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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겨울] 시인의 뿌리를 찾아서 - 정끝별 편

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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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둥근 힘, 정끝별 편

신철규


정끝별은 보기 드문 이름을 가진 시인이다. 굳이 한자로 의역하자면 終星이 되겠으나 음역하기에는 끝이라는 발음을 가진 한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그녀의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것인데, 아마도 막내딸이어서 고심 끝에 지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끝별’이라는 시인의 이름은 ‘끝’과 ‘별’이라는 외마디 글자들이 합쳐진 순한글 이름이다. 그녀는 이 이름을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한다. 끝에 이른 별, 또는 마지막 별. 끝과 별은 이 세상에 있지만 다다를 수 없는 것이고 아련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마음이 끝까지 뻗어 별에 이르다 또는 별이 되다, 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마음을 뻗는 것이 시가 아닐까. 이 독특한 이름 때문에 어린 시절 놀림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운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자신의 이름과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8월 말, 아직도 숨이 턱턱 막힐 것처럼 무더운 날에 나주에서 시인을 만났다. 금라헌 뒤편의 한옥 숙박 시설에 묵고 있는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아침부터 부산하게 옷매무새를 단장하고 머리를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설레고 들뜬 표정이 역력했다. 아버지는 십오 년 전, 어머니는 일 년 전에 작고하셨는데,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을 거라 생각되는 고향집과 그 주변을 성묘하는 마음으로 둘러 보았다고 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난 뒤 이미 남의 집이 되어버린 고향집을 찾은 적이 한 번 있다.


포크레인도 차마 무너뜨리지 못한/ 폐허肺虛에 동백 한 그루/ 화단 모퉁이에 서른의 아버지가/ 우리들 탯줄을 거름 삼아 심으셨던/동백 한 그루 아니었으면 지나칠 뻔했지 옛집/ 영산포 남교동 향미네 쌀집 뒤 먹기와 위로/ 높이 솟았던 굴뚝 벽돌 뿌리와 나란히/ 빗물이며 미꾸라지 가두어둔 물항아리 묻혀 있었지/ 어린 오빠들과 동백 한 그루 곁에서/ 해당화 박태기꽃 함박꽃 알록달록 물들다/담을 넘던 이마에는 흉터가 포도 넝쿨처럼 뻗기도 했지/ 동백 한 그루 너머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버지 밥상 내던지셨지 그릇들 깨졌지 아버지 서재 오래 비어 있었지/ 영산포 이창동 소방 도로 되기직전/ 포크레인이 아버지 대들보를 밀어붙이고/ 콜타르와 시멘트가 파헤쳐진 아버지를 봉인해 버리기 직전/ 탯줄 끝에 손톱만 한 열매를 붙잡고/ 봄볕에 자글자글 속 끓이고 있었지 동백 한 그루/ 오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가까스로 서 있었지/ 나 쉬하던 뿌리쪽으로 고개를 수구首邱린 채

— 「동백 한 그루」, 『삼천갑자 복사빛』(민음사, 2005)


마지막까지 집터를 지키던 동백나무도, 그 집을 정성스럽게 가꾸었던 아버지도, 오빠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기억과 어린날의 흉터도 이제는 모두 사라지면서 아물어가지만 마음의 나침반은 그 돌아갈 수 없는 집을 향한 채 그대로 멈춰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고향을 떠나오면서 “강 건너 두고 온 집”(「노량진 본동」, 『자작나무 내 인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금라헌에서.


시인은 1964년 전남 나주에서 4남 2녀의 막내딸, 그것도 다른 형제들과 터울이 조금은 있는 늦둥이로 태어났다. 태어난 날은 12월 31일, 태어나고 하루 지나 두 살이 되었다. 초등학교 2~3학년 때 크게 앓았는데 홍역과 원인 모를 열병이 지나갔다. 소아마비에 걸렸던 것인지 한동안 걷기도 힘들어 등에 업혀 다녔던 적도 있다. 병약해서인지 냄새에 예민했다. 다른 집에 가면 우선 낯선 냄새 때문에 거부감이 들고 무서웠다.


시인의 첫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은 「십일월」 연작이 그 중심에 놓이는 것으로 보인다. 겨울과 저녁을 배경으로 한 시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시인은 음력 생일이 11월 28일이기도 하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한 해의 마지막 바로 앞에 있는 달이어서 11월을 좋아한다고 한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굳건한 나무처럼 서 있던 “기억의 척추”(「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1」)에서 “불운한 기억”(「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2」)을 읽어낸다. 첫 시집은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흡반처럼 들러붙는 기억들과 과거와의 지난한 화해를 담고 있다.


시인의 생가를 찾아가기에 앞서 우리는 오일장으로 향했다. 지금의 오일장 자리는 예전 자리에서 옮긴 것이지만 근처에 영산포역이 있어 그곳을 먼저 들르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한낮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을 때 들른 시장은 이미 상점마다 좌판을 거의 거두어들이고 장사를 접은 상태였다. 수산물 위주인 시장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8월 말까지도 기승을 부리는 더위 때문인지 오후 한 시가 좀 넘었을 뿐인데도 그랬다. 시인은 그때 그 시장은 아니지만 오래전 기억 속에 있는 어물전들을 눈으로 더듬었다. 우리는 오일장 풍경을 훑어본 뒤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예전 오일장 거리로 향했다. 예전 오일장은 영산포 선창 뒤편 지금의 홍어거리 입구를 지나 영산포역사갤러리부터 굴다리가 있는 곳까지였다. 식당과 가구점 등 단층의 낮은 상점들이 양쪽으로 있는 좁은 골목이었다. 그녀는 여름 한낮, 이 시장 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린 기억을 강렬하게 간직하고 있다. 짙은 그늘에 휩싸인 성모 마리아상과 검은 옷자락에 싸여 있던 수녀들, 잿빛 장삼을 걸치고 민머리를 한 사람들이 시인의 눈에는 무섭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때 들렸던 〈아모레 미오〉라는 노래는 어질병처럼 뇌리에 박혀 있다. 영산포역사갤러리에 들러 땀을 식히면서 시인의 삶과 시의 내력을 좀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예전 오일장 골목에서.


단층 목조 가옥을 배경으로.


아버지는 호랑이띠 1926년생이시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큰아들 또한 가산을 돌보지 않아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의 본적은 영암이며, 180센티미터가량의 장신에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다니는 인텔리였다. 만주에서 교원 양성 자격증을 취득하고 해방과 함께 고향인 영암으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의 교육부인 학무과에서 근무했고 교직에도 몸담았으며 잠깐이나마 우체국장 일을 보기도 했다. 1950년대 초반 아버지가 스물일곱 살 무렵, 어머니가 스무 살 무렵에 두 분은 혼례를 올렸다. 신혼 초반에 삼 년 정도 나주시 다시면에서 살았는데, 그때 큰오빠가 태어났고 그 이후의 자녀들은 시인의 본가가 되는 나주  영산포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태어나는 자녀들의 탯줄을 집 마당에 있는 화단에 묻었다. 아버지는 집을 가꾸는 데 열심이었다.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는 부모님의 삼십 대와 사십 대의 삶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었다.


영산포에 터를 잡으면서 아버지는 사업을 시작했다. 정확하게 무슨 사업을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른 집과 달리 유리그릇이나 실험도구로 쓰이는 비커 같은 게 있었던 걸로 봐서 유리 제품을 납품하는 사업을 하지 않았을까 시인은 짐작한다. 다이알 재봉틀이 두어 대 남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재봉틀 수입 사업도 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영산포는 우시장과 어시장이 컸기에 현금이 많이 도는 곳이었다. 우시장이 열리면 투전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큰돈이 오가기도 했다. 사업이 기울 때 아버지도 금전적인 손해를 메워볼 속셈으로 도박판에 잠깐 끼기도 했는데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어머니와 크게 다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시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사업이 악화되면서 가세가 기울었던 듯하다.

영산포 선창에서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우리는 잠시 숨을 돌린 뒤 오일장터에서 멀지 않은 영산강 나루터로 향했다. 먼저 얼핏 등대처럼 보이는 수위 계측탑이 눈에 들어왔다. 시인의 어린 시절만 해도 포구에 배가 들어왔다. 목조가건물로 가득한 어시장은 비린내가 진동했는데, 강물이 범람하면 나주시 전체에 비린내가 떠다녔다. 유독 냄새에 예민했던 시인은 그 근처만 가도 어질병이 나고 묘한 두려움이 생기곤 했다.

지금은 어시장은 없어지고 관광객들이 과거를 체험해볼 수 있도록 예전의 황포 돛배를 재현한 유람선이 다니고 있다. 선창 옆에 영산교가 있었고 영산교를 건너면 지금은 폐역이 된 영산포역이 나왔다. 영산포역은 시인이 나주를 떠나기 전까지 시인에게 세계의 끝이었다. 방학이 되면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서 유학하다가 내려오는 오빠들을 마중하러 나갔다. 그녀는 나주를 떠나기 전까지 기차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그녀가 처음 영산포역에서 기차를 탄 것이 영산포와의 마지막 작별이 되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오빠들이 서울로 돌아갈 때면 시인은 플랫폼까지 나와 까치발을 들고 손을 흔들며 오빠들을 배웅했다.

어린 시절 오빠들을 마중하러 나갔던 영산포역.


우리는 시인이 다녔던 영산포초등학교를 둘러보고 도로 맞은편에 있는 생가터로 향했다. 골목 초입에 있던 우시장 자리에는 축협이 들어서 있다. 축협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예전 집터가 나온다. 집 근처 네거리에는 극장, 초등학교와 중학교, 이발소와 정미소가 있었다. 그 당시 정미소는 이름도 없이 창고처럼 허름한 외관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방앗간이 자리했다. 네거리에 있어서 사람들은 네거리정미소라고 불렀다. 집 뒤편에는 당골네 무당집이 있었고 집 앞으로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생가의 대문 쪽 텃밭 자리에는 주택이 들어섰고 본채와 별채가 있던 자리는 소방 도로로 편입되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지금의 현주소는 이창동 73-26번지. 지금 살고 계신 어르신도 작고하신 아버님 이름뿐만 아니라 아들이 많은 집으로 기억한다고 말씀하셨다. 집의 입구에 큰 대문이 있었고 그 앞으로 도랑이 흘렀다. 큰물이 지면 그 도랑물이 범람할 때 미꾸라지들이 한가득 떠내려왔는데 막내 오빠와 대바구니로 떠서 잡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도랑은 복개되기는 했지만 흔적은 남아 있었다. 뒤뜰 끝에 서 있던 감나무를 발견한 시인은 그때부터 집터를 생생하게 그려내기 시작했다. 안방과 마루, 중문, 화단 자리까지 구체적으로 기억해냈다. 마루를 건너 안방으로 걸어오던 아버지가, 뒤뜰 장독대와 부엌을 오가는 어머니도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시인이 다녔던 영산포초등학교 교정에서.


좌우가 뒤바뀐 ㄷ자형의 먹기와집이었다. 시인은 여름날 시원한 그늘이 지던 마루 위에서 몽상했던 일과 겨울이면 처마에 가지런히 매달려 있던 고드름을 기억했다. 지금 주택이 들어서 있는 옛 텃밭 자리 집의 앞마당과 같았는데, 거기가 남도의 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이었다. 겨울에도 그 자리만은 따스해서 볕살을 받으며 졸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마룻바닥이었던 아버지 서재에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듯한 철제 스프링 침대가 있었다. 우시장이 서는 날이면 그 침대를 트램펄린 삼아 뛰면서 담장 너머 우물 근처에서 소에게 물을 먹이는 사람들을 보곤 했다.

어릴 적 옛집, 지금은 없다. 소방 도로가 되어 집터조차 없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서 그 옛집은 잃어버린 낙원이다. ㄱ자형 본채에 아래채가 붙어 ㄱ자형을 이룬 스무 칸쯤 되었던 집. 동백꽃·매화꽃·해당화꽃·함박꽃·박태기나무꽃 따위를 화단에 품고 있던 집. 눈이 쌓이고 봄볕이 내리쬐고 가을바람에 사르륵사르륵 소리를 내던 화단 한쪽으로 적갈색 굴뚝이 높이 솟아 있던 집. 앞에는 ‘학훈당學訓堂’, 뒤에는 ‘진실한 언행 꾸준한 피땀’이라는 아버지 친필이 새겨진 비석이 굴뚝 아래 서 있었던 집. 먹기와 골골이 주렴처럼 비가 내리고,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던 마루 밑을 품고 있던 집……*



시인이 애틋하게 기억하고 있는 집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야반 망명”(「십일월 4」)하듯이 떠나게 된다. “풍파의 역사는 떠나왔기에 애틋한 것이다”. 시인의 눈에 아버지는 “실업 중이셨”(「십일월 5」)고 언제나 도모 중이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평생을 ‘도모’하시느라 좌충우돌하셨던 여든넷의 아버지는 요즘도 병원 침대에서 ‘도모’ 중이시다. 4남 2녀 중 막내인 내가 열 살 즈음,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먹기와집과 전답을 다 팔아, 아버지는 또 한 차례 서울행을 ‘도모’하셨다**


* 정끝별, 「십일월에서 사월까지」, 『크나큰 잠 외: 제23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08, 71쪽.

** 위의 책, 70~71쪽.


오빠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 방학이면 내려왔는데 『새소년』이나 『어깨동무』,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잡지들을 공수해와서 막냇동생에게 선물로 주었다. 시인은 벰, 베라, 베로가 나오는 만화 『요괴인간』을 무서워하면서도 즐겨 읽었다. 그녀는 영산포에 있었지만 문화적인 선진 문물(?)에 익숙했다. 오빠들과 터울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팝송과 같은 청소년 또는 청년 문화를 남들보다 빠르게 흡수해서 문화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다. 오빠들은 학업과 연애에서 종종 말썽을 일으켰기에 시인은 재수를 안 하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현모양처가 되는 것을 일찌감치 꿈으로 못 박아두고 있었다. 오빠들과 언니 때문에 그녀는 연애를 해보기도 전에 이미 연애를 다섯 번 정도는 해본 것 같았고 재수를 서너 번 해본 것 같았다고 술회한다. 형제자매들의 혼돈과 방황은 시인의 말 그대로 ‘난리블루스’였다.

타오르는 강 문학관에서.


그녀는 막내 오빠와 함께 나주에 남아 있었는데 어머니가 종종 서울 집의 살림을 돌보느라 올라갈 때면 어머니의 부재에 따른 설움이 북받쳤다고 한다. 마침내 그녀도 4학년 2학기 때 서울 금화초등학교로 전학을 한다. 그녀는 이참에 여러 기억들을 더듬고 다듬었는데, 전학 간 초등학교의 생활기록부에는 ‘체구가 작은’ 이라는 신체적 특징과 함께 준법성과 성실성, 책임감과 인내심을 갖춘 학생이라는 담임선생님의 평가가 적혀 있었다.


오빠들이 있던 서민 아파트에 들어가 살다가 녹번동에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명동성당 앞에서 경양식집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꾸리셨다. 하지만 선비 기질이 다분한 아버지는 요식업으로 돈을 버는 것을 떳떳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하여 시인이 1988년 『문학사상』에 시로,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으로 등단했을 때는 마치 과거 급제라도 한 듯 무척 기뻐하셨다.


서울로 전학 온 초반, 그녀는 시골에서 올라온 것 때문에 주눅이 든 채 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쓴 시를 담임선생님께서 반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다. 시인은 지금도 그 첫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흰 손수건 같은 구름이 손짓하고 있다”. 시인의 상상력이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다음에 쓴 시는 「내 동생」. 그녀는 막내여서 동생이 없는데 가공의 인물을 창조한 것이다.


여러 번 살림을 풀고 다시 꾸리느라 어머니는 지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눈에 그 당시 어머니는 “금간 어머니”(「흘러가는 집 날아다니는 가족」)로 보였다. 제각각 낯선 서울에서 제 터를 찾아다니느라 집은 흘러가고 가족들은 날아다니고 있었다. “세간의 상처” 때문에 “새파란 나도 썩고 있다”. “중학생이 되어 새로 이사 온 2층집 거실에는 밀레의 <이삭줍기>가 걸려 있었고 피아노가 들어와 있었다.”(「십일월에서 사월까지」, 74쪽)


그녀는 초등학교에 이어 집에서 2킬로미터 반경 이내에 있는학교들만 다녔다. 그 당시 종로에 있던 숙명여중, 남가좌동에 있는 명지고등학교, 신촌에 있는 이화여대. 중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했는데, 글짓기에 솜씨가 있기는 했지만 과제를 잘하는 모범생이었기에 한 것이지 시나 문학에 빠진 적은 없었다. 그녀는 어수선한 형제들 틈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모범적인 길을 일찍부터 정해놓고 있었다. 자식들의 분란 때문에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자신만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국어를 잘하고 좋아한 까닭에 국문학과를 지망했고 조신하게 학교 잘 다니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대에 진학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여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연세문학회 날라리 회원이었던 막내 오빠 소개로 이화문학회를 물어물어 ‘기어들어갔다’”.(「십일월에서 사월까지」, 77쪽) 문학회를 들어간 것도 국문학 수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문학적 개안은 이화문학회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입회 초반엔 낯선 환경과 거친 분위기 때문에 자주 울었다. 그녀는 음주 경험이 없었고 몸도 좋지 않아 술을 마시는 게 힘들었다. 대학 입학 후 폐결핵을 앓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한 움큼의 약을 먹고 대학보건소에 들러 주사를 맞고 엉덩이가 얼얼한 채로 학교를 다녔다. 술만 먹으면 울었고 시와 사람, 사회에 부대끼다 지쳐서도 울었다. 신촌로터리에서 연세대 앞으로 가는 어두컴컴한 밤길, 연세대 앞 기차 굴다리에서 무던히도 울었다. 하지만 민족민주운동과 여성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던 대학 분위기에서 흔히 말하는 ‘의식화’를 거치게 된다. 사춘기마저도 무난하게 보낸, 누구보다 모범생이었던 그녀의 억눌렸던 것들이 사회적 각성과 함께 폭발하기 시작했다.


시인은 이화문학회의 무서운 선배로 이름이 났는데, 그녀에 따르면 그것은 오해이다. 전설적인 일화를 남긴 무서운 선배들은 대학을 졸업해서 떠났는데 자신만 대학원에 남아 종종 문학회에 출몰하니 그 전설적인 선배들의 잔영이 자신에게 합쳐져서 왜곡된 이미지로 남은 것이라고 한다. 시인은 이화문학회에서 혹독한 합평을 통해 자신을 단련했다. 합평 시간엔 매번 날이 서 있는 비평이 오고 갔다. 그만큼 시에, 삶에, 사회에, 시대에 치열하게 맞서려고 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무렵을 문학에, 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던 시절, 시를 쓰고 시를 살았던 시기, 시인이 되는 것 외에 다른 꿈을 꿀 수 없던 때로 기억한다. 시인은 이 시기를 ‘습습한’ 습작의 시기, 땀과 눈물로 범벅된 시간이라고 회고한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제 생에 처음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선택한 게 시였고, 정말 ‘시인’ 외에는 되고 싶은 게 없었어요.”* 이 당시의 시인의 상황은 ‘둥지새’에 비유될 수 있다. ‘공중에서의 길잃음’과 ‘뻘밭에서의 발버둥’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자유롭게 한번 날아보지도 못하고 뻘밭에 고개를 파묻고 살아가야 하는 새는, 발이 없어 평생을 공중에서 날아다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지상에 내려앉는 새의 반대편에 있다. 흔들리는 영혼으로 은폐된 사랑을 찾아 나서는 길이 그녀의 청춘이었지 않았을까.


* 정끝별·손미, 「<대담> 시와 삶이 함께 간다는 것」, 『이 시는 세 개의 새시입니다』, 201쪽.


시인은 초기 습작 시절만 해도 소박하고 여린 감성을 가진 시들을 썼는데, 이미 자신보다 의식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앞서있는 선후배들의 시를 보면서 콤플렉스를 가지기도 했다. 그녀는 2학년 때 문학회 회장을 맡으면서 다른 학교와의 문학적 투쟁(?)에 앞장섰고 김지하, 황지우, 이성복의 시집들을 탐독하면서 시적 갱신을 다짐한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 남들보다 잘 쓰고 싶다는 승부욕도 작동했던 듯하다. 그녀는 꿈속에서도 시를 썼다. 그리고 시를 쓰기 위한 유예의 시간을 가지려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1987년 초겨울 친구 따라 난생처음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했다가 떨어진 후, 겨울방학 내내 방에 틀어박혀 두벌식 타자기로 시를 쓰고 고친다. 형식적인 실험과 새로운 화법을 시도해보면서 자신의 시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듬해 1988년 6월호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한다. 「칼레의 바다」는 시인의 경험과 5·18 광주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의 기억을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이라는 조각에 기대어 쓴 시이다. 비린내와 소금기로 가득한 밤, 가슴이 밧줄로 묶인 채 우울한 전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시인은 수평선이 가슴에 밀려오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녀의 초기 시들은 다소 사회 참여적인, 그래서 좀 거칠고 저항적인 자세를 드러내는데, 한 평론가는 그녀를 운동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남자 시인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붉은 수수밭」 같은 작품들이 그 당시 시인의 목소리를 잘 전달하고 있다.


시인은 첫 시집의 원고를 묶었지만 먼저 출간을 제안해오는 출판사가 없었다. 그때 세계사 편집주간이었던 최승호 시인이 첫 시집을 내자는 제안을 했고 시인은 기쁜 마음으로 응한다. 시인은 표제 시로 「졸참나무 숲에 살았네」를 뽑아서 가져갔는데, 「자작나무 내 인생」으로 바꾸자는 최승호 시인의 제안에 망설이지 않고 수긍했다. 자작나무의 흰 빛은 두 번째 시집 제목인 『흰 책』으로 이어진다. 『흰 책』은 되풀이되는 삶의 무한 반복을 언어유희가 실린 농담으로 감싸 안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인으로서의 비애와 시인으로서의 자괴감을 자조적이고 냉소적으로 풀어낸 시들이 많다. 이 시들에서는 오규원의 중기 시와 이승훈의 후기 시의 강한 압력이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쳇바퀴와 같은 삶에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속박을, 고름(膿)처럼 고이기만 하는 삶을 유머(弄)로 맞서보려는 심산에서 시도한 일이었다. 인유와 패러디가 주요 시적 장치로 작동한 것은 그 때문이다. 「시속에서 쉬는 시인」의 마지막 구절은 “시 속에서야 비로소 쉰다”이다. 휴식(休)과 상함(傷)을 동시에 아우르는 ‘쉬다’라는 술어의 이중성을 차용하면서, 시를 쓸 수 없는 숨 가쁜 일상에서 잠시 놓여나 시를 쓰지만 이미 그 시는, 시를 쓰는 시간은 또 다른 부패를 불러온다. 쉬어야만 시인이고 시 속에서만 시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역설.


그녀는 『삼천갑자 복사빛』을 낸 시기를 시의 화양연화와 같은 것으로 술회한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잡으면서 불안정한 생활 때문에 조급함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벗어나 가정과 일에 밀려 뒷자리로 물러나 있었던 시가 다시 한번 최전선에 서게 된 것이다. 마흔 무렵, 그녀는 시인으로서도 여자로서도 끝에 도달했다는 불안감과 절망감에 시달렸다. 그녀는 자신이 불쌍하고 가여운 존재라는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흰 책』에 실린 「절필을 선언하는 시인」을 쓸 무렵 시인의 고민과 위기는 극점에 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절필에 대한 생각은 집필에 대한 강한 욕망과 함께 집필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불안이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꽉 막혀 있고 묶여 있던 것들에서 벗어나면서 절필까지도 생각했던 시에 복사빛 같은 신생의 빛깔이 퍼져 나갔다. 덜컥거리고 지지부진한 시에 속도감이 붙고 활력이 솟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 속에 내재된 시의 정수를 절박한 마음으로 뽑아냈다.


2003년은 시를 다시 회복하는 시기이며 사랑의 배후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이때 「춘수春瘦」를 썼다.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

— 『삼천갑자 복사빛』


언 몸이 풀리면서 몸에 물이 차오르는 때가 봄인데 오히려 시인은 “허리띠가 남아”돌 만큼 “몸이 마”른다. 하지만 몸이 마를 만큼 안을 비워내야만 사랑이 차오를 공간이 생긴다. 『삼천갑자 복사빛』은 ‘둥근 몸’을 굴리면서 역전된 시선과 트인 시야로 “사랑의 배후”(「어떤 자리」)를 찾아 나서는 시들로 가득하다. 엉키고 헝클어진 마음들과 재가 되어가는 슬픔을 다독거리면서 받아안는 시들은 깊이 있는 울림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다독이면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쓰기는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삼천갑자 복사빛』이 시의 재출발이라고 한다면, 『은는이가』는 자신만의 형식적 실험이 본궤도에 오르는, 자신에게 착 달라붙는 느낌으로 쓴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고등학교 때 좌우명은 ‘중용’이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균형 감각과 정관의 자세를 소중하게 여겼던 듯하다. 그녀는 이 단어를 뒤늦게 다시 확인하게 된다.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의 말미에 실린 조강석의 평론 「발란사의 춤」에서 짚어낸 것이 바로 저울과 같은 균형 감각, 이탈과 회귀의 조화였기 때문이다. 이 시집을 그녀는 힘들게 탈고한다. 개인적으로 변화와 고난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갱년기라는 몸과 호르몬의 급격한 전환, 수험생이었던 딸과의 심리적인 갈등, 이직 문제 등 수습하고 처리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녀는 그 무렵 말 놓기, 말 이어붙이기라고 할 수 있는 애너그램에 빠져들었다. 애너그램은 마음이 어지러울 때 수를 놓거나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단순한 반복 작업에서 오는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은 어지러운 주변의 생활과는 거리를 둔, 어떤 낯선 질서를 찾는 일이었다. 애너그램은 말(단어)의 환유적인 이행을 통한 연접과 이접을 기본으로 한다. 거기에는 맺힘과 풀림, 응집과 확산의 양극단에 놓여 있는 말들의 균형점을 찾기 위한 고투가 담겨 있다. 하나의 말이 거느리는 또는 불러오는 다른 말의 충돌, 하나의 말 속에 숨은 이질적인 것을 끌어내는 반동을 기반으로 한 낯선 조합과 은밀한 교호 작용 속에 삶과 감각을 소생시킨다. 이를 통해 그녀는 허물어지고 삐꺽거리는 자신을, 자신의 삶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그녀의 이론적 작업의 중핵으로 작동하고 있는 패러디 시학 또한 한편으로는 관계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고정되거나 치우치지 않는 유동성을 기반으로 한다. 긍정과 부정, 높은 것과 낮은 것, 표면과 이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은 양극단의 힘을 상쇄하는 협력적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녀에게 혹 남도 기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해남의 김남주 시인과 같은 반골 기질이 흐르는 것 같다고 답했다. 그리고 언니 오빠들에 둘러싸여 살았던 조숙한 언어 환경 덕분에 생긴 예민한 언어 감각이 단단한 시를쓰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국극을 축약해 보여주는 유랑극단(나이롱 극단)이 우시장 옆에서 자주 공연을 하는 바람에 창과 판소리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남도의 가락과 창법이 몸에 새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화문학회 시절 그 당시 주목받던 시인이자 민중문학 이론가이기도 했던 채광석 시인을 특강에 모셨는데, 그때 그녀가 습작으로 쓴, 민중의 애환을 남도 가락에 얹은 시를 절창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그녀의 초기 시들은 세련된 이미지에 집중하는데, 의식적으로 남도의 가락을 죽여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첫 시집이 상대적으로 거칠고 뻑뻑한 리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오히려 시대적 우울을 불협화음 속에 담아내려 했던 의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저류로 흐르던 남도 가락이 애너그램이라는 시적 형식에 어우러진 게 아닐까 하고 시인은 자신의 근작 시들을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영산포역사갤러리에서


그녀는 스스로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면서 지난하게 걸어온 시기가 자신의 시작詩作이었다고 술회한다.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에서 애너그램을 통해 모국어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밀어붙였다면, 『모래는 뭐래』는 그것이 몸에 붙으면서 자유자재로 쓰며 다시 상승의 흐름을 탄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정상에 도달하지못한 미진함과 답답함이 다시 시를 추동하는 힘이 되었다고 할까. 시인은 다음 시집의 화두가 죽음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동료와 마음으로 모셨던 스승도 돌아가시면서 우울하게 자신을 가두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으면서 시를 많이 썼다. 울력하듯이 시를 쓰면서 우울감과 고립감, 쓸쓸함을 견뎌냈다. 올해 환갑을 맞는 그녀는 자신이 다시 한번 시적 전환을 앞둔 여울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오래 미뤄둔 산문집도 출간 예정이고 최근에 연구 작업의 주제인 ‘말년의 양식’으로 전후의 한글세대라고 할 수 있는 주요 시인들을 다룬 연구서를 집필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그녀에게 연구와 평론은 인식의 지평을 열리게 하고 낯선 것을 발견하는, 그래서 시가 막히거나 난관에 부딪혔을 때 새로운 숨구멍을 트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지친 몸과 허기를 달래기 위해 영산포 홍어거리 초입에 있는 홍어식당으로 갔다. 멀리 영산강 너머로 저녁 해가 기울고 있었다. 시인은 냄새 때문에 잘 먹지도 못하는 홍어를, 외지에서 온 우리를 위해 같이 먹었다. 홍어무침, 홍어삼합, 홍어애탕으로 풍성한 식탁이었다. 홍어는 바닷물 속에서 삼투압 조절을 위해 살 속에 흔히 요소 물질을 많이 갖고 있는데 이 요소가 분해되면서 암모니아를 만들고, 발효되고 요리되면서 아직 분해가 되지 않은 요소와 암모니아가 우리 코를 자극해 특유의 맛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처음의 강렬한 맛이 서서히 녹아내리면서 목을 타고 넘어갔다. 모든 성숙은 숙성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외부의 자극을 몸 안에 받아들이고 가라앉히는 내적 단련이라고 할 수 있다. 톡톡 튀고 발랄한 언어들의 이면에 깊은 고뇌와 반성을 응축하고 있는 것이 정끝별의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 시 부문으로 데뷔한 뒤,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됐다.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시학서 『패러디 시학』, 평론집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시론』, 시 해설집으로 『밥』,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 『돈 詩』 등을 냈다. 유심작품상, 소월시문학상, 청마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박인환문학상 등을 수상.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심장보다 높이』를 냈다. 신동엽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유심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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