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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겨울] 다시 읽는 무산 시 '산창을 열면'

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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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의 깨달음과 시의 위상


이 시의 첫머리에 나오는 『화엄경』은 불교 경전 중 가장 방대하고 어려운 것이다. 이 경전에 담긴 핵심적인 요지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인과 연기의 관 계로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어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인데 표면적으로 다양한 현상이 펼쳐진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마음의 작용이다. 그래서 모든 현상이 마음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사실(一切唯心造)을 알면 진리를 알게 된다고 가르친다. 나와 세계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세상은 조화로움으로 가득한 웅대한 나무(菩提樹)라고 할 수 있다. 이 우주 공동체를 불교에서는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화엄 세상이라고 비유하여 말한다.


이 시는 화엄 세상이 산중에 이미 다 펼쳐져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새들의 날갯짓과 울음소리가 화엄의 형색이요, 풀잎과 풀벌레와 짐승들의 움직임이 모두 화엄의 어울림이다. 그야말로 “산색은 그대로가 법신/ 물소리는 그대로가 설법”의 경지다. 자연의 모든 소리와 빛깔과 움직임이 화엄 세상의 실상을 다 드러내고 있다면, 『화엄경』을 따로 읽을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화엄 세상을 만나면 된다. 화엄 세상을 드러내는 것이 어찌 자연뿐이겠는가? 처처재불 處處在佛 이라 했으니 뭇 중생이 몸 굴리고 사는 세상 어디든 진여 眞如 의 경지 아닌 데가 없다.


선의 관점으로 보면 참구와 수행을 통해 이러한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면 여기서 멈추면 되지 시는 왜 쓰는가? 보통 사람의 언어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아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면 대중들도 그 길에 쉽게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승 보살의 자비행이다. 다음 작품은 위의 작품을 더욱 요약적으로 압축해서 환골탈태했다.


밤늦도록 불경을 보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론 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 「파도」 전문


화자는 밤에 불경을 읽고 세상의 움직임을 묵상하며 그 안에 담겨 있는 진리의 정수를 얻으려고 정진하고 있다. 탐구를 철저히 수행했을 때 얻게 되는 것은 모든 경전과 논설이 결국은 “바람에 이는 파도”에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천경 만론이 집착하지 말아야 할 하나의 뗏목이라는 가르침도 되고, 그 모든 교설이 바람과 파도로 표상되는 자연의 본체에 부합한다는 뜻도 된다. 어떤 오묘한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는 이 세계에 깨달음이 있다. 이 현상 속에 바로 진리가 있는 것이다. “바람 이는 파도”가 바로 경전이고 법문이다. 바람 이는 파도가 경전이고 법문이라면 선의 깨달음과 시의 깨달음도 둘이 아니다. 시와 선은 인간의 마음을 다룬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우리는 설악무산 선사가 수행의 담론과 그 가르침을 시로 펼쳐낸 이유를 여기서 확연히 깨닫게 된다. 그것은 대승적 보살행의 실천이었다.




이숭원

1986년 『한국문학』으로 데뷔. 『탐미의 윤리』, 『김종삼의 시를 찾아서』, 『시 읽는 마음』, 『백석 시, 백 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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