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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겨울] 내 마음의 시 한 편 - 최종태 조각가의 작업실에는 열두 빛깔의 무지개가 뜬다

20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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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태 조각가의 작업실에는 열두 빛깔의 무지개가 뜬다

신달자



우리는 선생님 댁 대문 앞에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 오 분이 지나면서 대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밖으로 나오셨다.


“아유, 선생님.”


우리 인사는 대문 밖에서 시작되었고 한 사람이 왔고 우리는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나의 내면에 눈 감고 있는 의식들이 후다닥 깨어나는 감동이 최종태 선생님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였지만 선생님의 이야기는 깊고 진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뜰에는 한국을 대표할 만한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압도적이다. 멋지다. 그 중간에 선생님의 조각이 서 있다. 소나무 사이의 조각은 파란 하늘을 이고 소나무를 거느린 채 서 있었다. 그 순간, 이 조각 하나가 이 나라를, 이 세계를, 이 우주를 거느리고 서 있다는 생각을 했다. 느낌이 그렇다. 소나무 하늘 위에는 열두 색의 무지개가 떠 있는 듯했다. 

아름답다. 그 앞에 서 계신 선생님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아, 젊으시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나무 때문일까. 머리는 하얗게 백발이었는데 얼굴에서는 젊음이 느껴졌다. 아마도 집중하시는 창작 정신 때문은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어쩌면 신성한 염원을 불어넣는 작품 때문은 아닐까. 집 내부에도 선생님의 작품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탁자 앞에 마주 앉았다. 책장에서 백제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석조불상 이미지를 담은 책들이 언뜻 보였다.


9월 4일 포스코에서 전시회가 있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진심어린 말씀들을 해주셨다. 시인과의 대담이어서일까. 문학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어려서부터 문학이 좋았어요. 세계문학, 한국문학을 모두 읽었어요.”


그랬을 것이다. 미술의 근본적인 것은 정신의 감각으로부터 시작될 테니까. 문학이 먼저 선생님의 예술 감각을 깨우고 미술이 그 감각을 한층 끌어올리며 방향을 잡게 되었을 것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소월의 <진달래꽃>을 좋아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물었다.


“좋아하시는 시는?”


선생님은 바로 종이 위에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쓰셨다. 그리고 두어 줄 시를 낭송하기도 하셨다. 시가 잘 어울리는, 아니 예술이 온몸에 흐르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책을 읽다가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를 낭송하시며 즐기는 모습을 떠올렸다. 선생님의 조각 그 안에 시가 흐르는 것을 나는 직감했다. 선생님의 책 『최종태, 그리며 살았다』를 보면 시인들의 이름들이 나온다. 서정주, 김소월, 김영랑, 박용래, 릴케 등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다. 선생님의 조각에는 시의 힘이 들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1932년에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 본 대학에서 교수직을 하시다 1998년에 퇴직. 지금까지 선생님의 여정을 글로 다 쓰기는 어려울 것 같다. 너무 많은 조각전, 소묘전, 파스텔화전, 목판화전, 유리화전. 국내외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초대전, 회고전을 열었다.


최종태 조각가. 1932년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다. 195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조각 활동을 시작, 1960년 <서 있는 여인>으로 국전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조각계에 이름을 알린 후 한국 교회미술의 현대화와 토착화에 크게 기여해왔다. 2005년 대전시립미술관 초대전,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을 열었다. 서울시문화상, 충청남도문화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 수상. 2008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 민국예술원 회원, 김종영미술관 관장이다. 지은 책으로 『예술가와 역사의식』, 『형태 를 찾아서』, 『나의 미술, 아름다움을 향한 사색』, 『산다는 것 그린다는 것』, 『한 예술 가의 회상, 나의 스승 김종영을 추억하며』, 『장욱진, 나는 심플하다』. 『최종태, 그리 며 살았다』 등이 있다.


“선생님 조각의 가장 핵심적인 이미지는 무엇일까요?”


“좋은 인간, 그 핵심의 이미지를 성모상에서 찾았어요.”


성모상으로부터 성모상까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성모상에서 성모상까지는 너무 멀다. 그 먼 거리를 숨차게, 그리고 나직하게 걸어오신 분이 최종태 선생님이다.

미술사가 김영호 선생은 말한다. “최종태 조각을 특징 지우는 ‘간결한 선과 단순한 형상의 미의식’은 불교와 가톨릭 사이의 융합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왔고, ‘간결한 선과 단순한 형상의 미의식’은 <반가사유상>과 <석조미륵불상>을 태동시킨 선조들의 미의식이 이유”라고. 그리고 “1966년 혜화동 성모상과 2000년 길상사에 설치된 <관음보살상>은 작가의 불이不二사상이 두 종교의 성상을 통해 구현된 대표작들”이라고 했다. 백번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두 사람. 1976. 대리석.
Two People. Marble.
49X23X16.2cm.





기도하는 사람. 2012. 나무에 채색.
Virgin Mary. Color on Wood.
114X23.5X27.5cm.


선생님의 작품은 불교와 가톨릭의 오묘한 결합으로 김을 뿜어내며 복잡한 세상을 단순성과 고결함으로 가로질러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문일까. 선생님은 좌우명 같은 예술의 정신을 강조하신다.


오염이 없는 것.

깨끗한 것.

자유.


선생님은 1990년대 가톨릭협회 회장을 지내시면서 김수환 추기경님, 장익 신부님, 법정스님과 자주 교류하면서 성당의 14처와 성모상에 대해, 앞으로의 교회미술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셨다. 성당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하겠느냐? 서로 미래 선언을 하시며 교회 건축, 조각 미술을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삼 년의 활동 기간 동안 김 추기경님과 장익 신부님은 거의 참석하시며 격려했고 좋아하셨다. 회장으로서 너무 고마웠다고 하셨다. 그리고 한국 미술의 토착화를 김 추기경님, 장익 신부님, 최종태 선생님이 이루었다는 자부심도 컸다. 김 추기경님과 장익 신부님은 잘 맞았다. 인천 소재 사르트르 피정의 집 수녀원은 무려 십 년에 걸쳐 완성하셨다. 최 선생님의 최선의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했다. 

제1처에 예수의 이마에 월계잎을 붙인 게 특이했다. 가시관을 지우고 월계잎을 놓으니 김 추기경님이 감탄하셨다. ‘승리가 예고된 사형수’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나는 가슴이 뛰고 뭉클했다. 눈시울이 축축하면서 저릿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유효한 말씀이다.


내 작품은? 선배님들의 작품은? 일제강점기 35년간 민족의식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민족의식을 찾았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위기에서 생명력을 구했다는 뿌듯함으로 미래를 바라보셨을 것이다. 김 추기경님과 길상사에도 자주 가셨다. 법정스님과도 교류를 이어갔다. 모두 스승이면서 친구였다. 판단력, 정직, 부지런함 속에서 깨달았다. 선생님은 그때를 분명히 기억하셨다.

책을 많이 읽으셨다. 국립도서관에서 미술 철학을 읽기도 했다. 불교 책은 한문이라 덮어버리고 퇴계로에서 ‘한국불교 사상 대강좌’ 포스터를 보고 조계사로 갔는데, 유진오 선생 같은 분들도 거기 오셨다. 금강경까지 강의를 듣고 대학 4학년 때 「불교 사상론」이라는 논문도 썼다고 하신다.

그 후 중국의 최백석 화가, 이가염 화가와 교류를 트고 미술 방향을 논의하며 한국인의 만년이 푸르게 보이는 듯했다고 하셨다.

화가는 노년을 봐야 한다. 88이 되니 세계 미술의 자유가 느껴졌다. 그것은 내면의 의식의 계곡물이 세차게 흐른다는 뜻일 것이다.


“내 마음대로 그린다.”

“90이 되니 일이 즐겁다.”


선생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지고 나는 경청하며 계속 놀란다. 유희삼매遊戱三昧라 했다. 고통 없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린다. 그래서 젊다고도 하신다. 일 안 하면 더 아프다고도 하신다. 그러니 나이가 중요하다고 하시며 밝게 웃으신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기도 했다.


1985년도 파리에서 전람회를 열었을 때, 선생님 방으로 사람들이 들면서 그들이 말했다.


“당신 작품엔 슬픔이 있다.”


예술에 슬픔이 비친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슬픔’이야말로 작가들이 만들어내야만 하는 ‘공감’의 밥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나는 했다. 그런데…….


“그런데 90 넘어 지금은 그냥 그려도 미소가 있어요.”


선생님은 종이에 원을 그리며 여자를 그렸다. 간단명료한 동그라미이고 한 줄 눈썹 선인데 이상하게도 미소가 번지는 것이었다. 이것 또한 기적이 아니겠는가. 기쁨과 즐거움이 솟는 신神과의 대화라고 선생님은 단정하신다. 그러니 50에는 ‘모른다는 것’, 80에는 ‘자유’를, 90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신이 함께하는 것이 저절로 전해져왔다.

그런데 ‘슬픔’에 힘을 주다가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 그렇다. 미소’라고 나는 무릎을 쳤다. 그렇다. 슬픔을 고요히 흐르게 하고 미소를 번져가게 하는 그 일이야말로 작가의 몫이지않겠는가. 나는 선생님의 얼굴에 흐르는 미소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작품은 여성이 대부분이다. 마주하며 이야기를 듣는 내 옆에도 조각상은 여성들이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여쭙자는 태도로 말했다.


“모두 여성이에요.”


“『파우스트』의 마지막 장면에도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높은곳으로 구원한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그때 옆에 계시던 사모님이 “어머니일 수도 있어요”라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선생님은 다시 ‘가장 영원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셨다. 스승이신 장욱진 선생님도, 김종영 선생님도 ‘신과의 대화’를 역설했던 것이다. 아마도 스승의 마음 눈빛을 몸으로, 정신으로 받아들이신 것일 테다.  선생님은 『장욱진, 나는 심플하다』라는 스승에 대한 책도 쓰셨다. 그 책을 읽고 자탄도 했다. 나는 도무지 스승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최종태 선생님에게 가장 잊지 못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경험이 있다. 쉰 살 때였다. 조각가로서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셨을 그런 시간에 여러 가지 일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지만 그러나 이것 하나는 미래와 삶을 향해 ‘타아악’ 소리를 치는 것 같은 강력한 경험이다. 고요한 일상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려는 찰나 천둥 번개 소리, 벼락 치는 소리가 두 귀를 흔들었다.


“조각은 모르는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눈을 감고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 이것은 하늘이 천둥 벼락 소리로 선생님에게 귓속말을 하셨던 것이다. 길을 열어주신 것 아닐까. ‘지구 안에 조각가로 네가 길을 열어보거라. 너는 할 수 있다.’ 그런 메시지는 아닐까.

바울은 빛을 보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귀가 아니라 머리로 들었을 것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아직도 그 순간의 떨림을 두 손에, 마음에 간직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상의 기회를 주려고 애쓰셨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른다’, ‘도道는 도道가 아니다.’ 선생님은, 예술은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어떠한 위대한 힘에 의해서 조종될지도 모른다는, 말하자면 인간의 지적인 계산을 초월하여 잴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 상상을 넘어 직관으로도 닿지 않는 초월적 세계로 가야 한다는 귀한 말씀은 예술인으로서 가슴에 늘 살아 있어야 할 것 같다.


선생님의 작품은 하늘 아래 살아 있지만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는 기증된 조각, 회화, 판화가 망라되어 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는 교황청 공식 국제 순례지이자 한국 최대 순교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 박물관은 종교적 진리의 보편성을 가톨릭의 교리 안에서 수용하면서 복합문화 공간의 기능을 하고 있는 곳이다. 선생님은 무려 157점을 기증 전시했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가톨릭, 불교를 포함해 모든 사상을 가톨릭 교리 안에서 수용하면서 복합문화 공간으로 기능을 하고 있다.


선생님을 뵌 것은 감사한 일이다. 선생님을 이해하는 데 단추 하나만큼이나 될까. 나의 감사한 생각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기도일 것이다. 선생님, 더 건강하십시오.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여성은?”


“제 작품 속에 있잖아요.”



신달자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을 통해 데뷔.

『열애』, 『종이』,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등 다수의 시집을 냈으며,

묵상집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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