았으니 물고기에게는 재앙이 없겠구나라고 여기는 것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 헤아릴 줄 모른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무릇 의사意思는 행위의 요소이니 의사를 조성하는 원인은 또한 요소 가운데 요소가 아니겠습니까? 경쟁 사상이 없는 죄를 다스리자면 먼저 이른바 소천지小天地라고 하는 절을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혈기를 만들어내는 원인은 또한 원천 가운데 원천 아니겠습니까? 경쟁 사상이 없는 병을 다스리자면 먼저 이른바 소천지라고 하는 절을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경쟁 사상이 위치에 관련 있다는 것이니, 네 번째입니다.

이것은 절의 위치가 사상에 관련된다는 놀랍고도 괴이한 일입니다. 그 나머지로 일 처리에 불리한 점도 많습니다. 교육에 불리하고 포교에 불리하고 교섭에 불리하고 통신에 불리하고, 단체에 불리하고 재정에 불리합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할 필요 없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니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사상에 관련한 것이 넷이고, 사업에 관련한 것이 여섯입니다. 네 가지 사상에 관련한 것, 여섯 가지 사업에 관련한 것은 비록 그러하나 오늘날 그 모자람을 견딜 수 없거늘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열 가지가 모두 없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무릇 초탈하게, 아득하게 홀로 산속으로 가서 여러 생각을 끊어버리고 구름을 쓸고 샘물을 떠 마시며 꽃을 보면서 성품을 기르는 것을 나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겁회劫恢25가 바뀌기를 잘하여 이루어지고 파괴됨이 일정치 않은 터라, 상전벽해로 하루아침에 처지가 바뀌면 어부가 산꼭대기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목동이 개울가에서 실의할 것이니, 그때 우리들은 응당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습니까? 죽음을 구하는 것 외에 다시 계책이 없습니다. 오직 이것을 두려워하니 감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다만 어찌해야 오늘날의 제멋대로하는 타성을 희생해서 미래 불교의 융성을 보장하겠습니까? 사나운 물결26이 곤두서고 나면 힘이 있어도 돌이키기 어려운 법입니다. 『논어』에 “새가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날아오른다”27라고 했습니다.

25 겁회劫恢: 세상이 파멸할 때 일어난다고 하는 큰불의 재를 말한다.

26 사나운 물결 : 원문은 “광란狂瀾이 기도旣倒하면 유력난회有力難回라”이다.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 전고를 활용한 것이다. 「진학해」에서는 “온갖 냇물을 막아서 동으로 흐르게 하여, 이미 거꾸로 흐르는 데서 거센 물결을 끌어 돌렸다.〔障百川而東之 回狂瀾於旣倒”라고 하였다.

27 꿩이 사람을 보고 : 원문은 “색사거의色斯舉矣”이다. 󰡔논어󰡕 「향당편鄕黨篇」의 전고를 활용하였다. “새가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날아올라 빙빙 돌며 살펴보고 나서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

그렇다면 사원의 위치를 개량할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산속에 있는 전체 사원 가운데 기념할 만한 것만 다만 몇몇 곳에 보존하고, 그 나머지는 모조리 철거하고 각 군, 각 항구의 도회지에 새로 사원을 건립하는 것, 이것이 상책上策입니다. 그 크고 아름다운 것을 보존하고 그 작은 것과 큰 것 가운데 황폐해진 것을 철가하여 대도회지에 이건하는 것, 이것이 중책中策입니다. 다만 그 암자만 폐지하여 원찰에 합하고, 한 도 또는 몇 군의 사원이 요충지에 출장소를 함께 설치하여 포교와 교육 등의 일을 처리하는 것, 이것이 하책下策입니다. 그 나머지는 계책이 아닙니다.

이 셋 중에 과연 어떤 계책을 내야겠습니까? 상책은 백성들의 지혜 정도가 짐짓 문약文弱하므로 결단코 오늘날 실행할 수 없습니다. 중책은 그 적합한 사람을 얻으면 행하고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행하지 못합니다. 하책은 거의 행할 수 있겠습니다만, 전부 일치하려면 부득불 또한 보통 이상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만 할 수 있을 것이니 승려 가운데 이러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면 내가 어째서 보지 못했을까요? 없다면 불교가 어찌 그 없음을 참고 있단 말입니까? 내가 예언하고 단언합니다. “청년과 어린아이들이 장차 영웅이 되고 장차 호걸이 되어 선후로 그 발자취를 이어 사원을 텅비게 하지 않을 것임을 의심 없이 단언하겠습니다만 만약 사십 세 이상의 인물이 보통 이상의 지위에 스스로 거함을 나는 기꺼이 인정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나를 믿지 못하거든 사람마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비록 하책일지라도 또한 불가결의 운명에 있으니 아! 안타깝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영웅에 종자가 있는 것이 아니요, 성공과 실패는 떠다니고 있으니 세상일은 결단코 우리가 미리 헤아려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정진하여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고 패러디는 자기磁氣를 완성하였습니다. 행하지 아니하면 하나도 이룰 수 있는 일이 없고, 행하면 하나도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나는 승려 전체가 한 명도 영웅호걸이 아님이 없다면, 이른바 상책을 오늘날에 행하고도 남을 듯합니다.

 

 

불가佛家에서 숭배崇拜하는 소상塑像과 회화繪畵를 논함

 

조선 불가에서 소상과 회화를 숭배함이 매우 많아 백가보다 많습니다. 의론하는 자들은 소상과 회화는 미신에서 나온 가상假相이니 모두 다 횃불로 불살라버리고 사원을 깨끗이 확 트여 암흑시대의 미신을 일거에 혁신하고 진리를 배양하여 불교의 새 나라를 다시 세우자고 하니 이 말이 시원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사람의 지식이 어둑하고 열등하여 미혹함을 개명시키고 새로운 지식을 맞이하기에 부족하다는 점을 병통으로 여겨서 큰 칼이나 넓은 도끼로 한번 내려쳐 즉시 열어젖히려고 하는 까닭에 말이 일사천리一瀉千里의 기세가 있어 두리번거리거나 거리끼는 바가 없고 기꺼이 정을 남겨 두지 않으려 하니 장쾌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적당함을 지나칠까 두렵습니다. 한 마디 말로 의견을 재단하여 지혜로운 자의 판단을 기다립니다.

무릇 사물이란 것은 진리의 가상假相이고 소상과 회화는 사물의 가상입니다. 진리로부터 본다면 소상과 회화가 이미 가상 중의 가상입니다만 이것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이것은 어떤 연유일까요? 대저 사람 마음이 본디 고요하여 경우에 대응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진실로 지극히 지혜로운 자나 지극히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경우에 대응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을 보면 슬퍼하고 살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뻐하며 어진 사람을 보면 그와 나란해지기를 생각하고 악을 보면 징계하고 선을 면려하고자 하니, 이것은 경우에 대응하여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바에 행동 역시 따라갑니다.

옛사람이 여기에서 형상을 취하여 사람 마음이 삿되고 편벽된 것이 바른 데로 나아가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며 각종 예의禮義의 가상을 만들어 경우를 만들어 두었으니, 소상과 회화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인聖人과 군자君子의 가상을 당에 설치해 두고 혈식血食28케 함으로써 그것을 보면서 성인을 존중하고 현인을 본받고자 하는 경우로 삼았고, 충신忠臣과 의사義士의 가상을 기린각麒麟閣29에 설치해 두고 제향을 올리며 그것을 보면서 공덕과 절의를 숭상하는 경우로 삼았고, 효자孝子와 열부烈婦의 가상을 정려각에 게시해 두고 포상하고 드날려 그것을 보며 선을 표창하고 선행을 면려하는 경우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전인을 존모하는 의誼를 표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후인을 권면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를 징계하여 백을 면려하고, 하나를 상을 주어 만을 권면함은 법률의 도덕입니다. 가상 하나의 경우를 설치하여 중생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소상과 회화가 발생한 연유입니다. 그러므로 소상과 회화는 중생의 경우입니다.

28 혈식血食 : 혈血은 제사祭祀에 바치는 생牲을 뜻한다. 혈식을 한다는 것은 국가에서 거행하는 제사를 지칭한다.

29 기린각麒麟閣: 한 선제漢宣帝가 공신 11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걸어 놓게 한 공신각의 이름이다.


아! 세상에 이상을 말하는 이들이 누군들 소상과 회화가 허망하고 무익하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심한 사람은 비단 무익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의지를 미혹시키고 어지럽힌다고 하여 냉소하고 조롱하고 심히 꾸짖으며 배척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아마도 또한 그럴 것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이렇게 애매한 가상이 사람의 도덕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불가사의한 공효가 있음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내가 경험한 것으로 한번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일찍이 공자 사당에 들어갔었습니다. 한 엄숙한 석상이 당 안에 똑바로 서 있었는데, 그 마른 입술, 드러난 치아, 열 아름 되는 허리를 보고서는 문득 공자께서 위로는 요임금, 순임금, 주 문왕, 주 무왕의 법을 서술하고, 아래로는 만세의 공을 드리웠다는 점을 생각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각별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또 관왕묘關王廟에 들어가서 그 대춧빛 얼굴과 아름다운 수염, 당당한 아홉 척 장신을 보고 문득 그가 촛불을 들고 밤을 밝히던 의義30와 안량과 문추를 벤 신信을 생각함에, 기상이 늠름하여 한 번 초월하여 내달릴 듯하였습니다.

30 촛불을 들고 밤을 밝히던 의義: 관우가 일찍이 하비下邳를 지키고 있다가 조조曹操에게 패하여 유비劉備의 아내인 감 부인甘夫人, 미 부인糜夫人과 조조에게 항복하였는데, 조조는 이들을 한방에 거처하게 하여 군신 간의 예의를 어지럽히려 하였으나 관우가 방 안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촛불을 잡고 날이 새도록 지키고 있었다.


무릇 공자의 사적事蹟은 대개 『주역』, 『춘추』, 『논어』에 보이고, 관공關公의 행적은 역사歷史와 야승野乘에 뒤섞여 나옵니다. 예전에 글을 읽다가 공자와 관공의 사적에 이를 때마다 경의를 표하고 예배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내 마음을 잘 움직였는가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담담하고 느슨했음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허망하기 짝이 없는 한 덩어리 흙과 돌에 감동받은 것이 이처럼 친절하고도 절박하였습니다.

회화와 소상이 똑같이 가상으로 된 경우인데도 그 마음을 감동시키는 차이가 현격하게 다른 것은 어째서일까요? 경우에 직접, 간접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마음도 직접적으로 감동하고 간접적으로 감동하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간접적인 경우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글이 이것입니다. 직접적인 경우란 무엇입니까? 소상이 이것입니다. 글은 사람의 말과 사건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간접인 것이고 소상은 바로 그 사람을 그대로 나타내기 때문에 직접인 것입니다. 간접과 직접의 구별이 비록 내 마음의 가정입니다만 그러나 본 경우가 스스로 같지 않으면 정해지는 마음이 또한 부득불 같지 않고 받게 되는 감정이 또한 부득불 서로 다릅니다. 소상과 회화의 공효를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기이한 능력과 행적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구리나 석재로 그의 상을 만드는데, 모두 이런 부류입니다. 만약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하나 매우 지혜롭거나 혹은 매우 어리석거나 하면 그만입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소상과 회화의 자취가 지구상에서 끊어지지 않을 것임을 의심 없이 단언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후세 백성들의 지혜가 미개하여 자기가 받들 귀신이 아닌데도 소상과 회화를 만들어 제멋대로 받들며 아첨하는 제사를 지내며 화를 면하고 복을 받을 것을 빌며 망령되이 길흉吉凶을 묻고 있습니다. 이에 폐단 또한 불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상과 회화는 가려서 해야지 잡스럽게 하면 안 되고 간량해야지 번잡하게 하면 안 됩니다. 조선 불가에서 숭봉하는 것은 어찌 그리도 가림 없고 지극히 번잡스럽단 말입니까? 감히 제 생각으로 그 가부를 대략 변별하고자 합니다.

(1) 나한독성羅漢獨聖31은 소승小乘의 국한된 소견으로 적멸寂滅에 탐닉하여 작은 과보果報를 얻어 스스로 만족하고 번뇌煩惱 속에 들어가 기꺼이 중생을 제도하려고 하지 않아 부처님께 꾸지람을 들은 바 있습니다. 󰡔원각경󰡕에 말하기를 “백천만 아라한阿羅漢, 벽지불辟支佛이 과보를 성취하는 것이 어떤 사람이 이 원각무애법문圓覺無碍法門을 듣고 한 찰나의 사이에 수순隨順하여 수행하고 익히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독각獨覺을 수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부처가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자면 나한독성은 우리 부처님의 죄인罪人이요, 승가의 외도外道입니다. 무릇 부처님이 혹 지옥에 들기도 하시고 혹 축생에 들기도 하시어 각종 고난을 입어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번 말하고 한 번 침묵하고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가만히 있는 것이 모두 다 타인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어찌하여 저 소승은 이 마음을 본받지 못하고 작은 것으로 스스로 즐거워하며 타인을 제도하고자 하지 않습니까? 비단 우리 부처님께 꾸지람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 문명 세계 사회주의에도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불도를 추구하는 자는 그것을 소원하게 여기는 것은 괜찮으나 그것을 친근하게 여겨서는 안 되고, 그것을 배척하는 것은 괜찮으나 그것을 숭봉하는 것은 안 됩니다.

(2) 칠성七聖은 더욱 계고할 만한 근거도 없는 웃기는 것입니다. 별을 소상으로 만들 수 있다면 하늘의 별이 매우 많으니 어찌 다만 칠성만 소상으로 만듭니까. 그것이 여래如來의 나투심이라면 하늘과 땅, 해와 달,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똑같이 부처님과 한 몸일 텐데 어찌 반드시 칠성이어야 하겠습니까? 불도가 되어서 여래의 진상眞相을 받들면 충분합니다. 멀리 나투신 바32까지 미친다면 너무 번잡하지 않겠습니까?

(3) 시왕十王은 염라국閻羅國 시왕대왕이라고 들었습니다. 사람의 생사를 뜻대로 정할 수 있고 사람의 죄업罪業을 심판하여 그 경중에 따라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니, 요약하여 말하자면 죽은 사람의 재판관裁判官입니다. 범범하게 살펴보면 이들만큼 두려운 것도 없겠으나, 깊게 살펴보면, 이것만큼 두렵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재판관은 비록 죄인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해 두었지만, 실제로는 착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죄가 없으면 반드시 보호를 받습니다. 또 재판관은 법률에 깊이 통달하여 자세하게 심사합니다. 그렇다면 법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필시 요행스레 죄를 면하거나, 억울하게 죄에 걸리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무슨 두려워할 것 있겠습니까? 또 불도佛道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극락에 갑니다. 극락이 본디 염라국의 부용국附庸國이 아닐 터인데 무슨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깨끗한 업을 닦지 않아 지옥에 떨어진다면 살고 죽는 것이 절로 해당하는 법률이 있을 것이니 아첨한다고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아첨해서 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온 세계에서 나날이 죽는 사람의 수가 반드시 적지 않고 많을 텐데 이 모든 것을 판결하는 염라대왕이 진실로 사바세계婆娑世界에 나와서 중생의 기도 여부를 살펴서 부탁을 받아들일 틈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하루 만 배를 한다고 하더라도 끝내 어찌 속죄할 수 있겠습니까? 황금과 옥으로 소상을 만들고 단청으로 그림을 그려놓고 오체투지五體投地33하며 공경스럽게 받들고 있으니 과연 무엇하는 짓입니까?

(4) 신중神衆은 부처님이 영산靈山에 있을 때 그를 호위하며 늘 따르던 대중입니다. 불법을 보호하는 것이 실로 그들의 임무입니다. 그들을 권면한다고 더 부지런하게 할 수 없고, 그들을 금지한다고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와 동작은 오직 부처님 말씀만 듣기에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점에 또 무슨 의아해할 것이 있겠습니까? 불佛, 법法 승僧은 그 궤를 같이 하니 저가 이미 불법을 보호하니 어찌 승려를 보호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승려를 보호하지 않으면 부처님이 반드시 그들을 꾸짖으며 “승려는 나의 법을 행하고, 나의 가르침을 이루는 자이니라. 너는 어찌 보호하지 않는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냉대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러하다면 비유하건대 승려가 상관上官과 유사하고 신중은 그들을 보호하는 순사巡查와 유사합니다. 지금 여기 한 명의 상관이 있는데, 보호하는 순사에게 손을 모으고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동정을 구걸하면 약자에게 어리숙해하는 모습을 비웃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찌 이것은 알면서 또한 스스로의 처지는 알지 못합니까? 지금 오히려 뒤질세라 몸을 굽혀 신중에게 복을 청하니 나는 그 본말이 전도된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한漢나라 사람 가의賈誼가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발이 도리어 위에 있고, 머리가 아래에 있다. 그 거꾸로 됨이 이와 같은데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34

31 독성獨聖: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도 한다. 독성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독성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형태로 독성각을 절에 두고 있다.

32 나투신 바 : 원문은 화현化現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현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33 오체투지五體投地: 두 무릎과 두 팔과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불교 예법의 하나이다.

34 발이 도리어: 원문은 “족반거상足反居上이요 수고거하手顧居下라”라고 되어 있다. 󰡔한서󰡕 「가의전賈誼傳」의 고사를 활용한 것이다.


아! 천왕天王, 조왕竈王, 산신山神, 국사局師 등은 허황하고 비루하여 애당초 말할 가치도 없기에 지금 일일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모두 오늘날 불가에서 숭봉하는 소상과 회화 가운데 가장 애매하고 얼토당토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 저간 조선 불교계의 지식이 과연 이와 같이 애매하고 비루했단 말입니까? 벗어날 수 없는 오늘날의 우승열패優勝劣敗의 공례公例가 진실로 하루 사이에 유래된 것이 아님을 비로소 알겠습니다. 화와 복이 따로 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 초래한 것입니다만 내 몸에 충만한 자유를 희생시키고 완악하고 허황되고 신령하지도 않은 신중 아래에서 종처럼 무릎 꿇고 비참한 낯빛을 하고 있으니 소상과 회화의 폐단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했습니다. 누가 이 세상 가득한 이러한 소항을 한 횃불로 날려 버리고 만 개의 파도로 침몰시켜 다시는 세상에 남겨 두지 않으며, 우리 부처님의 진리를 완전무결하게 돌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두고 논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신적 요소를 다 제거하면 종교로서의 성질이 시들게 됩니다. 당신은 불교가 철학이 되기를 바랍니까?”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어찌 그리도 속됩니까?” 종교가 미신이다 운운한 것은 바로 오직 하나의 미신이요 여러 잡다한 미신은 아닙니다. 설사 종교를 미신이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을 미신하면 충분하지 어찌 아침에 부처를 미신하고 저녁에 나한羅漢을 미신하며, 또 칠성을 미신하고, 또 시왕을 미신하며 또 신중을 미신하고 또 천왕, 조왕, 산신, 국사 등을 미신하여 정해진 믿음이 없단 말입니까? 이것은 도깨비가 낮에 나와서 갈 곳을 몰라 산에 갔다가 물에 갔다가 나무에 갔다가 바위에 갔다가 하며 그 피로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동일한 양상입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또한 미신의 적입니다. 이미 지혜로운 신앙이 아니고 또 미신도 아니면 과연 어떤 신앙에 속한단 말입니까? 이름 붙일 만한 것이 없으니, ‘난신亂信’이라고 명명하겠습니다. 난신이란 신앙 없는 신앙이라 한번 빠져들면 낭패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를 지목하여 미신이라고들 하는데, 이것은 미신의 많음이 조선 불교만큼 많은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미신이 종교의 특성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미신이 많아질수록 종교가 더욱 흥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 불교가 이처럼 많은 미신이 있는데, 여전히 세계에 널리 퍼지지 못하고 거의 산 깊고 물 궁벽진 곳에서 그 잔약한 숨을 거의 보전하지 못하여 거의 하루도 마치지 못할 형세에 급급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로 미루어 볼 때 조선의 승려는 비록 미신이라 할지라도 그것마저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 불교는 미신을 아득히 벗어나 그 이치가 심히 실로 고상하거든 어찌 난신의 무리들이 가히 쳐다보기라도 볼 수 있겠습니까? 난신의 도구를 의당 먼저 개혁해야 하겠습니다. 아! 독사毒蛇가 손을 물면 장사는 팔을 자릅니다. 하물며 그 독이 뱀보다 더하고 그 끊어냄이 팔을 끊는 것보다 쉬운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찌 그리 꺼리며 변혁하지 않습니까?

난신의 도구는 그렇다고 하고, 부처와 보살菩薩의 소상과 회화는 모두 남겨 둘 수 있겠습니까? 부처 보살의 상은 모두 남겨 두어도 무방하겠습니다만, 이것 역시 매우 번잡합니다. 또한 부처와 보살은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이치는 하나이니, 하나를 들어 모든 것을 통합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만약 하나를 들어 모든 것을 통합하게 한다면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일 것입니다. 무릇 석가모니 부처님은 위로는 여러 부처님을 계승하시고, 아래로는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중생을 위하사 지옥에 들기를 객점에 드나들 듯하시고 후세를 불쌍히 여기사 설법을 부연하시기를 구름과 비처럼 하시니 실로 천불千佛의 대표이고 만세의 도사導師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마땅히 금, 은, 유리, 차거硨磲, 마노瑪瑙 등으로 형상을 만들고 기념하고 예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떤 절을 막론하고 다만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봉안하고 지극히 공경하여 혹여라도 모독하지 말 것입니다. 그 얼굴을 우러러보며 그 사적을 생각하고 그 마음을 느끼며 그 행적을 시행해야 합니다. 무릇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록 가상이라 할지라도 진리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또 별다른 장소에 큰 기념관을 별도로 설치하고 부처, 보살로부터 불교계에 기이한 사적, 신이한 소문이 있는 경우,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람인지를 막론하고 모두 그 위패를 모셔 기념관 안에 진열하고, 보호하며 제향을 오려 현자를 추모하고 후대의 성스러운 거조擧措를 권면함이 일의 체면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복을 기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가佛家의 각종各種 의식儀式을 논함

 

조선 승가僧家의 백 가지 법도가 신통치 않아서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재齋 공양供養의 의식 (범패 사물, 작법 참회 등 기타)와 제사 예절 등의 일(대령對靈⋅시식施食 등 기타)에 관해서는 심히 번잡하고 어지러워 질서가 없고 빼어난 것과 졸렬한 것이 뒤섞여 기강이 없습니다. 종합하여 이름 붙이자면 도깨비의 연극이라고 하면 거의 가까울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기에는 부끄럽고 족히 변론할 것이 못됩니다. 그 평상시 예식(사시공불⋅조석배불⋅염송⋅송주誦呪 및 기타)도 혼란스러워 참된 모습을 잃었으니, 크고 작은 어떤 예식을 막론하고 일체 싹 쓸어버리고 한 간소한 예를 세워 행하면 충분하겠습니다.

간소한 예식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각 사원에서 예불禮佛을 매일 한 차례 하되, 집회 때가 되면 집례執禮가 운집종雲集鐘35을 타종합니다. 다섯 번 타종하면36 승려 및 신도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불당佛堂37에 나란히 나아가 향을 사르고 삼정례三頂禮38를 행한 다음에 찬불가를 한 번 제창하고39 물러나면 그만일 뿐입니다.

35 【원주】 예불의 신호

36 【원주】 구본에 의거함

37 【원주】 석가모니 부처님 상을 봉안한 곳

38 삼정례三頂禮: 홋소리 또는 짓소리로 부르는 범패.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것은 명을 좇겠습니다만 예불을 하루에 한 차례 하되 다만 삼정례만 행하고 사시공불巳時供佛을 폐한다면 너무 간략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예가 번거로우면 혼란스러워지니, 혼란스러우면 공경하지 않게 되고 공경하지 않게 되면 예의 본의가 사라집니다.” 예는 오직 그 근본에 힘쓰기 때문에 상례에는 슬픔을 주로 하고 제례에는 공경을 주로 하여 구구한 작은 절차는 들고 나는 것은 괜찮습니다. 번거롭게 하면서 공경하지 않는 것보다는 간소하면서 공경한 것이 더 낫고 친압親狎하다가 엄숙하지 않은 것보다는 소원하지만 공경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지존至尊의 상像은 공경하고 엄숙히 대해야 하고 친압하고 설만褻慢하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루 한 번 예불을 드리는 것이 반드시 간소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불상을 늘상 대하고 있으니 평상시 기거할 때나 밥 먹고 담소할 때에도 불상과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형세상 부득불 익숙하고 친하게 여겨 설만하게 여기며 이르지 못하는 지경이 없는 데에까지 이르렀는데, 정말로 친압하고 너무 가깝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예배하는 기간을 조금 띄워 그 갈망하고 우러르는 마음이 생긴 연후에 그에 따라 예불을 올리면 그 마음이 완전하고 그 공경함이 돈독하게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하다면 하루 한 번 예불 드리는 것이 오히려 번거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그 기간을 너무 멀게 하면 게으르고 태만하여 잊어버리는 지경에 쉬 이르게 될 것이고, 각성하기 어려워질 것이므로 우선 잠정적으로 정해둡니다. 삼정례를 하는 것은 실로 전보다 줄인 것이 없습니다. 지금 예참禮懺40하는 것이 어떤 경우는 이삼십배二三十拜하거나 어떤 경우는 팔구십배八九十拜를 합니다만 그 실제로는 모두 합쳐 수십백천數十百千 또는 무량수無量數의 여러 부처, 보살과 법法, 승僧을 모두 합쳐 놓고 한 번 절하는 것입니다. 삼보三寶41의 수가 매우 많기 때문에 절하는 수가 또한 많습니다.42

40 예참禮懺: 불보살에게 예배하거나 경전을 독송하는 등의 의식을 통하여 과거에 지은 죄를 참회하는 불교 의례이다.

41 삼보三寶: 불자가 귀의해야 한다는 불보·법보·승보의 3가지를 가리키는 불교 교리이다.

42 【원주】 예참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예불의 별호이다. 부처님께 절할 때에 먼저 불, 법, 승 삼보의 명호를 외친 연후에 절을 하니, 매번 이와 같이 절을 하여 많은 경우에는 8, 90배를 한다.


아! 무시無始 이래 불, 법, 승 삼보가 그 수효가 끝이 없기에 진실로 중생의 몸으로 능히 다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는 이십, 삼십 배 하고 어떤 경우는 팔십, 구십 배하고 그친다면 또한 너무 간소하지 않습니까? 지금 세존 한 분께 삼배三拜를 드리는 것이 전에 비하면 실로 많고도 많습니다. 삼이라는 숫자는 간소하고 번잡한 것의 중간이므로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 공양供養은 법 공양이 귀한 것이요, 밥 공양은 귀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반공을 올린다면 족히 부처님을 모독하기에 충분할 뿐입니다. 그것을 폐하는 것에 어찌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다만 특별한 때43에는 진귀하고 정결한 물건을 공양하여 중생의 작은 정성을 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있습니다.

43 【원주】 석가탄신일, 성도제일, 열반일, 세시천식歲時薦食 등

어떤 사람이 또 묻습니다. “재공양齋供養과 제사 등의 일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재공양과 제사는 모두 복을 비는 일입니다. 복은 빌어서 얻을 수 없고, 또 부처님도 화와 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복을 빈다고 해도 복을 얻는데 보탬이 없습니다. 제사라는 것은 조부나 부친의 은의恩義가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자손이 된 자가 그 선조를 추모하고 시절에 감개하는 느낌을 어쩌지 못하여 제수를 바치고 예를 올리는 사이에 그 정성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세世가 지나면 제사 지내는 친족 관계가 다해 복을 입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습니다. 그 은의가 얕고 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장삼이사張三李四44로 조금도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이 승려에게 무슨 은의가 있어서 해마다 제사를 지냄에 게으름 피울 줄 모른답니까? 불교는 타인을 제도하는 것을 주로 삼기 때문에 승려의 자비가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도록 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찌하여 천하 사람들을 하나하나 제사 지내주지 아니하고 다만 재물을 납부한 사람들만 제사를 지내줍니까? 또 제사를 지내면 정토에 갈 수 있다고 하면 한 번 제사를 지내면 충분할 것입니다. 제사 지내도 정토에 갈 수 없다면 만 번 제사를 지낸다고 해도 보탬이 없을 것인데 대대로 제사를 거스르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그 남은 밥과 국을 차지할 계획 때문일 뿐입니다. 비록 신을 삼고 자리를 짠들 밥 한 그릇, 국 한 사발을 어찌 얻지 못할까마는 이를 얻지 못할까 걱정하며 이렇게 사람의 도리가 아닌 일에 아첨해서 고개를 숙이고도 괴이해 함이 없으니 매우 슬픕니다. 재공양과 제사의 의미가 이과 같으니 폐지해도 괜찮습니다.”

44 장삼이사張三李四: 신분이 뚜렷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또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부처님을 받들지 말고 승려는 제사를 지내지 말자는 것입니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숭봉하지 않고 아울러 조상님, 스승님의 제사도 폐지하라고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복을 기원하고 망령되게 제사지내는 일을 폐지하려는 것뿐입니다. 이 일이 비록 작은 일 같지만 실로 큰 일이니 매우 속히 개선해야 합니다. 지금 재공양 절차와 제사 예식을 말함에 번잡함을 제거하여 간소함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사람은 있습니다만 재공양과 제사를 아울러 폐지하자고 운운하는 사람은 천하에 외쳐 보아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습니다. 대개 관습에 안주하여 그 근본을 궁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 말단만 궁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안을 논의하는 사람은 올바른 안목으로 먼저 습관과 이해 너머에 사안을 두고서 그것을 살펴본 연후에 이치에 따라 점검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묻습니다. “재공양과 제사를 폐지하면 사원의 재정이 장차 고갈되어서 승려의 생활이 날로 위축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가 과연 보전되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아! 당신은 사리를 헤아릴 줄 모르는군요. 천하의 종교가 매우 많은데, 어느 한 종교도 불교보다 부유하고 융성하지 않은 종교가 없습니다. 과연 그들도 재공양과 제사를 지내며 이 경지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재공양과 제사를 지내고 남은 찌꺼기로 기꺼이 절간을 보전하고 생명을 살린다는 큰 계책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조선 불교가 천하의 여타 종교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당신은 실로 동으로 간다면서 서쪽으로 향하는 사람이니 어찌 머리를 돌려 방향을 틀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까?”

 



역자의 말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을 요즘 말로 다시 번역했습니다. 번역 과정에서 여러 선학의 연구와 번역의 성과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문 원문은 1913년 회동서관 판본을 기준으로 교감을 하였습니다. 만해는 낙후된 불교의 쇄신을 위해 이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그가 근대의 길목에서 불교의 문제를 논하였기에, 불교의 쇄신이 민족의 운명과 긴밀한 연관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질정을 바라며 부족한 번역본 을 공개합니다. 원문은 설악불교문학관 아카이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http://www.manhaemusan.org/archive/a1/book-index/b14)


국민대학교 교수(조교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조시대 정치적 글쓰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저술로 《정조의 문치》, 《정조의 신하들》이 있다. 전통 시대 문학과 정치라는 주제로 정조 연간 한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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