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픔으로 눕고 나란히 흐르다
김사인
김사인 선생님을 맞기 위해 대전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몇 해 전부터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예술가의 집에서 지내신다. 고향인 보은과 학창 시절을 보낸 대전을 둘러보기 위해 접선지로 서대전역을 지목하셨다. 전주에서 올라오는 ITX가 서대전역을 정차하기에 정해진 접선지였다. 8월 말이었지만 무더웠다. 오늘 답사 여정도 더위 때문에 고생 좀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대전역 대합실로 들어서는 선생님을 뵈었다. 가방 하나 둘러메고 편안한 셔츠와 양복바지를 갖춰 입은 모습, 그리고 넉넉하고 순한 웃음. 반가운 인사를 서로 건네고 우리는 서대전역 앞에 있는 국밥집에 가서 요기를 했다. 이런저런 그간의 안부를 묻고 대전에서의 학창 시절에 대한 얘기를 하기에 앞서 선생님의 인상평에 관한 얘기부터 여쭤보았다. 갸름한 얼굴형과 선한 눈매 때문에 붙은 별명이기도 할 것인데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세수 안 한 사슴 낯’(최원식) 또는 “느릿느릿 초원을 건너는 낙타나 당나귀같이 순하고 파리한 얼골”(임우기). 선생님은 뒤엣것은 모르겠으나 사슴이 아니라 ‘노루(새끼)’라고 정확하게 정정하신다. 1985년경 쭈뼛쭈뼛 민족문학작가회의에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그때 천승세 선생께서 시인을 보자 대뜸 ‘저게 세수 안 한 노루 새끼라’ 하신 말씀이 와전되어서 사슴이 된 것이라 한다. 서구적이고 신비적인 느낌이 강한 사슴에 비해, 노루는 토속적이고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겨울눈이 소복이 덮인 날 민가 근처로 내려와 두리번거리며 먹을 것을 찾다가 제대로 훔쳐 먹지도 못하고 작은 인기척에도 제풀에 놀라 쏜살같이 산속으로 도망치는 노루.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세수도 제대로 못한 얼굴을 하고. 왜 굳이 ‘세수 안 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여쭤보니
“꾀죄죄하게 다녔으니까 그런 거지, 뭐”
하며 겸연쩍게 웃으신다.
“가계의 파탄과 중학 때부터 시작된 이십 년의 자취 생활, 서너 차례의 감옥행과 이 년여의 도피,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실천문학사 시절, 노동해방문학 시절, 창작과비평사와 작가회의 시절, 그것뿐이겠는가. 크고 작은 애증과 욕됨, 오해와 속수무책의 어긋남의 날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리하는 글을 애써 피해온 시인께 고향 이야기와 살아온 내력을 여쭙는 것이 조심스러 울 수밖에 없었는데 작정을 하신 듯 지나온 삶을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풀어내셨다. 우리는 대전 외곽에 있던 자취방과 시내에 있는 중고등학교, 그리고 고향인 보은의 회남면으로 가는 짧지만 긴 여정에 올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원래는 청주로 가려고 준비했는데 청주 중학교 시험에 낙방하는 바람에 급하게 2차로 입학한 것이 대전동중학교였다. 나중에 밝혀졌는데, 청주중 시험 문제가 유출되어서 청주 지역 학생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시험이었다. 한편 청주와 보은의, 그것도 시골 초등학교의 격차를 절감하기도 했다. 보은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형도 청주로 올라와 같이 지낼 예정이었으나 뒤틀려버린 것이다. 대전동중은 역사는 짧았지만 전교생이 480명가량 되는 큰 학교였다. 대전중학교를 가지 못한 학생들이 마지못해 가는 곳이 대전동중이었다. 입학할 당시에는 대전동중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대전상고 야구부 형과 한방을 썼다. 그 방에 야구부 형들이 자주 놀러 와서 내기 화투를 쳤는데 어린 마음에 그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화투가 끝나면 막걸리 추렴이 벌어졌고 그 사이에 끼어 노는 맛도 꽤 괜찮았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시골 초등학교 출신들로서는 도시 생활이 낯설어 형들을 따라다니면서 껄렁패가 되는 일이 많았는데 시인도 까딱하면 그 길로 들어설 뻔했다. 첫 달 시험에 전교생의 중간도 못 되는 석차에 오른다. 아버님이 어디서 말씀을 들으셨는지, 아니면 눈치를 채신 것인지 대전 동쪽 변두리에 있는 하숙집에서 태권도부 형과 함께 지내게 하셨고 2학년 때부터는 대전상고에 다니던 세 살 터울인 형과 자취를 했다. 그때부터 학교생활과 수업에 착실하게 임하면서 성적이 급속도로 올라 후에 대전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김사인, 「연보를 회피함」, 이종민 엮음, 『김사인 함께 읽기』, 모악, 2024, 315~ 316쪽.

유등천에서. 다리 아래 왼쪽 아파트 단지가 원미섬유 자리였다.

대전동중에서. 현재의 대전‘화’병원 자리.
응급실 왼쪽 가로 건물이 예전 교사校舍였는데 그것을 개축한 것이다.
대전동중은 동쪽의 신안동에 있었고 자취방은 서쪽의 산성동에 있었다. 자취방은 금산과 경계가 맞닿은 지역에 있었는데 그 곳은 대전으로 치면 서남부 끄트머리였다. 간판 있는 가게가 하나도 없었고 대부분 밭이었으며 가까이에 갱생원이 있었다. 그 당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허름하고 외진 곳에 겨우 방 하나 얻을 수밖에 없었으며 작은 기름 화로(곤로)와 양은솥만이 자취 살림의 전부였다. 학교에 갈 때는 아침 시간에 다니는 버스를 탔지만, 돌아올 때는 차비를 아낀다고 걸어왔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대전 중심부를 가로질러 오다가 유등천을 만나면 천변길에 접어 들어 하염없이 남쪽으로 걸어내려왔다. 도마교와 철길 사이 유등천 건너편에 원미섬유가 있었다.
그의 첫 시집에는 고향을 다룬 시가 제법 들어 있는데 궁벽한 농촌의 삶의 아픔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었다. 그에게는 고향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감이 컸다. 두 학급뿐이었던 회남초등학교에 서 중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졸업하면 곧바로 농사를 거들거나 양복점 시다를 하거나 공장으로 가거나 식모살이를 떠났다. 좋아하던 동급 여학생은 중학교 2학년까지만 다니다 그만두고 동네 언니를 따라 대전에 있는 원미섬유라는 방직 회사에 다녔는데 꼬챙이처럼 말라 이 년 만에 집에 돌아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독성 화학물질이 많은 작업 환경에 제대로 된 보호 장비도 없이 노출되었을 테니 중독에 의한 죽음이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 공장이 자취방 근처 유등천 천변 너머에 있었다. 주말에 고향집에 갈 때면 같은 버스를 타고 가기도 하고 간간이 소설책을 빌려주면서 아련한 첫사랑의 감정을 품었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컸다.
5학년 2반 여자아이네 교실 오른쪽 벽
기억하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슬픈 눈 사내아이 뒷짐 지고 하늘을 보던 액자 하나.
금모래 뜰 갈잎 숲으로 나를 불러 나도 그림 속으로 좇아 들어가 뒷짐 지면, 슬프게 하늘 보면, 강물 소리도 날 따라와 저희 엄마 누나 생각 얼굴 흐려져 차라리 눈 감고 흐르데.
— 「5학년 2반 교실에서」 부분
이 시는 그녀의 죽음이 각인된 상태에서 과거의 좋았던 한때,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소월의 시가 적히고 그 바탕이나 옆에 아련하게 강변을 마주 보고 뒷짐 진 소년과 그 앞으로 강변의 평화로운 풍경과 푸른 하늘이 펼쳐진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 소년의 슬픈 눈망울과 아련한 그리움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시인은 그 소년에 이입되면서 어렴풋한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런 마음도 몰라 주고 이 세상을 떠난 소녀에 대한 안타까움을 애타는 목소리로 부르며 몸부림친다.
그가 처음으로 가슴 깊이 새기게 된 시는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접한 주요한의 시 「빗소리」였다. 비 오는 어두운 봄밤의 고요함과 가슴이 일렁이는 기쁨을 담은 이 시에서 시인은 알 수 없는 서러움을 감득한다.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라는 첫 구절이 강렬하게 남았다. 그가 처음 쓴 시는 중학교 국어 수업 과제로 제출한 「노을」이다. 서편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에서 꺼져가는 사랑과 막막한 그리움을 비감 어린 영탄조로 쓴 시였다. 국어 교사였던 김종두 선생께서는 다른 반을 돌아다니면서 이 시를 칭찬하며 낭송을 시키셨다. 선생께서 이 시를 중고생 문예 현상 공모전에 출품하셨고 시인이 장려상을 받게 되면서 일약 ‘시 잘 쓰는 아이’로 소문이 난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서인지 대전고에 입학하기도 전인 중학교 3학년 때 대전 지역 고등학생 문학회에 스카우트(?)되었다. 조금 일찍 문명을 얻은 탓에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고 동급생들보다 빨리 입회해 선배 노릇을 하기도 했다.
약방을 하던 아버지가 어쩌다 빚에 몰려 하숙비도 못 내는 처지에 몰려 우울하던 중학생 소년이 우연히 끼적거려놓은 글을 선생이 자신도 모르게 백일장에 투고해 상을 받게 된 것이 ‘글쟁이’와 연을 맺게 된 단초였다. 소문이 나서 그는 대전 지역 고등학생 문학서클에 중학교 졸업반 때 형님 누나들에게 스카웃되었다. 그 누님들 옆에 가면 가슴을 달뜨게 하는 냄새가 났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로션 냄새였다. 그 누나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 용을 써가며 시를 썼다고 했다. 그때 그가 좋아했던 세계는 미당이나 강은교, 루이제 린저와 전혜린이었다.*
*조용호,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3> 김사인의 ‘노숙’」, 《세계일보》 2010년 1월 27일. https://v.daum.net/v/20100127222219903.
대전중 출신들이 대다수였던 대전고에서 주변부에 머물렀으며 학교에 큰 애착은 없었다. 그러한 데는 시조 시인인 정훈 선생이 이끄는 머들령문학회에 나가게 된 것도 중요한 계기로 작동한다. 정훈 시인은 충남 논산 태생이며 일제강점기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가람 이병기와 정지용 시인에게 배웠고 1938년 『자오선』 창간호로 등단한 분이었다. 해방 후 박용래, 한성기 시인 등과 교유하면서 대전 문단의 틀을 다진 큰 시인이다. 대전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영호남의 선로가 만나는 바람에 급하게 만들어지고 급속도로 성장한 교통 도시였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 기반이나 중심이 없을뿐더러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모여서 토박이가 없고, 주인도 없다. 교통 편의성 때문에 상업과 유통 산업이 활발했으며, 누구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으니 다양한 개성들이 자유롭게 어울리는 분위기가 강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근본이나 구심점이 없는 유랑민 의식에서 벗어나기 힘든 도시가 대전이라는 뜻도 된다. 역사적 전통이 빈약하다 보니 문화나 예술적 기반이 약했다. 그러한 대전에서 머들령문학회는 그 지역의 중고등학생들이 문학과 예술을 접하는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다.

대전고에 있는 현정탑 앞에서.
시인은 충남대학교에서 주최한 백일장에서 교내 문학회 부원들을 제치고 상을 타기도 한다. 그 당시 문학회 동기생 중 하나가 양애경 시인이다. 시인은 이미 어느 정도 제대로 된 문학을 하고 있다는 겉멋이 들었던 터라 교내 문학회를 얕잡아 보았다. 교내 문학회가 아니라 교외 문학회를 드나드는 것을 알게 된 문학회 주임 선생님의 따가운 질책과 퇴학 협박(?)을 받고 나서는 문학회 출입을 자제하면서 공부에만 전념한다.
대전은 일제강점기 대전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였다. 역 주변에 관공서가 자리 잡았고 그 옆이 일본인 거류지였다. 그 주변에 상업 시설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중심가(옛말로 중앙통)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충남도청 등이 다 이전했지만 도청과 시청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중심가 언저리에 시외버스터미널(옛말로 차부車部)이 있었다(중구 대흥동, 지금의 대림빌딩 자리). 차 부에는 운송회사별로 번호가 붙여졌는데 대전 외곽 지역으로 가는 것이 금남여객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고향집에 갔다. 여전히 팍팍한 살림은 펴지지 않았으며 그 때까지도 빚쟁이들이 드나들어 편히 쉬거나 느긋하게 마음 붙일 수가 없었다. 주말이면 중앙시장 근처에 있는 헌책방 골목에 가서 철학 개론서들을 사서 읽었다. 그 당시 문고판으로 나온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기도 했다.
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시를 습작하면서 삶의 근본적 문제에 천착하는 철학과를 강하게 지망한다. 집안의 반대가 심할수록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74년, 그 당시 계열별 모집인 서울대 문리대 문과에 진학한다. 그때만 해도 1학년 교양 과정을 공과대학(지금의 서울과기대 자리)에서 배워야 했기에 공릉동에서 하숙을 했다. 잠깐이기는 했지만 대구에서 경북고를 졸업하고 올라온 김영현(후에 소설가가 됨)과 같은 방을 썼다. 1학년 마칠 때까지 철학과 외의 다른 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깊이 심취했었는데 막상 철학과에서 개설한 철학 개론 수업을 들어보니 논리학과 인식론을 주로 강의하던 시절이라 삶의 근본적 문제나 물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갈급한 마음에 동숭동 문리대의 철학과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지만 칸트는 너무 어려웠다. 그러던 중 대한도덕회란 학생 단체에서 주최한 구도적 삶에 관한 강연을 듣는다. 대만계의 유불선을 통합한 소수파 종교 단체였는데, 그 종파의 좌장이라고 할 수 있는 큰어른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화를 받아 여름방학 동안 금산사에서 단기 출가를 감행한다. 짧은 수련 생활이기는 했지만 마음의 중심을 잡고 대학을 그만둘 결심을 한다.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논변적인 사유보다는 구도와 고행을 통한 자기 정진이었기 때문에 철학과를 더 이상 지망하지도 않았고, 학교에 적을 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씀을 차마 부모님께 드리지는 못하고 뜬구름처럼 학교를 다니고 있던 중에 2학년 2학기에 진행되는 전공 선택 과정에서 국문과에 진학한다. 그때도 간간이 습작을 하고 있었고 그나마 잘하던 것이 문학이니 국문과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국문과 교수셨던 정한모 선생의 부름을 받아 연구실 한편에 책상 하나를 받고 조교처럼 연구실을 드나들며 공부를 한다. 그 당시 연구실에는 벽초 홍명희 연구로 박사논문을 집필 중이었던 강영주 선생도 가끔 들르셨고 조교는 권영민 선생이셨다. 김사인 시인에게 정한모 선생은 학자나 시인 이전에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가난한 형편에 지친 데다 존재론적 고민에 빠져 고달픈 나날을 보내던 시인에게 장학금을 마련해 주시면서 학교와 공부를 그만두지 못하게 한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대학신문》에 발표한 시들을 선생께서 눈여겨보신 것으로 짐작된다. 김윤식 선생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근대 문학의 흐름과 사조를 집대성하고 풍성한 자료들을 철저한 고증과 함께 체계화한 작업의 결과물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를 탐독했다. 그가 임화의 시들을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였다. 그때 영향을 많이 받은 선배로 연암 박지원 연구로 정평이 난 김명호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연구에 헌신한 학자이다. 초기 한미 관계의 자료들을 빠짐없이 다 찾아보고 그 속에서 인용된 원전들까지 비교 대조해가면서 당대 담론의 맥락을 철저하게 연구한 업적의 탁월함 뿐만 아니라 학문의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김윤식 선생을 통해서 루카치를 읽지 않았다면, 그 리고 이을호라는 당시의 가장 선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를 만나지 않았다면 국문학 연구에 매진했을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1977년 11월 18일, 그의 삶의 진로에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이른바 ‘서울대 반정부 유인물 배포 미수 사건’에 연루돼 첫 번째 징역을 살게 된 것. 74학번 동기들과 함께 구속되었는데, 구속의 발단이 된 것은 김영현이었고 뒤이어 김사인, 미학과의 김태경(전 이론과실천 대표), 철학과의 이을호(전 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가 차례로 잡혀갔다. 김태경과 이을호는 그 당시 모든 대학교에 유포된 사회과학 서적의 제작과 유통을 총괄하고 있었다. 지성사의 걸작인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To the Finland Station)』가 1960년대 『근대 정치 사상사』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도서관 한 귀퉁이에 꽂혀 있었는데, 우연찮게 찾아내 친구들과 돌려 읽으며 학습했다. 이러한 학문적 탐구의 방향 전환에는 대학 2학년 때인 1975년, 관악 캠퍼스에서 일어난 농과대학 김상진 열사의 할복 의거, 그리고 관악 캠퍼스로 옮기고 나서 첫 집회인 5월 22일 김상진 열사 장례식(속칭 오둘둘 장례 시위)에 참여했다가 교내에 진입한 경찰에 의해 잡혀간 경험이 주요하게 작동했다. 일주일간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도 없지 않았고 교련 수업 거부 투쟁에도 앞장서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구속되면서 초법적이고 반헌법적인 권력의 위압과 모순적 정치 현실을 피부로 절감하면서 유신 정권에 저항하는 투쟁 노선을 본격적으로 걷게 된다. 하지만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1977년 체포되기 전까지는 학생운동의 본진과는 거리가 먼, “자생적으로 모여 냉소하고 자학하며 실존적 고민과 결단을 한 문사文士”* 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위의 네 명은 모두 학내 유명 인사이자 쟁쟁한 논객이었다. 김영현과 김사인은 인문대 교지인 『지양止揚』의 창간 멤버였다. 무엇보다 김사인은 1977년 4월 육당-춘원의 준비론과 단재의 투쟁론을 비교하는 인문대 첫 학술대회의 사회를 보면서 본격적으로 공개 무대에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이때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학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단재의 투쟁론의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조명을 받으면서, 거기에 깃든 사회주의 사상이 공식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이로써 그는 학생운동계에서 요주의 인물이 된다. 그는 그것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길은 아니었다고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이 학술대회를 계기로 김태경, 이을호와 맺어진다.
*신동호, 「[긴조 9호세대 비화](38) 펜은 칼보다 강하다」, 『주간경향』 2004년 10월 8일. https://v.daum.net/v/20041008023953837....
교내에 상주하는 정보과 형사들과 안기부 요원들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어떤 형태의 시위든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여름방학 동안 침체된 투쟁의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유신 체제의 문제를 비판하는 선언문을 작성하고 그것을 발표하고 유포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그러던 차에 2학기가 시작되고 사회대에서 진행된 학술대회가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준비하던 동맹 휴학을 촉구하는 유인물의 배포 계획은 보류되었고 다른 차원의 투쟁을 준비해야 하는 난감한 처지에 놓인다.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김영현이 후배들과 일을 도모하겠다며 이을호가 보관하고 있던 등사판과 유인물을 숨겨서 교내를 빠져나가던 중에 체포된다. 제대로 된 시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계획과 모의만으로 이 네 사람은 수감되고 학교에서 제적된다. 정한모 선생의 수제자로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던 김사인, 인문대 수석 졸업을 앞두고 있던 이을호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어의 신세가 된다. 정한모 선생께서 어떤 낌새를 눈치채셨는지 차비를 주시면서 지방으로 피신하라는 말씀에 해남으로 내려갔다가 고향집에 와서 체포된다. 정한모 선생께서는 본인이 고향집에 내려가라고 한 것 때문에 체포되었다는 생각에 구치소에 면회를 오셔 서는 자책감에 우셨다. 그는 세 번 투옥됐고 자주 수배를 피해 잠행을 해야만 했는데 공교롭게도 매번 체포된 장소는 고향집 아버지 앞에서였다. 너무나 안타까운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시인의 내면에는 학자의 길과 실천적 투쟁의 길이 통합되거나 극복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연구 중심의 학풍이 철저했던 국문과에서 선뜻 창작을 한다고 내세울 수도 없었다. 그는 몰래, 그것도 밤에 혼자 있을 때 시를 썼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에 입학해보니 그때까지 이름도 못 들어본 김수영과 신동엽을 좋아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자신이 좋아했던 미당, 강은교, 황동규의 시들은 소부르주아적이고 퇴폐적인 것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자신이 그 전까지 좇았던 심미적인 것과 정치적 현실에 비판적인 저항운동은 결합될 수 없었다. 그는 밤늦게까지 정치적 모순과 노동 문제 등 시대적 화두와 씨름하면서 투쟁의 방향성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고 나서 집에 돌아와 마음에서 우러나는 곱고 여린 시들을 썼다. ‘머리’와 ‘가슴’이 안 맞아서 괴로운 시절이었다.
‘여기’란 당연히 가슴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런 분위기에서 미당의 「춘향유문」이 좋다고 지껄이면 완전히 보수반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술을 먹고 붓 가는 대로 쓰고 나서 아침에 보면 그건 ‘옳지 않은’ 시였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작심하고 ‘옳은 시’를 써놓고 나면 이건 시가 아니라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옳고 옳지 않다는 구분에 불만을 품기에는 미 안하고 사치스러운, 급박하고 아픈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잡혀가서 매를 맞고 고향 동창들은 싸구려 미싱사로 쪽방에서 일하다 폐병에 콜록거리며 죽어가던 그런 시절이었다.*
*조용호,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3> 김사인의 ‘노숙’」, 《세계일보》 2010년 1월 27일. https://v.daum.net/v/20100127222219903..
그 당시 머리와 가슴이 파열된 상태와 내적 갈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의 등단작이 된 「시를 쓰며 1」이다.
“고급 향수 같은 불란서 영화 같은,/ 곱고도 아련한 시 쓰고 싶어요 천진무구하고 싶어요 환장하겠어요”.
그는 이 시에서 정치적 현실에 눈감고 무도하게 잡혀간 친구들을 모른 척하고 현실 만족과 자기 안위에만 급급해서 살아가는 자세를 똥간에서 기식하는 쥐새끼의 삶에 비유한다.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현실을 없는 것처럼 치부하고 살아가다 ‘쥐새끼처럼 콱 밟혀 죽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투쟁의 현실이 막막하고 두렵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내면서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곱고 아련한 시들로는 그런 현실에 대항할 수 없다는 선명한 자각과 다짐을 담고 있다. 「새」에서도 ‘거센 바람’과 같은 억압적 현실과 그것을 뚫고 나가지는 못하고 ‘혼신의 날갯짓’으로 겨우 버텨내는 ‘아슬한 균형’에 놓여 있는 자신을 드러낸다. 닥쳐오는 거센 바람과 허공의 피막을 예리한 ‘비수’와 같은 부리로 쪼아서 뚫고 나가는 수직의 힘은 ‘죽음의 바람’ 앞에 순식간에 패대기쳐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죽음 또는 죽임의 바람에 맞서 ‘살아 건너기’ 위해서는 몸을 버릴 수밖에 없고 예민한 부리는 부러져야만 한다. ‘기어이’라는 부사로 끝맺어지는 이 시는, 몸은 버릴 수 있지만 날카로운 정신만은 놓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와 함께 그것이 끝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절망 사이의 긴장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내적 파열과 갈등 속에서 십 년 정도 제대로 시를 쓰지 못한다. 그 무렵 큰 위안을 준 것이 신경림의 『농무』였다. 신경림 시인 또한 등단 무렵에는 존재론적 고민을 담은 「갈대」와 같은 시들을 발표했지만 십 년 동안 절필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다가 「파장」 등을 발표한다. 그 십 년의 간극과 시차를 알게 되면서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아버지는 경북 선산 출신으로 정식으로 약학을 공부하신 분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원래 직장은 남선전기(한국전력공사의 전신)로 전기 기술자였다. 그 당시 시골 벽지에는 의사도 없고 약사도 없는 마을들이 많아서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임시 조치로 약을 취급할 수 있는 약포나 약종상을 운영할 수 있는 약식 자격시험이 있었는데 여기에 합격하여 약방을 차린 것이었다. 다소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성격의 아버지와 달리 보은군 회남 출신의 어머니는 조용하고 침착한 분이셨으며 자식들의 교육에 열정적이셨다. 해방 전후 무렵 대구에 있는 간호학교를 졸업하시고 회남 인근의 보건소장을 맡아 작고하실 때까지 재직하셨다. 두 분은 젊은 날에 대구에서 만나 어머니의 집 근처인 회남에 정착하셨던 것이다. 중학교 입학 무렵, 가세가 크게 기울어 중학교 진학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어머니께서 학업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밀어붙이셨다. 문학적인 기질은 아버지 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는 남선전기 노동조합의 문예반에서도 활동하셨으며, 시인이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종종 신춘문예 투고를 위 해 소설도 쓰시고 가까운 분과 합평 모임을 꾸리기도 한 문학 지망생이었다. 시인은 회남면 신곡리 약방집 둘째 아들이었다.
대청호는 충청남도 대덕군과 청원군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어진 이름이며, 대청댐으로 물길을 막아 주변의 큰 도시인 대전과 청주의 상수원으로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수몰지구에 포함된 사람들은 논농사와 밭농사로 생계를 이어나가다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수자원공사에서 이주와 정착 지원금을 주기는 했지만 다른 일자리와 집을 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1975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80년 12월에 완공되었는데, 시인은 수배와 도피 생활로 고향이 수몰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회덕에서 시작해서 회남으로 들어가는 국도는 수몰 이전만 해도 산 중턱에 해당했다. 고불고불 이어지는 국도를 쉬지 않고 삼십여 분을 달려야 회남면이 나온다. 그 당시 어부동 도선장(나루터)에서 버스길이 끊기는데 그때부터는 버스를 사각형 모양의 넓적한 거룻배에 실어 강을 건너야 회남에 닿을 수 있었다. 눈이 오기라도 하면 배가 뜨지 않아 어부동에서 산길을 한참이나 걸어야 했다.
우리는 회남대교 중간쯤에 서서 대청호를 바라보았다. 회남으로 들어가는 회남대교의 시작점(사진 오른쪽) 뒤편 멀리 보이는 움푹 들어간 곳에 도선장이 있었고 왼쪽은 사자울이었다. 초등학교 때 소풍 온 장소가 사자울 백사장이었다. 사자울은 샛여울 또는 새여울(한자로는 新灘)이 변형된 것이다.
“하루 세 차례 오후 네 시 반이 막차지만 다섯 시 넘어 와도 잘하면 탈 수 있던 금남여객/ 장마철엔 강물 불어 얼씨구나 안 가고 겨울에는 길 미끄럽다 안 가던 금남여객/ 자취생 쌀자루 김치 단지 이리저리 처박던 금남여객”.(「금남여객」)
지금의 회남면 소재지와 멀지 않은 곳에 남대문공원이 있다. 남대문리는 회인면 용곡리에 위치한 호점산성의 남문이 있던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대청호가 들어선 뒤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기념관을 조성해놓은 것이 남대문공원이다. 여기에 시인이 쓴 「수몰유래비」와 수몰탑에 적힌 시 「아이들 자라 고향을 묻거든」 이 있다.
“아이들이 자라 고향을 묻거든 이곳에 와 소리쳐 부르게 하라/ 가난했으나/ 지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답던 곳/ 솔개를, 서당평을, 사자울을 부르게 하라/ 산수골을, 어성을, 양중지를, 살목을, 바탕뫼를, 영당을, 새별을, 사당마루를, 정문거리를 소리쳐 부르게 하라”.
이제는 모두 물속으로 사라진 지명들이다. 이 시는 이어서 고향 마을을 이루는 사람과 삶의 세목들을 나지막하게 짚은 뒤, 평평하게 고른 땅에 내리던 빛의 눈부심을 남겨둔다. 고향인 영당影堂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어서 붙은 지명이며 이 지역에는 노론 계열의 학맥이 이어져 내려왔다.

회남대교에서.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았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다시 대규모 수배령이 떨어졌고 수배 때문에 시인은 고향 마을이 물속에 잠기는 것도, 집이 이사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1981년 1월쯤에 산 중턱에 새로 조성된 회남면의 집에 잠시 들렀다가 잠복하고 있던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잡혀간다. 1980년 1학기에 복학을 했지만 다시 한번 졸업을 앞둔 시점에 수배가 떨어져서 피해 다니고 있었다. 수배되면 자동으로 제적 처리가 되어야 했으나 워낙 대규모 수배령이어서 그런지 그해 여름, 학교에서 왜 졸업을 안 하고 있냐며 연락을 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신문기자가 피신 중인 시인에게 알려준다. 시인은 급하게 「이육사론」으로 졸업 논문을 써서 졸업한다. 무사히 졸업까지 했으니 수배가 풀린 거라 생각한 시인은 국문과 대학원 시험을 준비해서 수석으로 합격한다. 하지만 나중에 수배 명단과 대학원 합격자 명단을 대조한 안기부는 수배 중인 학생들을 불합격 처리한다. 앞날도 캄캄하고 속이 상해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체포되어 성북경찰서로 압송된다. 다행히 뒤늦게 잡혀서 상대적으로 고초도 덜 겪었고 징역도 오래 살지는 않았다.

생가터에서
우리는 회남면 소재지로 향했다. 회남면은 원래 회인군의 남면이라는 뜻으로 지은 지명이다. 회남면 소재지는 사담길이 지나는 곳에 있었는데 면사무소와 회남우체국, 남보은농협, 회남초등학교 등 기본적인 관공서만 있는 조그만 면이었다. 회남면을 지나 국도를 좀 더 따라가면 회인면이 나온다. 가구는 50호 정도 되어 보였는데, 처음 이주해온 원주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이미 세상을 떴고, 외지인들이 새로 지은 전원주택이 곳곳에 보였다. 보은 외곽이고 탁 트인 데여서 주말이면 인근 도시의 유랑객들이 휴양지로 찾는 곳이 되었다 한다. 간판만 남은 폐점한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버스 종점 근처의 골목으로 들어서서 50미터 정도 걸으면 시인의 생가터가 있다. 원래는 단층집이었는데 골목을 향해 약방이 자리 잡고 약방 뒤편에 가정집이 있었다. 오래전 집을 처분해 새로 산 주인이 2층으로 건물을 올렸고 지금은 폐가가 되었다. 왼쪽 옆집도 빈집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옛 회남초등학교 교문을 대문으로 해놓고 있었다. 시 「내 고향 동네」에서는 고향 마을 사람들의 신산한 삶의 내력을 풀어냈는데, 그 마지막에 자신의 집을 슬쩍 얹어놓았다.
“여섯째 집은/ 데모쟁이 대학생 아들놈 덕에 십 년은 땡겨 파싹 늙은 약방집 내외.”
산 중턱에 올라앉은 마을은 하늘과 더 가까워졌고 살림은 펴지지 않거나 더 팍팍해져
“무너지고 남은 부스러기들만 꺼칠하게 산다”.
첫 시집 『밤에 쓰는 편지』는 1987년 가을 부모님의 수연壽宴(회갑잔치)에 맞추어 낸 시집이다. 그 당시 청사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이영진 시인과 편집부의 김형수 시인의 독촉을 받기는 했지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것 때문에 힘들게 써낸 시들이어서 마음에 차지 않아 시집 출간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원고를 보기만 하겠다고 해서 김형수 시인에게 넘겼는데 편집부의 손질을 거쳐서 시집이 나온다. 강제적으로 끌려서 내기는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손에서 절대 놓지 못했을 것이다. 제목은 ‘밤에 쓰는 편지’. 연작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밤’은 시대적 어둠을 상징하며 편지는 가장 내밀한 고백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밤에만 쓸 수 있고 밤이니까 쓰는 편지라고도 읽을 수 있다. 시대의 어두운 곳에서 길어 올린 것이면서 더 깊은 어둠으로 한 걸음이라도 흘러가려는 긴장으로 가득하다. 서정시와 민중시(저항시)가 길항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합하려는 의욕 또한 없지 않다. 김지하 시인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특히 「빈 산」, 「모래내」, 「1974년 1월」 등 『창작과비평』 1975년 봄 호에 실린 절명시에 가까운 시편들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김지하의 그 시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긴장된 상황 속에서도 삶과 죽음의 넘나듦을 유장한 가락에 실어내고 핏속에 스며 있는 말과 호흡을 끌어 올려 비장하게 풀어낸 것들이었다. 이 시집에서 지배적인 이미지는 밤과 강이다. 선한 목숨들이 사정없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에서 자연물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비명을 지른다. 그 여린 목숨들의 비명과 ‘쓰거운 희망’(「밤에 쓰는 편지 1」)을 안고 흐르는 것이 이 시집이다. ‘쓰겁다’는 미각의 하나인 ‘쓰다’의 방언이기는 하지만 ‘마음에 달갑지 않고 언짢다’라는 심리적인 것도 포함한다. 표준어로 하면 ‘쓰다’와 ‘씁쓸하다’가 함께 있는 말이 ‘쓰겁다’일 것이다. 보잘것없는 희망이지만 이것마저 없다면 오늘의 고단한 삶마저도 버텨낼 수 없어 마지못해 버리지 못하는 희망이 바로 ‘쓰거운 희망’일 것이다.
“나도 한 줄기 강이어야 합니다./ 나도 큰 슬픔으로 누워/ 머리 풀고 나란히 흘러야 합니다.”(「밤에 쓰는 편지 3」) 슬픔 속의 희망, 희망 속의 슬픔만이 온전하게 슬픔과 희망을 살리는 것이다. “막연하지만 노동과 사랑이, 옳음과 아름다움이, 희망과 슬픔이 어떤 수준에건 통일되는 자리쯤에 시가 서야 한다고 더듬거려볼 뿐이다. 그것뿐이다.”(첫 시집의 「자서(自序)」)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에는 십구 년이라는 긴 시간이 가로놓인다. 원체 과작이기도 하지만 연유가 없지 않았다. 1989년 『노동해방문학』으로 구속되어 감옥에서 쓴 시들로 묶인 원고가 제법 두툼했다.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 이야기가 담긴 시들도 있었고, 체제와의 대결 의지로 고양되어 있던 시기여서 날이 서 있거나 힘이 센 시들이 많았다. 출옥하면서 그 원고 뭉치를 챙겨 나왔는데 곧바로 수배가 떨어져 잠행에 들어가 여러 곳을 전전하던 중에 잃어버린다. 시집 하나가 통째로 사산된 것이다. 기억 속의 원고 내용을 되살리려고 얼마간 애를 쓰다가 이러다 사람 망가지겠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기억으로 되살려 시를 만들어내도 그 때의 기운과 기세가 살아나지 않았다. 얼마나 낙담했던지, 시인의 말에 따르면 무릎이 꺾였다고 한다. 수배가 풀린 뒤 마음을 가다듬었고, 그러자 그동안 가지고 있던 ‘옳은 시’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얻어터질 만큼 얻어터지고 나서야 오금이 풀리면서 편안해졌고’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긴 것이다. 그 이후에 쓴 시들을 묶은 것이 2006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이다.
『가만히 좋아하는』은 가녀린 것들의 ‘외로운 떨림’, 앞서 간 것과 나중 온 것의 미묘한 만남의 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깊이에서 이루어진다.(「풍경의 깊이」) 시대의 막막한 어둠을 털고 나와 과거의 상처들과 온전하게 대면하고 바닥에 널브러지고 허물어진 몸을 껴안는다.
시인은 사노맹 사건으로 다시 수배를 받았는데, 그 당시 정보 기관인 안기부에서는 박노해 시인(박기평)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노동자 출신이 그런 시를 쓸 리 없다고 판단했다. 즉 박노해는 가공의 인물이며 김사인이 박노해라는 이름으로 시와 논평을 쓴 걸로 본 것이다. 자신이 잡히면 박노해 시인의 존재가 정확하게 알려질 수밖에 없어 잠행을 해야 했다.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노숙」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둠과 구석으로 피해 다니던 시절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을 이루었지만 제대로 생계도 돌보지 못하고 불안한 잠행을 거듭해야만 했던 현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감시에 쫓겨 잠마저도 “진땀과 악몽의 길”이다. “낯선 땅과 후미진 구석”만 찾아다니다 문득 눅눅한 요 위에 벗어놓은 헌 옷가지를 보고는 육탈(몸 벗음)의 착란이 일어난다. 자기의 몸피와 골육의 형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옷과 이불마저도 지쳐 있다. 더 이상 도망갈 힘도 피해 다닐 여력도 없는 상태에서 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저 육신만이라도 쉬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 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저 물음은 초탈에서 비롯된 허허로움이 아니라 존재의 극단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에 가깝다.
세 번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힘겹게 살아가는, 살아갔던 사람들 ‘곁’에 붙어 서서 힘주어 걸레를 짜듯 그 정수만을 길러내는 시들로 가득하다. 말의 호흡은 느리면서 경쾌하고 빠르면서 내리누른다. 곡절 없는 말들이 없고 방기放棄로 흩뿌리는 말들도 제자리에 맞춤한다. 그것은 이숭원의 말처럼 ‘구도의 연금술’이라고도 할 수 있고, 시인의 말처럼 ‘섬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섬김’의 따뜻하고 순결한 수동성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어떤 간곡함이 제 시 쓰기의 내용이자 형식이기를 소망합니다.”(「제14회 대산문학상 수상 소감」) 섬김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면 자연히 남이 높아지는 것이다. 욕심과 사사로움을 접고 자기를 낮은 곳에 두는 것, 그것이 김사인 시의 본령일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작품 활동과 별개로 그가 창간 동인이나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잡지 또한 삶의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다. 『시와경제』와 『노동해방문학』. 두 잡지 모두 지속적으로 펴내지는 못했지만 노동운동 또는 사회주의 운동과 긴밀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김사인은 동인지 『시와경제』 창간 동인으로 참여하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박노해 시인의 시가 투고 형식을 거쳐 처음으로 지면에 실린다. 김사인의 연보를 보면 등단 연도가 1981년으로 기재되기도 하고 1982년으로 적혀 있기도 한데, 이는 『시와경제』 창간호의 발행일이 1981년 12월 25일이기 때문이다. 발간 날짜가 연말이어서 그런지 1982년으로 기재된 경우가 많은데 최근에는 정확히 1981년으로 기록된다. 그가 창간 동인이 된 데는 시대적인 맥락이 있다. 유신 정권 시절 긴급조치로 수배를 당하거나 정치범으로 구속되었던 학생들이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대거 복학한다. 복학생과 재학생이 학교에 모이면서 저항운동과 시위가 거세게 일어난다. 한편으로는 복학생과 재학생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져 묘한 갈등 관계가 생기기도 했다. 그 때의 재학생들이 소위 386세대의 주축이 된다. 복학을 계기로 선배 세대인 황지우, 김정환 등과 맺어진다.
시인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 계간 『실천문학』의 편집위원 겸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했다. 1986년에 나온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도 그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원래 실천문학에서는 월간 ‘노동문학’이라는 제호로 노동자들을 위한 대중 생활문예지를 준비 중이었다.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은 생활 수기 위주인 잡지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노동문학지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은 김사인, 박노해 그리고 조정환 세 사람에 의해 당 파적 노동문학지 발간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한데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적극적인 문예운동을 펼치려는 뜻으로 시작했지만, 당 건설 운동의 일환 중 하나인 문예운동으로 끌고 가려는 다른 준비위원들과 뜻이 맞지 않았다. 김사인 시인은 문학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당 위주의 문학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노동문학상을 제정하면서」라는 노동문학상 제정 취지문은 김사인 시인이 쓴 것이다. 민족민주운동의 진일보를 문학 내에 담보하면서도 편협한 계급 이기주의나 노동자의 독선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고유한 형상적 인식의 기능과 탁월한 대중적 호소력을 갖춘 ‘가장 정당한 문학’으로서의 노동문학이 진정 그가 바란 뜻이었다. 잡지의 성격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노동문학’ 대신 ‘노동해방문학’을 제호로 삼고 조정환이 주간을 맡아 1989년 4월에 창간된다. 김사인은 제호를 ‘노동문학’으로 하고 싶었으나 실천문학사에서 월간 『노동문학』을 선점하고 있었기에 부득이하게 물러선 것이기도 하지만 편집위원회의 회의와 투표를 거쳐 결정된 사안이기에 받아들인다. 창간호의 표지를 보면 ‘문학’이라는 글자는 ‘노동해방’이라는 글자보다 작게 써졌는데 강한 이념적 지향성을 드러내려는 뜻이었다. 조정환에 따르면, 노동해방은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쓰인 것이다.* 김사인은 노동문 학사의 발행인으로 선출되었으며, 출판사를 등록할 때 ‘노동문학’을 되살린다. 노동해방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운 잡지가 문교부의 정기간행물 등록 인가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김사인은 염치 불구하고 정한모 선생을 찾아간다. 문교부 장관으로 퇴임하신 지 얼마 안 된 때라 출판국에 선처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선생께서는 “너하고 나는 참……” 하면서 말끝을 흐리셨다. 아끼던 제자가 안정적인 학문의 길을 가지 못하고 어렵고 힘든 문학의 길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그래도 내 제자이니 내가 거두어야지, 하는 마음이 교차하셨을 것이다. 잡지가 나온 뒤 바로 구속되어 몇 달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왔지만, 한두 달 뒤에 출판사에 압수수색이 들어와 두 딸과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약 이 년간을 잠적과 피신, 잠행으로 보냈다. 편집장인 임규찬 평론가는 피하지도 못하 고 체포되어 모진 고생을 겪었다. 수배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정한모 선생의 임종도 장례도 지키지 못했다. 시인은 은사의 난감한 표정과 마음에 큰 짐을 안겨드린 죄송함을 아직도 새기고 있다.
*『노동해방문학』의 창간 준비 과정과 발간 경위는 조정환, 「진보적 사회를 향한 금지된 열정: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탄생」, 『대산문화』, 2002년 하반기호(통권 7호) 참조.

생가터까지 둘러보고 나서 카페에 들러 더위를 식혔다. 8월 말 인데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날이었다. 시원한 대추차가 달착지근하게 맛있었다. 선생님은 잠시 고향 사람 한 분과 다가올 추석을 위해 벌초를 부탁하러 선영에 다녀오셨다. 날도 어둑해지기 시작하고 서대전역에서 전주로 가는 막차 시간도 맞춰야 해서 다시 대전으로 가는 국도에 올랐다. 마음에 걸리는 남은 과업이 있는지 여쭤보니 예전 창비에서 진행한 팟캐스트 라디오 <김사인의 시시詩詩한 다방> 원고를 책으로 묶는 작업을 마무리할 생각이라고 하신다. 그 당시 내가 자료 조사 겸 보조 작가로 선생님을 도와드렸었는데, 녹취한 내용을 책의 편집 체제에 맞게 다듬고 교정까지 마무리했지만 지금껏 미루고 계신 것이다. 신채호부터 신동엽까지, 근현대 시사의 주요 시인들을 망라한 이 팟캐스트는 그 당시의 시대적 맥락과 시인이 살아온 내력을 잘 결합하여 시인의 시 세계를 평론가가 아니라 시인의 눈으로 들여다본, 그래서 학술서와 교양서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 좋은 책이 될 터였다. 멀리서 미력이나마 보태면서 선생님 나름의 박사논문을 집필하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혼신을 들여 시를 선별하고 낭독도 하셨던 것을 눈앞에서 뵈었다. 올해나 내년쯤엔 꼭 책을 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생님은 대전으로 가는 국도에서는 크게 말씀이 없으셨다. 대낮에 그토록 빛나던 윤슬들이 잦아들고 호수는 콜타르처럼 끈적한 감청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저 물속에 선생님의 고향 마을과 집과 골목과 사람들이 잠들어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에 물이 들어찬 듯 먹먹했다.
김사인
1981년 『시와경제』 창간 동인으로 데뷔. 시집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냈다. 신동엽창작기금,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심장보다 높이』를 냈다. 신동엽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유심상 등 수상.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슬픔으로 눕고 나란히 흐르다
김사인
김사인 선생님을 맞기 위해 대전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몇 해 전부터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예술가의 집에서 지내신다. 고향인 보은과 학창 시절을 보낸 대전을 둘러보기 위해 접선지로 서대전역을 지목하셨다. 전주에서 올라오는 ITX가 서대전역을 정차하기에 정해진 접선지였다. 8월 말이었지만 무더웠다. 오늘 답사 여정도 더위 때문에 고생 좀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대전역 대합실로 들어서는 선생님을 뵈었다. 가방 하나 둘러메고 편안한 셔츠와 양복바지를 갖춰 입은 모습, 그리고 넉넉하고 순한 웃음. 반가운 인사를 서로 건네고 우리는 서대전역 앞에 있는 국밥집에 가서 요기를 했다. 이런저런 그간의 안부를 묻고 대전에서의 학창 시절에 대한 얘기를 하기에 앞서 선생님의 인상평에 관한 얘기부터 여쭤보았다. 갸름한 얼굴형과 선한 눈매 때문에 붙은 별명이기도 할 것인데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세수 안 한 사슴 낯’(최원식) 또는 “느릿느릿 초원을 건너는 낙타나 당나귀같이 순하고 파리한 얼골”(임우기). 선생님은 뒤엣것은 모르겠으나 사슴이 아니라 ‘노루(새끼)’라고 정확하게 정정하신다. 1985년경 쭈뼛쭈뼛 민족문학작가회의에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그때 천승세 선생께서 시인을 보자 대뜸 ‘저게 세수 안 한 노루 새끼라’ 하신 말씀이 와전되어서 사슴이 된 것이라 한다. 서구적이고 신비적인 느낌이 강한 사슴에 비해, 노루는 토속적이고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겨울눈이 소복이 덮인 날 민가 근처로 내려와 두리번거리며 먹을 것을 찾다가 제대로 훔쳐 먹지도 못하고 작은 인기척에도 제풀에 놀라 쏜살같이 산속으로 도망치는 노루.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세수도 제대로 못한 얼굴을 하고. 왜 굳이 ‘세수 안 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여쭤보니
“꾀죄죄하게 다녔으니까 그런 거지, 뭐”
하며 겸연쩍게 웃으신다.
“가계의 파탄과 중학 때부터 시작된 이십 년의 자취 생활, 서너 차례의 감옥행과 이 년여의 도피,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실천문학사 시절, 노동해방문학 시절, 창작과비평사와 작가회의 시절, 그것뿐이겠는가. 크고 작은 애증과 욕됨, 오해와 속수무책의 어긋남의 날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리하는 글을 애써 피해온 시인께 고향 이야기와 살아온 내력을 여쭙는 것이 조심스러 울 수밖에 없었는데 작정을 하신 듯 지나온 삶을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풀어내셨다. 우리는 대전 외곽에 있던 자취방과 시내에 있는 중고등학교, 그리고 고향인 보은의 회남면으로 가는 짧지만 긴 여정에 올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원래는 청주로 가려고 준비했는데 청주 중학교 시험에 낙방하는 바람에 급하게 2차로 입학한 것이 대전동중학교였다. 나중에 밝혀졌는데, 청주중 시험 문제가 유출되어서 청주 지역 학생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시험이었다. 한편 청주와 보은의, 그것도 시골 초등학교의 격차를 절감하기도 했다. 보은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형도 청주로 올라와 같이 지낼 예정이었으나 뒤틀려버린 것이다. 대전동중은 역사는 짧았지만 전교생이 480명가량 되는 큰 학교였다. 대전중학교를 가지 못한 학생들이 마지못해 가는 곳이 대전동중이었다. 입학할 당시에는 대전동중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대전상고 야구부 형과 한방을 썼다. 그 방에 야구부 형들이 자주 놀러 와서 내기 화투를 쳤는데 어린 마음에 그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화투가 끝나면 막걸리 추렴이 벌어졌고 그 사이에 끼어 노는 맛도 꽤 괜찮았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시골 초등학교 출신들로서는 도시 생활이 낯설어 형들을 따라다니면서 껄렁패가 되는 일이 많았는데 시인도 까딱하면 그 길로 들어설 뻔했다. 첫 달 시험에 전교생의 중간도 못 되는 석차에 오른다. 아버님이 어디서 말씀을 들으셨는지, 아니면 눈치를 채신 것인지 대전 동쪽 변두리에 있는 하숙집에서 태권도부 형과 함께 지내게 하셨고 2학년 때부터는 대전상고에 다니던 세 살 터울인 형과 자취를 했다. 그때부터 학교생활과 수업에 착실하게 임하면서 성적이 급속도로 올라 후에 대전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김사인, 「연보를 회피함」, 이종민 엮음, 『김사인 함께 읽기』, 모악, 2024, 315~ 316쪽.
유등천에서. 다리 아래 왼쪽 아파트 단지가 원미섬유 자리였다.
대전동중에서. 현재의 대전‘화’병원 자리.
응급실 왼쪽 가로 건물이 예전 교사校舍였는데 그것을 개축한 것이다.
대전동중은 동쪽의 신안동에 있었고 자취방은 서쪽의 산성동에 있었다. 자취방은 금산과 경계가 맞닿은 지역에 있었는데 그 곳은 대전으로 치면 서남부 끄트머리였다. 간판 있는 가게가 하나도 없었고 대부분 밭이었으며 가까이에 갱생원이 있었다. 그 당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허름하고 외진 곳에 겨우 방 하나 얻을 수밖에 없었으며 작은 기름 화로(곤로)와 양은솥만이 자취 살림의 전부였다. 학교에 갈 때는 아침 시간에 다니는 버스를 탔지만, 돌아올 때는 차비를 아낀다고 걸어왔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대전 중심부를 가로질러 오다가 유등천을 만나면 천변길에 접어 들어 하염없이 남쪽으로 걸어내려왔다. 도마교와 철길 사이 유등천 건너편에 원미섬유가 있었다.
그의 첫 시집에는 고향을 다룬 시가 제법 들어 있는데 궁벽한 농촌의 삶의 아픔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었다. 그에게는 고향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감이 컸다. 두 학급뿐이었던 회남초등학교에 서 중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졸업하면 곧바로 농사를 거들거나 양복점 시다를 하거나 공장으로 가거나 식모살이를 떠났다. 좋아하던 동급 여학생은 중학교 2학년까지만 다니다 그만두고 동네 언니를 따라 대전에 있는 원미섬유라는 방직 회사에 다녔는데 꼬챙이처럼 말라 이 년 만에 집에 돌아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독성 화학물질이 많은 작업 환경에 제대로 된 보호 장비도 없이 노출되었을 테니 중독에 의한 죽음이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 공장이 자취방 근처 유등천 천변 너머에 있었다. 주말에 고향집에 갈 때면 같은 버스를 타고 가기도 하고 간간이 소설책을 빌려주면서 아련한 첫사랑의 감정을 품었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컸다.
5학년 2반 여자아이네 교실 오른쪽 벽
기억하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슬픈 눈 사내아이 뒷짐 지고 하늘을 보던 액자 하나.
금모래 뜰 갈잎 숲으로 나를 불러 나도 그림 속으로 좇아 들어가 뒷짐 지면, 슬프게 하늘 보면, 강물 소리도 날 따라와 저희 엄마 누나 생각 얼굴 흐려져 차라리 눈 감고 흐르데.
— 「5학년 2반 교실에서」 부분
이 시는 그녀의 죽음이 각인된 상태에서 과거의 좋았던 한때,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소월의 시가 적히고 그 바탕이나 옆에 아련하게 강변을 마주 보고 뒷짐 진 소년과 그 앞으로 강변의 평화로운 풍경과 푸른 하늘이 펼쳐진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 소년의 슬픈 눈망울과 아련한 그리움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시인은 그 소년에 이입되면서 어렴풋한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런 마음도 몰라 주고 이 세상을 떠난 소녀에 대한 안타까움을 애타는 목소리로 부르며 몸부림친다.
그가 처음으로 가슴 깊이 새기게 된 시는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접한 주요한의 시 「빗소리」였다. 비 오는 어두운 봄밤의 고요함과 가슴이 일렁이는 기쁨을 담은 이 시에서 시인은 알 수 없는 서러움을 감득한다.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라는 첫 구절이 강렬하게 남았다. 그가 처음 쓴 시는 중학교 국어 수업 과제로 제출한 「노을」이다. 서편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에서 꺼져가는 사랑과 막막한 그리움을 비감 어린 영탄조로 쓴 시였다. 국어 교사였던 김종두 선생께서는 다른 반을 돌아다니면서 이 시를 칭찬하며 낭송을 시키셨다. 선생께서 이 시를 중고생 문예 현상 공모전에 출품하셨고 시인이 장려상을 받게 되면서 일약 ‘시 잘 쓰는 아이’로 소문이 난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서인지 대전고에 입학하기도 전인 중학교 3학년 때 대전 지역 고등학생 문학회에 스카우트(?)되었다. 조금 일찍 문명을 얻은 탓에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고 동급생들보다 빨리 입회해 선배 노릇을 하기도 했다.
약방을 하던 아버지가 어쩌다 빚에 몰려 하숙비도 못 내는 처지에 몰려 우울하던 중학생 소년이 우연히 끼적거려놓은 글을 선생이 자신도 모르게 백일장에 투고해 상을 받게 된 것이 ‘글쟁이’와 연을 맺게 된 단초였다. 소문이 나서 그는 대전 지역 고등학생 문학서클에 중학교 졸업반 때 형님 누나들에게 스카웃되었다. 그 누님들 옆에 가면 가슴을 달뜨게 하는 냄새가 났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로션 냄새였다. 그 누나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 용을 써가며 시를 썼다고 했다. 그때 그가 좋아했던 세계는 미당이나 강은교, 루이제 린저와 전혜린이었다.*
*조용호,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3> 김사인의 ‘노숙’」, 《세계일보》 2010년 1월 27일. https://v.daum.net/v/20100127222219903.
대전중 출신들이 대다수였던 대전고에서 주변부에 머물렀으며 학교에 큰 애착은 없었다. 그러한 데는 시조 시인인 정훈 선생이 이끄는 머들령문학회에 나가게 된 것도 중요한 계기로 작동한다. 정훈 시인은 충남 논산 태생이며 일제강점기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가람 이병기와 정지용 시인에게 배웠고 1938년 『자오선』 창간호로 등단한 분이었다. 해방 후 박용래, 한성기 시인 등과 교유하면서 대전 문단의 틀을 다진 큰 시인이다. 대전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영호남의 선로가 만나는 바람에 급하게 만들어지고 급속도로 성장한 교통 도시였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 기반이나 중심이 없을뿐더러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모여서 토박이가 없고, 주인도 없다. 교통 편의성 때문에 상업과 유통 산업이 활발했으며, 누구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으니 다양한 개성들이 자유롭게 어울리는 분위기가 강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근본이나 구심점이 없는 유랑민 의식에서 벗어나기 힘든 도시가 대전이라는 뜻도 된다. 역사적 전통이 빈약하다 보니 문화나 예술적 기반이 약했다. 그러한 대전에서 머들령문학회는 그 지역의 중고등학생들이 문학과 예술을 접하는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다.
대전고에 있는 현정탑 앞에서.
시인은 충남대학교에서 주최한 백일장에서 교내 문학회 부원들을 제치고 상을 타기도 한다. 그 당시 문학회 동기생 중 하나가 양애경 시인이다. 시인은 이미 어느 정도 제대로 된 문학을 하고 있다는 겉멋이 들었던 터라 교내 문학회를 얕잡아 보았다. 교내 문학회가 아니라 교외 문학회를 드나드는 것을 알게 된 문학회 주임 선생님의 따가운 질책과 퇴학 협박(?)을 받고 나서는 문학회 출입을 자제하면서 공부에만 전념한다.
대전은 일제강점기 대전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였다. 역 주변에 관공서가 자리 잡았고 그 옆이 일본인 거류지였다. 그 주변에 상업 시설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중심가(옛말로 중앙통)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충남도청 등이 다 이전했지만 도청과 시청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중심가 언저리에 시외버스터미널(옛말로 차부車部)이 있었다(중구 대흥동, 지금의 대림빌딩 자리). 차 부에는 운송회사별로 번호가 붙여졌는데 대전 외곽 지역으로 가는 것이 금남여객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고향집에 갔다. 여전히 팍팍한 살림은 펴지지 않았으며 그 때까지도 빚쟁이들이 드나들어 편히 쉬거나 느긋하게 마음 붙일 수가 없었다. 주말이면 중앙시장 근처에 있는 헌책방 골목에 가서 철학 개론서들을 사서 읽었다. 그 당시 문고판으로 나온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기도 했다.
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시를 습작하면서 삶의 근본적 문제에 천착하는 철학과를 강하게 지망한다. 집안의 반대가 심할수록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74년, 그 당시 계열별 모집인 서울대 문리대 문과에 진학한다. 그때만 해도 1학년 교양 과정을 공과대학(지금의 서울과기대 자리)에서 배워야 했기에 공릉동에서 하숙을 했다. 잠깐이기는 했지만 대구에서 경북고를 졸업하고 올라온 김영현(후에 소설가가 됨)과 같은 방을 썼다. 1학년 마칠 때까지 철학과 외의 다른 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깊이 심취했었는데 막상 철학과에서 개설한 철학 개론 수업을 들어보니 논리학과 인식론을 주로 강의하던 시절이라 삶의 근본적 문제나 물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갈급한 마음에 동숭동 문리대의 철학과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지만 칸트는 너무 어려웠다. 그러던 중 대한도덕회란 학생 단체에서 주최한 구도적 삶에 관한 강연을 듣는다. 대만계의 유불선을 통합한 소수파 종교 단체였는데, 그 종파의 좌장이라고 할 수 있는 큰어른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화를 받아 여름방학 동안 금산사에서 단기 출가를 감행한다. 짧은 수련 생활이기는 했지만 마음의 중심을 잡고 대학을 그만둘 결심을 한다.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논변적인 사유보다는 구도와 고행을 통한 자기 정진이었기 때문에 철학과를 더 이상 지망하지도 않았고, 학교에 적을 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씀을 차마 부모님께 드리지는 못하고 뜬구름처럼 학교를 다니고 있던 중에 2학년 2학기에 진행되는 전공 선택 과정에서 국문과에 진학한다. 그때도 간간이 습작을 하고 있었고 그나마 잘하던 것이 문학이니 국문과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국문과 교수셨던 정한모 선생의 부름을 받아 연구실 한편에 책상 하나를 받고 조교처럼 연구실을 드나들며 공부를 한다. 그 당시 연구실에는 벽초 홍명희 연구로 박사논문을 집필 중이었던 강영주 선생도 가끔 들르셨고 조교는 권영민 선생이셨다. 김사인 시인에게 정한모 선생은 학자나 시인 이전에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가난한 형편에 지친 데다 존재론적 고민에 빠져 고달픈 나날을 보내던 시인에게 장학금을 마련해 주시면서 학교와 공부를 그만두지 못하게 한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대학신문》에 발표한 시들을 선생께서 눈여겨보신 것으로 짐작된다. 김윤식 선생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근대 문학의 흐름과 사조를 집대성하고 풍성한 자료들을 철저한 고증과 함께 체계화한 작업의 결과물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를 탐독했다. 그가 임화의 시들을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였다. 그때 영향을 많이 받은 선배로 연암 박지원 연구로 정평이 난 김명호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연구에 헌신한 학자이다. 초기 한미 관계의 자료들을 빠짐없이 다 찾아보고 그 속에서 인용된 원전들까지 비교 대조해가면서 당대 담론의 맥락을 철저하게 연구한 업적의 탁월함 뿐만 아니라 학문의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김윤식 선생을 통해서 루카치를 읽지 않았다면, 그 리고 이을호라는 당시의 가장 선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를 만나지 않았다면 국문학 연구에 매진했을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1977년 11월 18일, 그의 삶의 진로에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이른바 ‘서울대 반정부 유인물 배포 미수 사건’에 연루돼 첫 번째 징역을 살게 된 것. 74학번 동기들과 함께 구속되었는데, 구속의 발단이 된 것은 김영현이었고 뒤이어 김사인, 미학과의 김태경(전 이론과실천 대표), 철학과의 이을호(전 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가 차례로 잡혀갔다. 김태경과 이을호는 그 당시 모든 대학교에 유포된 사회과학 서적의 제작과 유통을 총괄하고 있었다. 지성사의 걸작인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To the Finland Station)』가 1960년대 『근대 정치 사상사』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도서관 한 귀퉁이에 꽂혀 있었는데, 우연찮게 찾아내 친구들과 돌려 읽으며 학습했다. 이러한 학문적 탐구의 방향 전환에는 대학 2학년 때인 1975년, 관악 캠퍼스에서 일어난 농과대학 김상진 열사의 할복 의거, 그리고 관악 캠퍼스로 옮기고 나서 첫 집회인 5월 22일 김상진 열사 장례식(속칭 오둘둘 장례 시위)에 참여했다가 교내에 진입한 경찰에 의해 잡혀간 경험이 주요하게 작동했다. 일주일간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도 없지 않았고 교련 수업 거부 투쟁에도 앞장서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구속되면서 초법적이고 반헌법적인 권력의 위압과 모순적 정치 현실을 피부로 절감하면서 유신 정권에 저항하는 투쟁 노선을 본격적으로 걷게 된다. 하지만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1977년 체포되기 전까지는 학생운동의 본진과는 거리가 먼, “자생적으로 모여 냉소하고 자학하며 실존적 고민과 결단을 한 문사文士”* 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위의 네 명은 모두 학내 유명 인사이자 쟁쟁한 논객이었다. 김영현과 김사인은 인문대 교지인 『지양止揚』의 창간 멤버였다. 무엇보다 김사인은 1977년 4월 육당-춘원의 준비론과 단재의 투쟁론을 비교하는 인문대 첫 학술대회의 사회를 보면서 본격적으로 공개 무대에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이때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학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단재의 투쟁론의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조명을 받으면서, 거기에 깃든 사회주의 사상이 공식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이로써 그는 학생운동계에서 요주의 인물이 된다. 그는 그것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길은 아니었다고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이 학술대회를 계기로 김태경, 이을호와 맺어진다.
*신동호, 「[긴조 9호세대 비화](38) 펜은 칼보다 강하다」, 『주간경향』 2004년 10월 8일. https://v.daum.net/v/20041008023953837....
교내에 상주하는 정보과 형사들과 안기부 요원들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어떤 형태의 시위든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여름방학 동안 침체된 투쟁의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유신 체제의 문제를 비판하는 선언문을 작성하고 그것을 발표하고 유포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그러던 차에 2학기가 시작되고 사회대에서 진행된 학술대회가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준비하던 동맹 휴학을 촉구하는 유인물의 배포 계획은 보류되었고 다른 차원의 투쟁을 준비해야 하는 난감한 처지에 놓인다.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김영현이 후배들과 일을 도모하겠다며 이을호가 보관하고 있던 등사판과 유인물을 숨겨서 교내를 빠져나가던 중에 체포된다. 제대로 된 시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계획과 모의만으로 이 네 사람은 수감되고 학교에서 제적된다. 정한모 선생의 수제자로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던 김사인, 인문대 수석 졸업을 앞두고 있던 이을호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어의 신세가 된다. 정한모 선생께서 어떤 낌새를 눈치채셨는지 차비를 주시면서 지방으로 피신하라는 말씀에 해남으로 내려갔다가 고향집에 와서 체포된다. 정한모 선생께서는 본인이 고향집에 내려가라고 한 것 때문에 체포되었다는 생각에 구치소에 면회를 오셔 서는 자책감에 우셨다. 그는 세 번 투옥됐고 자주 수배를 피해 잠행을 해야만 했는데 공교롭게도 매번 체포된 장소는 고향집 아버지 앞에서였다. 너무나 안타까운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시인의 내면에는 학자의 길과 실천적 투쟁의 길이 통합되거나 극복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연구 중심의 학풍이 철저했던 국문과에서 선뜻 창작을 한다고 내세울 수도 없었다. 그는 몰래, 그것도 밤에 혼자 있을 때 시를 썼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에 입학해보니 그때까지 이름도 못 들어본 김수영과 신동엽을 좋아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자신이 좋아했던 미당, 강은교, 황동규의 시들은 소부르주아적이고 퇴폐적인 것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자신이 그 전까지 좇았던 심미적인 것과 정치적 현실에 비판적인 저항운동은 결합될 수 없었다. 그는 밤늦게까지 정치적 모순과 노동 문제 등 시대적 화두와 씨름하면서 투쟁의 방향성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고 나서 집에 돌아와 마음에서 우러나는 곱고 여린 시들을 썼다. ‘머리’와 ‘가슴’이 안 맞아서 괴로운 시절이었다.
‘여기’란 당연히 가슴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런 분위기에서 미당의 「춘향유문」이 좋다고 지껄이면 완전히 보수반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술을 먹고 붓 가는 대로 쓰고 나서 아침에 보면 그건 ‘옳지 않은’ 시였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작심하고 ‘옳은 시’를 써놓고 나면 이건 시가 아니라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옳고 옳지 않다는 구분에 불만을 품기에는 미 안하고 사치스러운, 급박하고 아픈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잡혀가서 매를 맞고 고향 동창들은 싸구려 미싱사로 쪽방에서 일하다 폐병에 콜록거리며 죽어가던 그런 시절이었다.*
*조용호,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3> 김사인의 ‘노숙’」, 《세계일보》 2010년 1월 27일. https://v.daum.net/v/20100127222219903..
그 당시 머리와 가슴이 파열된 상태와 내적 갈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의 등단작이 된 「시를 쓰며 1」이다.
“고급 향수 같은 불란서 영화 같은,/ 곱고도 아련한 시 쓰고 싶어요 천진무구하고 싶어요 환장하겠어요”.
그는 이 시에서 정치적 현실에 눈감고 무도하게 잡혀간 친구들을 모른 척하고 현실 만족과 자기 안위에만 급급해서 살아가는 자세를 똥간에서 기식하는 쥐새끼의 삶에 비유한다.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현실을 없는 것처럼 치부하고 살아가다 ‘쥐새끼처럼 콱 밟혀 죽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투쟁의 현실이 막막하고 두렵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내면서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곱고 아련한 시들로는 그런 현실에 대항할 수 없다는 선명한 자각과 다짐을 담고 있다. 「새」에서도 ‘거센 바람’과 같은 억압적 현실과 그것을 뚫고 나가지는 못하고 ‘혼신의 날갯짓’으로 겨우 버텨내는 ‘아슬한 균형’에 놓여 있는 자신을 드러낸다. 닥쳐오는 거센 바람과 허공의 피막을 예리한 ‘비수’와 같은 부리로 쪼아서 뚫고 나가는 수직의 힘은 ‘죽음의 바람’ 앞에 순식간에 패대기쳐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죽음 또는 죽임의 바람에 맞서 ‘살아 건너기’ 위해서는 몸을 버릴 수밖에 없고 예민한 부리는 부러져야만 한다. ‘기어이’라는 부사로 끝맺어지는 이 시는, 몸은 버릴 수 있지만 날카로운 정신만은 놓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와 함께 그것이 끝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절망 사이의 긴장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내적 파열과 갈등 속에서 십 년 정도 제대로 시를 쓰지 못한다. 그 무렵 큰 위안을 준 것이 신경림의 『농무』였다. 신경림 시인 또한 등단 무렵에는 존재론적 고민을 담은 「갈대」와 같은 시들을 발표했지만 십 년 동안 절필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다가 「파장」 등을 발표한다. 그 십 년의 간극과 시차를 알게 되면서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아버지는 경북 선산 출신으로 정식으로 약학을 공부하신 분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원래 직장은 남선전기(한국전력공사의 전신)로 전기 기술자였다. 그 당시 시골 벽지에는 의사도 없고 약사도 없는 마을들이 많아서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임시 조치로 약을 취급할 수 있는 약포나 약종상을 운영할 수 있는 약식 자격시험이 있었는데 여기에 합격하여 약방을 차린 것이었다. 다소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성격의 아버지와 달리 보은군 회남 출신의 어머니는 조용하고 침착한 분이셨으며 자식들의 교육에 열정적이셨다. 해방 전후 무렵 대구에 있는 간호학교를 졸업하시고 회남 인근의 보건소장을 맡아 작고하실 때까지 재직하셨다. 두 분은 젊은 날에 대구에서 만나 어머니의 집 근처인 회남에 정착하셨던 것이다. 중학교 입학 무렵, 가세가 크게 기울어 중학교 진학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어머니께서 학업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밀어붙이셨다. 문학적인 기질은 아버지 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는 남선전기 노동조합의 문예반에서도 활동하셨으며, 시인이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종종 신춘문예 투고를 위 해 소설도 쓰시고 가까운 분과 합평 모임을 꾸리기도 한 문학 지망생이었다. 시인은 회남면 신곡리 약방집 둘째 아들이었다.
대청호는 충청남도 대덕군과 청원군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어진 이름이며, 대청댐으로 물길을 막아 주변의 큰 도시인 대전과 청주의 상수원으로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수몰지구에 포함된 사람들은 논농사와 밭농사로 생계를 이어나가다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수자원공사에서 이주와 정착 지원금을 주기는 했지만 다른 일자리와 집을 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1975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80년 12월에 완공되었는데, 시인은 수배와 도피 생활로 고향이 수몰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회덕에서 시작해서 회남으로 들어가는 국도는 수몰 이전만 해도 산 중턱에 해당했다. 고불고불 이어지는 국도를 쉬지 않고 삼십여 분을 달려야 회남면이 나온다. 그 당시 어부동 도선장(나루터)에서 버스길이 끊기는데 그때부터는 버스를 사각형 모양의 넓적한 거룻배에 실어 강을 건너야 회남에 닿을 수 있었다. 눈이 오기라도 하면 배가 뜨지 않아 어부동에서 산길을 한참이나 걸어야 했다.
우리는 회남대교 중간쯤에 서서 대청호를 바라보았다. 회남으로 들어가는 회남대교의 시작점(사진 오른쪽) 뒤편 멀리 보이는 움푹 들어간 곳에 도선장이 있었고 왼쪽은 사자울이었다. 초등학교 때 소풍 온 장소가 사자울 백사장이었다. 사자울은 샛여울 또는 새여울(한자로는 新灘)이 변형된 것이다.
“하루 세 차례 오후 네 시 반이 막차지만 다섯 시 넘어 와도 잘하면 탈 수 있던 금남여객/ 장마철엔 강물 불어 얼씨구나 안 가고 겨울에는 길 미끄럽다 안 가던 금남여객/ 자취생 쌀자루 김치 단지 이리저리 처박던 금남여객”.(「금남여객」)
지금의 회남면 소재지와 멀지 않은 곳에 남대문공원이 있다. 남대문리는 회인면 용곡리에 위치한 호점산성의 남문이 있던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대청호가 들어선 뒤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기념관을 조성해놓은 것이 남대문공원이다. 여기에 시인이 쓴 「수몰유래비」와 수몰탑에 적힌 시 「아이들 자라 고향을 묻거든」 이 있다.
“아이들이 자라 고향을 묻거든 이곳에 와 소리쳐 부르게 하라/ 가난했으나/ 지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답던 곳/ 솔개를, 서당평을, 사자울을 부르게 하라/ 산수골을, 어성을, 양중지를, 살목을, 바탕뫼를, 영당을, 새별을, 사당마루를, 정문거리를 소리쳐 부르게 하라”.
이제는 모두 물속으로 사라진 지명들이다. 이 시는 이어서 고향 마을을 이루는 사람과 삶의 세목들을 나지막하게 짚은 뒤, 평평하게 고른 땅에 내리던 빛의 눈부심을 남겨둔다. 고향인 영당影堂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어서 붙은 지명이며 이 지역에는 노론 계열의 학맥이 이어져 내려왔다.
회남대교에서.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았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다시 대규모 수배령이 떨어졌고 수배 때문에 시인은 고향 마을이 물속에 잠기는 것도, 집이 이사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1981년 1월쯤에 산 중턱에 새로 조성된 회남면의 집에 잠시 들렀다가 잠복하고 있던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잡혀간다. 1980년 1학기에 복학을 했지만 다시 한번 졸업을 앞둔 시점에 수배가 떨어져서 피해 다니고 있었다. 수배되면 자동으로 제적 처리가 되어야 했으나 워낙 대규모 수배령이어서 그런지 그해 여름, 학교에서 왜 졸업을 안 하고 있냐며 연락을 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신문기자가 피신 중인 시인에게 알려준다. 시인은 급하게 「이육사론」으로 졸업 논문을 써서 졸업한다. 무사히 졸업까지 했으니 수배가 풀린 거라 생각한 시인은 국문과 대학원 시험을 준비해서 수석으로 합격한다. 하지만 나중에 수배 명단과 대학원 합격자 명단을 대조한 안기부는 수배 중인 학생들을 불합격 처리한다. 앞날도 캄캄하고 속이 상해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체포되어 성북경찰서로 압송된다. 다행히 뒤늦게 잡혀서 상대적으로 고초도 덜 겪었고 징역도 오래 살지는 않았다.
생가터에서
우리는 회남면 소재지로 향했다. 회남면은 원래 회인군의 남면이라는 뜻으로 지은 지명이다. 회남면 소재지는 사담길이 지나는 곳에 있었는데 면사무소와 회남우체국, 남보은농협, 회남초등학교 등 기본적인 관공서만 있는 조그만 면이었다. 회남면을 지나 국도를 좀 더 따라가면 회인면이 나온다. 가구는 50호 정도 되어 보였는데, 처음 이주해온 원주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이미 세상을 떴고, 외지인들이 새로 지은 전원주택이 곳곳에 보였다. 보은 외곽이고 탁 트인 데여서 주말이면 인근 도시의 유랑객들이 휴양지로 찾는 곳이 되었다 한다. 간판만 남은 폐점한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버스 종점 근처의 골목으로 들어서서 50미터 정도 걸으면 시인의 생가터가 있다. 원래는 단층집이었는데 골목을 향해 약방이 자리 잡고 약방 뒤편에 가정집이 있었다. 오래전 집을 처분해 새로 산 주인이 2층으로 건물을 올렸고 지금은 폐가가 되었다. 왼쪽 옆집도 빈집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옛 회남초등학교 교문을 대문으로 해놓고 있었다. 시 「내 고향 동네」에서는 고향 마을 사람들의 신산한 삶의 내력을 풀어냈는데, 그 마지막에 자신의 집을 슬쩍 얹어놓았다.
“여섯째 집은/ 데모쟁이 대학생 아들놈 덕에 십 년은 땡겨 파싹 늙은 약방집 내외.”
산 중턱에 올라앉은 마을은 하늘과 더 가까워졌고 살림은 펴지지 않거나 더 팍팍해져
“무너지고 남은 부스러기들만 꺼칠하게 산다”.
첫 시집 『밤에 쓰는 편지』는 1987년 가을 부모님의 수연壽宴(회갑잔치)에 맞추어 낸 시집이다. 그 당시 청사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이영진 시인과 편집부의 김형수 시인의 독촉을 받기는 했지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것 때문에 힘들게 써낸 시들이어서 마음에 차지 않아 시집 출간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원고를 보기만 하겠다고 해서 김형수 시인에게 넘겼는데 편집부의 손질을 거쳐서 시집이 나온다. 강제적으로 끌려서 내기는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손에서 절대 놓지 못했을 것이다. 제목은 ‘밤에 쓰는 편지’. 연작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밤’은 시대적 어둠을 상징하며 편지는 가장 내밀한 고백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밤에만 쓸 수 있고 밤이니까 쓰는 편지라고도 읽을 수 있다. 시대의 어두운 곳에서 길어 올린 것이면서 더 깊은 어둠으로 한 걸음이라도 흘러가려는 긴장으로 가득하다. 서정시와 민중시(저항시)가 길항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합하려는 의욕 또한 없지 않다. 김지하 시인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특히 「빈 산」, 「모래내」, 「1974년 1월」 등 『창작과비평』 1975년 봄 호에 실린 절명시에 가까운 시편들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김지하의 그 시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긴장된 상황 속에서도 삶과 죽음의 넘나듦을 유장한 가락에 실어내고 핏속에 스며 있는 말과 호흡을 끌어 올려 비장하게 풀어낸 것들이었다. 이 시집에서 지배적인 이미지는 밤과 강이다. 선한 목숨들이 사정없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에서 자연물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비명을 지른다. 그 여린 목숨들의 비명과 ‘쓰거운 희망’(「밤에 쓰는 편지 1」)을 안고 흐르는 것이 이 시집이다. ‘쓰겁다’는 미각의 하나인 ‘쓰다’의 방언이기는 하지만 ‘마음에 달갑지 않고 언짢다’라는 심리적인 것도 포함한다. 표준어로 하면 ‘쓰다’와 ‘씁쓸하다’가 함께 있는 말이 ‘쓰겁다’일 것이다. 보잘것없는 희망이지만 이것마저 없다면 오늘의 고단한 삶마저도 버텨낼 수 없어 마지못해 버리지 못하는 희망이 바로 ‘쓰거운 희망’일 것이다.
“나도 한 줄기 강이어야 합니다./ 나도 큰 슬픔으로 누워/ 머리 풀고 나란히 흘러야 합니다.”(「밤에 쓰는 편지 3」) 슬픔 속의 희망, 희망 속의 슬픔만이 온전하게 슬픔과 희망을 살리는 것이다. “막연하지만 노동과 사랑이, 옳음과 아름다움이, 희망과 슬픔이 어떤 수준에건 통일되는 자리쯤에 시가 서야 한다고 더듬거려볼 뿐이다. 그것뿐이다.”(첫 시집의 「자서(自序)」)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에는 십구 년이라는 긴 시간이 가로놓인다. 원체 과작이기도 하지만 연유가 없지 않았다. 1989년 『노동해방문학』으로 구속되어 감옥에서 쓴 시들로 묶인 원고가 제법 두툼했다.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 이야기가 담긴 시들도 있었고, 체제와의 대결 의지로 고양되어 있던 시기여서 날이 서 있거나 힘이 센 시들이 많았다. 출옥하면서 그 원고 뭉치를 챙겨 나왔는데 곧바로 수배가 떨어져 잠행에 들어가 여러 곳을 전전하던 중에 잃어버린다. 시집 하나가 통째로 사산된 것이다. 기억 속의 원고 내용을 되살리려고 얼마간 애를 쓰다가 이러다 사람 망가지겠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기억으로 되살려 시를 만들어내도 그 때의 기운과 기세가 살아나지 않았다. 얼마나 낙담했던지, 시인의 말에 따르면 무릎이 꺾였다고 한다. 수배가 풀린 뒤 마음을 가다듬었고, 그러자 그동안 가지고 있던 ‘옳은 시’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얻어터질 만큼 얻어터지고 나서야 오금이 풀리면서 편안해졌고’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긴 것이다. 그 이후에 쓴 시들을 묶은 것이 2006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이다.
『가만히 좋아하는』은 가녀린 것들의 ‘외로운 떨림’, 앞서 간 것과 나중 온 것의 미묘한 만남의 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깊이에서 이루어진다.(「풍경의 깊이」) 시대의 막막한 어둠을 털고 나와 과거의 상처들과 온전하게 대면하고 바닥에 널브러지고 허물어진 몸을 껴안는다.
시인은 사노맹 사건으로 다시 수배를 받았는데, 그 당시 정보 기관인 안기부에서는 박노해 시인(박기평)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노동자 출신이 그런 시를 쓸 리 없다고 판단했다. 즉 박노해는 가공의 인물이며 김사인이 박노해라는 이름으로 시와 논평을 쓴 걸로 본 것이다. 자신이 잡히면 박노해 시인의 존재가 정확하게 알려질 수밖에 없어 잠행을 해야 했다.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노숙」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둠과 구석으로 피해 다니던 시절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을 이루었지만 제대로 생계도 돌보지 못하고 불안한 잠행을 거듭해야만 했던 현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감시에 쫓겨 잠마저도 “진땀과 악몽의 길”이다. “낯선 땅과 후미진 구석”만 찾아다니다 문득 눅눅한 요 위에 벗어놓은 헌 옷가지를 보고는 육탈(몸 벗음)의 착란이 일어난다. 자기의 몸피와 골육의 형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옷과 이불마저도 지쳐 있다. 더 이상 도망갈 힘도 피해 다닐 여력도 없는 상태에서 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저 육신만이라도 쉬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 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저 물음은 초탈에서 비롯된 허허로움이 아니라 존재의 극단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에 가깝다.
세 번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힘겹게 살아가는, 살아갔던 사람들 ‘곁’에 붙어 서서 힘주어 걸레를 짜듯 그 정수만을 길러내는 시들로 가득하다. 말의 호흡은 느리면서 경쾌하고 빠르면서 내리누른다. 곡절 없는 말들이 없고 방기放棄로 흩뿌리는 말들도 제자리에 맞춤한다. 그것은 이숭원의 말처럼 ‘구도의 연금술’이라고도 할 수 있고, 시인의 말처럼 ‘섬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섬김’의 따뜻하고 순결한 수동성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어떤 간곡함이 제 시 쓰기의 내용이자 형식이기를 소망합니다.”(「제14회 대산문학상 수상 소감」) 섬김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면 자연히 남이 높아지는 것이다. 욕심과 사사로움을 접고 자기를 낮은 곳에 두는 것, 그것이 김사인 시의 본령일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작품 활동과 별개로 그가 창간 동인이나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잡지 또한 삶의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다. 『시와경제』와 『노동해방문학』. 두 잡지 모두 지속적으로 펴내지는 못했지만 노동운동 또는 사회주의 운동과 긴밀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김사인은 동인지 『시와경제』 창간 동인으로 참여하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박노해 시인의 시가 투고 형식을 거쳐 처음으로 지면에 실린다. 김사인의 연보를 보면 등단 연도가 1981년으로 기재되기도 하고 1982년으로 적혀 있기도 한데, 이는 『시와경제』 창간호의 발행일이 1981년 12월 25일이기 때문이다. 발간 날짜가 연말이어서 그런지 1982년으로 기재된 경우가 많은데 최근에는 정확히 1981년으로 기록된다. 그가 창간 동인이 된 데는 시대적인 맥락이 있다. 유신 정권 시절 긴급조치로 수배를 당하거나 정치범으로 구속되었던 학생들이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대거 복학한다. 복학생과 재학생이 학교에 모이면서 저항운동과 시위가 거세게 일어난다. 한편으로는 복학생과 재학생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져 묘한 갈등 관계가 생기기도 했다. 그 때의 재학생들이 소위 386세대의 주축이 된다. 복학을 계기로 선배 세대인 황지우, 김정환 등과 맺어진다.
시인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 계간 『실천문학』의 편집위원 겸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했다. 1986년에 나온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도 그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원래 실천문학에서는 월간 ‘노동문학’이라는 제호로 노동자들을 위한 대중 생활문예지를 준비 중이었다.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은 생활 수기 위주인 잡지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노동문학지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은 김사인, 박노해 그리고 조정환 세 사람에 의해 당 파적 노동문학지 발간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한데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적극적인 문예운동을 펼치려는 뜻으로 시작했지만, 당 건설 운동의 일환 중 하나인 문예운동으로 끌고 가려는 다른 준비위원들과 뜻이 맞지 않았다. 김사인 시인은 문학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당 위주의 문학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노동문학상을 제정하면서」라는 노동문학상 제정 취지문은 김사인 시인이 쓴 것이다. 민족민주운동의 진일보를 문학 내에 담보하면서도 편협한 계급 이기주의나 노동자의 독선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고유한 형상적 인식의 기능과 탁월한 대중적 호소력을 갖춘 ‘가장 정당한 문학’으로서의 노동문학이 진정 그가 바란 뜻이었다. 잡지의 성격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노동문학’ 대신 ‘노동해방문학’을 제호로 삼고 조정환이 주간을 맡아 1989년 4월에 창간된다. 김사인은 제호를 ‘노동문학’으로 하고 싶었으나 실천문학사에서 월간 『노동문학』을 선점하고 있었기에 부득이하게 물러선 것이기도 하지만 편집위원회의 회의와 투표를 거쳐 결정된 사안이기에 받아들인다. 창간호의 표지를 보면 ‘문학’이라는 글자는 ‘노동해방’이라는 글자보다 작게 써졌는데 강한 이념적 지향성을 드러내려는 뜻이었다. 조정환에 따르면, 노동해방은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쓰인 것이다.* 김사인은 노동문 학사의 발행인으로 선출되었으며, 출판사를 등록할 때 ‘노동문학’을 되살린다. 노동해방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운 잡지가 문교부의 정기간행물 등록 인가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김사인은 염치 불구하고 정한모 선생을 찾아간다. 문교부 장관으로 퇴임하신 지 얼마 안 된 때라 출판국에 선처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선생께서는 “너하고 나는 참……” 하면서 말끝을 흐리셨다. 아끼던 제자가 안정적인 학문의 길을 가지 못하고 어렵고 힘든 문학의 길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그래도 내 제자이니 내가 거두어야지, 하는 마음이 교차하셨을 것이다. 잡지가 나온 뒤 바로 구속되어 몇 달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왔지만, 한두 달 뒤에 출판사에 압수수색이 들어와 두 딸과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약 이 년간을 잠적과 피신, 잠행으로 보냈다. 편집장인 임규찬 평론가는 피하지도 못하 고 체포되어 모진 고생을 겪었다. 수배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정한모 선생의 임종도 장례도 지키지 못했다. 시인은 은사의 난감한 표정과 마음에 큰 짐을 안겨드린 죄송함을 아직도 새기고 있다.
*『노동해방문학』의 창간 준비 과정과 발간 경위는 조정환, 「진보적 사회를 향한 금지된 열정: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탄생」, 『대산문화』, 2002년 하반기호(통권 7호) 참조.
생가터까지 둘러보고 나서 카페에 들러 더위를 식혔다. 8월 말 인데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날이었다. 시원한 대추차가 달착지근하게 맛있었다. 선생님은 잠시 고향 사람 한 분과 다가올 추석을 위해 벌초를 부탁하러 선영에 다녀오셨다. 날도 어둑해지기 시작하고 서대전역에서 전주로 가는 막차 시간도 맞춰야 해서 다시 대전으로 가는 국도에 올랐다. 마음에 걸리는 남은 과업이 있는지 여쭤보니 예전 창비에서 진행한 팟캐스트 라디오 <김사인의 시시詩詩한 다방> 원고를 책으로 묶는 작업을 마무리할 생각이라고 하신다. 그 당시 내가 자료 조사 겸 보조 작가로 선생님을 도와드렸었는데, 녹취한 내용을 책의 편집 체제에 맞게 다듬고 교정까지 마무리했지만 지금껏 미루고 계신 것이다. 신채호부터 신동엽까지, 근현대 시사의 주요 시인들을 망라한 이 팟캐스트는 그 당시의 시대적 맥락과 시인이 살아온 내력을 잘 결합하여 시인의 시 세계를 평론가가 아니라 시인의 눈으로 들여다본, 그래서 학술서와 교양서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 좋은 책이 될 터였다. 멀리서 미력이나마 보태면서 선생님 나름의 박사논문을 집필하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혼신을 들여 시를 선별하고 낭독도 하셨던 것을 눈앞에서 뵈었다. 올해나 내년쯤엔 꼭 책을 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생님은 대전으로 가는 국도에서는 크게 말씀이 없으셨다. 대낮에 그토록 빛나던 윤슬들이 잦아들고 호수는 콜타르처럼 끈적한 감청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저 물속에 선생님의 고향 마을과 집과 골목과 사람들이 잠들어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에 물이 들어찬 듯 먹먹했다.
김사인
1981년 『시와경제』 창간 동인으로 데뷔. 시집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냈다. 신동엽창작기금,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심장보다 높이』를 냈다. 신동엽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유심상 등 수상.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